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설희의 차가운 음성은 고막을 얼려버릴 것처럼 시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타고 흘러나오자, 박만길의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눈에 띄게 풀렸다. 든든한 뒷배를 확인한 사냥개의 눈에 다시금 야비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들었지, 강 변호사?"
박만길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비죽거렸다.
"백 파트너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다. 네가 여기서 아무리 날뛰어봐야 한백 안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날아갈 파리 목숨이라는 소리야."
검은 탑차의 슬라이딩 도어가 거칠게 열렸다. 굳은살이 박인 주먹을 쥔 사내들 넷이 차례로 내려 태윤과 민세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구배트와 삼단봉을 쥔 그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기업의 뒤처리를 전담하며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학습한 자들의 살기였다.
민세아가 태윤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윤은 피식 웃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오히려 전화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백 파트너님. 여전히 귀한 시간 쪼개 쓰시는 분이 이런 잡일에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영광입니다."
- "강태윤 변호사. 농담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된 모양이군요. 당신이 쥐고 있다는 박 팀장의 외환거래 내역? 그 정도는 한백의 힘으로 내일 아침이면 단순 전산 오류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민세아를 넘기고 복귀하세요. 그게 당신이 변호사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백설희가 명품 시계 태엽을 감는 듯한 미세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녀가 타인의 목숨줄을 끊기 직전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태윤은 가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미리 맞춰둔 타이머가 마침 '00:00'을 가리키며 진동했다.
"백 파트너님, 그리고 강 상무님."
태윤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상대를 질식시킬 듯한 서늘함이었다.
"제가 한백에서 험한 꼴 당하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고, 법은 언제나 가장 늦게 움직인다는 것."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딱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찢으며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 낡은 국산 세단 한 대가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검은 탑차의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쾅—!
굉음과 함께 탑차가 크게 흔들렸고, 경호원 두 명이 중심을 잃고 흙바닥을 굴렀다. 세단의 보닛이 찌그러지며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이고, 내 목이야! 이거 완전 특수테러네, 테러!"
운전석 문이 열리며 목을 움켜쥔 사내가 내렸다. 후줄근한 양복 차림에 낡은 구두를 구겨 신은 사내, 전직 강력부 검사이자 현직 신용불량 브로커인 윤재필이었다.
그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에는 실시간 방송 플랫폼의 송출 창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시청자 수가 실시간으로 폭증하는 숫자가 붉은빛으로 깜빡였다.
"야, 박 팀장! 너희들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야. 내 차 앞유리에 붙은 거 안 보여? 초고화질 4K 전방 카메라인 거?"
윤재필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경호원들의 얼굴에 들이대며 껄껄 웃었다.
"지금 이 현장, 시청자 3만 명이 실시간으로 보고 계신다. 대기업 강성그룹의 사설 경호원들이 서초동 변호사를 납치 감금하고 폭행하려는 생생한 현장! 야, 채팅창 불타는 것 좀 봐라. '강성그룹 조폭 고용', '실시간 납치 미수' 아주 난리가 났네, 난리야!"
"이, 이게 무슨……!"
박만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경호원들이 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법 위에 군림하는 강성그룹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눈이 가득한 대낮 같은 실시간 스트리밍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태윤이 한 걸음 다가서며 굳어버린 박만길의 귓가에 조목조목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에서 판결문을 낭독하는 재판장처럼 단호하고 기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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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법 제258조의2 (특수상해) 】 ①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제257조(상해) 제1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 형법 제369조 (특수재물손괴) 】 ①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제366조의 죄를 범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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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방금 전 들이받은 차량의 소유주는 일반 시민이고, 안에는 변호사법 제1조에 명시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동행한 공익 제보자가 타고 있었죠. 현행범 체포 요건이 아주 예쁘게 갖춰졌는데, 경찰 부를까요? 아니면 바로 검찰청 직통 라인으로 쏴드릴까?"
태윤의 시선이 박만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스피커폰 너머에서는 더 이상 강한찬의 조롱도, 백설희의 고압적인 지시도 들리지 않았다. 극도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에 수화기 너머에서 굳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강 상무님."
태윤이 전화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일 아침 뉴스 일면 헤드라인을 '강성 후계자, 특허 탈취 피해자 납치 사주'로 장식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이제 그만 얌전히 펜을 잡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툭, 하고 통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버림받았음을 직감한 박만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자, 박 팀장."
태윤이 품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서류 한 장과 만년필을 꺼내 그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사인해요."
"이, 이게 뭔데……."
"불법 사찰 및 협박 사실 인정 각서. 그리고 민세아 씨에 대한 민형사상 소 제기 및 일체의 접촉 금지 합의서. 아, 물론 내 의뢰인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오늘 박 팀장님이 부순 윤 변호사님 차량의 대물 수리비 명목으로 합의금 5억 원을 즉시 지급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5억?! 미쳤어?!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박만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윤재필이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를 그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어이쿠, 박 팀장님. 당신 스위스 계좌에 매달 꽂히던 그 3천만 원씩의 출처가 어디였더라? 강 상무 비자금 세탁해 준 대가잖아. 그거 국세청이랑 검찰 특수부에 찌르면 5억이 아니라 50억짜리 추징금에 징역 10년짜리 세트 메뉴인데? 선택은 자유야. 사인하고 5억으로 막을래, 아니면 영장 실질심사 받으러 갈래?"
윤재필의 능글맞은 협박에 박만길의 이가 덜덜 맞부딪쳤다. 그는 태윤의 손에 들린 태블릿과 서류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사르르 무너져 내리며 펜을 쥐었다.
서명란에 박만길의 이름석 자가 갈겨써지는 순간, 태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박 팀장님. 영수증은 이메일로 보내드리지요."
서류를 거두어들인 태윤이 경호원들을 향해 턱짓을 했다.
"꺼져."
뱀을 본 쥐새끼들처럼, 박만길과 경호원들은 찌그러진 탑차에 올라타 허겁지겁 현장을 빠져나갔다. 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강변에는 오직 세 사람과 찌그러진 세단만이 남았다.
"후우, 태윤아. 나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윤재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마트폰을 껐다. 사실 실시간 라이브 방송은 조회수를 조작한 가짜 송출 화면이었고, 녹화본 역시 먹통이었다. 전직 검사의 임기응변과 대담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사기극이었다.
"차 수리비는 확실하게 입금해 주는 거지? 저 새끼들한테 뜯어낸 5억 중에 내 지분 반띵이다?"
"약속은 지킵니다, 윤 선배."
태윤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서류를 품에 넣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민세아에게 닿았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심과 함께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정의로운 변호사인 줄 알았더니, 조폭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대기업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모습에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말했잖습니까. 난 이기기 위해서라면 악마의 가죽이라도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태윤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들이 우리를 법대로 대하지 않는데, 왜 우리만 법을 지키며 싸워야 합니까? 이 판에서는 더 영악하고 더 비열한 놈이 살아남는 겁니다."
민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복수를 완성해 줄 유일한 사냥개가 바로 이 눈앞의 사내라는 것을.
"민세아 씨. 이제 당신 아버지가 남긴 기술 특허 자료가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그리고 저들이 왜 이토록 무리수를 두며 당신을 쫓았는지 본질을 파헤쳐야 합니다."
태윤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래 법률 대장'을 개방할 타이밍이었다.
그는 윤재필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 손짓한 뒤, 차갑게 식어가는 강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검색어: 강성그룹, 민세아 부친 특허, 기술 탈취 소송 판결문.'
뇌세포가 순식간에 불타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신경 뒤편에서 붉은 번개가 치는 듯한 안구 통증이 밀려왔다. 코끝에서 비린 피 냄새가 맴돌았다. 등가교환의 법칙. 미래의 정보를 훔쳐보는 대가는 언제나 육체의 파멸을 요구했다.
그 고통의 심연 속에서, 찬란한 금빛 활자들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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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방법원 2026. 11. 14. 선고 2024가합589412 판결 】 [사건명] 특허권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 [원고] (주)세아테크 (소송대리인 변호사 강태윤) [피고] 강성전자 주식회사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한백) [주문] 1. 피고는 원고에게 450,000,000,000원(4천 5백억 원)을 지급하라. 2. 피고는 원고의 특허 제10-2015-XXXXXX호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 전해질 합성 기술'을 무단 사용한 제품의 생산 및 판매를 즉각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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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의 감은 눈꺼풀 틈새로 붉은 피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4천 5백억 원짜리 특허 소송.
원래 역사대로라면 민세아의 아버지는 자살하고, 이 특허는 강성그룹에 단돈 몇 억 원의 합의금으로 강탈당해 공중분해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합의를 설계하고 방조한 지휘부가 바로 법무법인 한백의 백설희였다.
그 무지막지한 정보의 파도 속에서, 대장의 갱신된 빨간색 경고 문구가 태윤의 의식을 날카롭게 찔렀다.
[※ 현실과의 오차 발생: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일정 변경.] [당초 예정일: 2025. 10. 15. → 변경된 예정일: 내일 오전 09:00] [안건: (주)세아테크 특허권 양도 합의 승인 및 한백 사설 펀드를 통한 대가 지불의 건.]
태윤이 번쩍 눈을 떴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시적 실명 증상이었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는 페널티가 찾아온 것이다.
"하아…… 하아……."
그는 비틀거리며 차체에 몸을 기대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눈가를 적셨지만, 보이지 않는 눈 속에서 그의 동공은 오히려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일 오전 9시.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그 이사회에서 한백의 묵인하에 민세아 아버지의 원천 특허 기술을 강성그룹으로 완벽하게 귀속시키고, 대가로 한백의 비자금 사설 펀드로 수백억 원의 리베이트가 흘러 들어가도록 기획된 마지막 도장이 찍힌다.
그 도장이 찍히는 순간, 법적으로 기술은 완전히 강성의 소유가 되며, 민세아가 쥔 모든 카드는 휴지조각이 된다.
"강 변호사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시야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민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윤은 피 묻은 입술을 짓씹으며 위선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이지 않는 초점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시간이 없군요, 민세아 씨."
태윤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일 아침, 강성그룹의 심장부를 도려내러 갑니다. 당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합의서가 완성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판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태윤은 품 안에 든 불법 사찰 각서와 머릿속에 각인된 4천 5백억 원짜리 판결문을 떠올렸다.
사냥개는 이미 목줄을 풀었다. 이제는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