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띵.

엘리베이터의 금빛 문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28층 시니어 파트너 층의 공기는 아래층 어쏘 변호사들의 사무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딛는 발소리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최고급 카펫, 은은하게 풍기는 고가 디퓨저의 침엽수 향.

하지만 그 우아함 밑바닥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태윤은 손에 쥔 가죽 가방을 고쳐 쥐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의실의 육중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자, 안에서 흘러나오던 격앙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들어와."

창가를 등지고 앉아 있는 사내, 백설희 대표 변호사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이자 한백의 시니어 파트너인 송우석 변호사였다. 그의 곁에는 강성그룹 본사 법무실의 이 상무와 실무진들이 핏발 선 눈으로 태윤을 쏘아보고 있었다.

쾅!

태윤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송우석이 대리석 테이블을 내리쳤다. 찻잔이 가늘게 흔들리며 파열음을 냈다.

"강태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나?"

송우석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테이블 위로 조금 전 태윤이 도장을 찍고 온 합의서 복사본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종이 뭉치가 태윤의 가슴팍을 때리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강성제약의 영아 소송을 4억 5천만 원에 합의해? 게다가 뭐? 원고들이 가지고 있던 쓰레기 특허를 강성제약이 무상 양도받는 조항을 넣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송 파트너님. 원고 측의 소송 동력을 완전히 상실시키고, 강성이 기술을 흡수하는 형태의 완벽한 합의라고 판단했습니다."

태윤은 일부러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내는 손짓은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신입의 그것이었다.

"판단? 네까짓 놈의 대가리에서 나온 판단이 한백을 통째로 구렁텅이에 밀어 넣을 뻔했어!"

강성그룹의 이 상무가 거칠게 끼어들었다.

"강 변호사. 그 양도받은 특허의 은닉 조항을 똑바로 봐. '기술 이전 시 발생하는 모든 세제 및 이전 비용은 양수인이 부담하며, 해당 특허의 가치 평가액은 양수인의 직전 분기 내부 유보금의 2%로 갈음한다'고 되어 있잖아!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강성그룹의 내부 유보금 2%. 그것은 자그마치 300억 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단순한 쓰레기 특허인 줄 알고 덥석 받아 안았다가, 세무 당국으로부터 300억짜리 우회 증여 혹은 부당 행위 계산 부인으로 걸려들어 세금 폭탄을 맞을 판이었다. 한백의 수뇌부와 강성 법무실이 발칵 뒤집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건 단순한 합의가 아니야. 세무조사 한 번이면 강성그룹 전체의 비자금 라인이 통째로 노출될 수 있는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야! 감히 우리 한백의 이름을 걸고 이딴 쓰레기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송우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거구에서 나오는 압박감이 회의실을 지배했다.

태윤은 즉각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둔탁한 소리가 카펫에 묻혔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송 파트너님! 제가…… 제가 신입이라 세무적인 연계 효과를 미처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대표님과 강성그룹에 누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비굴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송우석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멍청하고 무능한 신입이 겁에 질려 기어 다니는 모습은 그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온한 풍경이었다.

"죄송하다면 끝인가? 당장 이 합의 파기하고 재협상……."

"하지만, 송 파트너님."

태윤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의 눈에는 촉촉한 눈물기와 함께, 묘하게 번득이는 '탐욕'의 빛이 서려 있었다. 철저히 계산된, 타락한 생계형 변호사의 눈빛이었다.

"이 독소 조항을…… 역이용할 방법이 있습니다."

송우석의 눈썹이 꿈틀했다.

"역이용?"

태윤은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가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것은 제가 임의로 작성해 본 ‘특허권 우회 활용 처분 신탁 계약서’ 초안입니다. 세무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법률적 우회로를 설계했습니다."

송우석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상무 역시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태윤이 중앙에 정렬해 둔 핵심 조항에 멎었다.

<특허법 제202조 및 소득세법 시행령 제101조에 따른 우회 신탁 계약>

제5조 (우회 처분 및 지분 전환) 양수인은 해당 특허권을 직접 인수하는 대신, 한백이 지정하는 해외 페이퍼 컴퍼니(SPC)에 자본금 출자 형식으로 해당 특허를 신탁한다.

제8조 (비자금 전환 및 손실 보전) 해당 SPC는 특허 기술의 가치 평가액(300억 원)을 무형자산으로 계상한 후, 이를 담보로 강성그룹의 해외 법인 소유 채권을 저가로 매입하여 합법적인 자산 감액 손실로 처리한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회의실 안에 기묘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태윤은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호흡 변화를 읽었다. 사냥꾼이 덫에 걸린 짐승의 맥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건……."

이 상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단순한 특허 양도가 아니군. 합법적인 자산 감액 손실 처리를 통해, 강성그룹이 해외로 빼돌려야 했던 비자금 300억 원을 '기술 투자 실패'라는 명목으로 완벽하게 세탁할 수 있는 가판대잖아?"

"그렇습니다, 상무님."

태윤은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비벼댔다.

"제가 실수를 가장해 판을 짜 두었습니다. 세무 당국이 보기에는 강성제약이 멍청하게 쓰레기 특허를 고가에 매입했다가 손실을 본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자금이 해외 SPC를 통해 백설희 대표님께서 관리하시는 그 '특별 계좌'로 흘러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강성그룹은 합법적으로 비용 처리를 하고, 한백은 영원히 추적 불가능한 세탁 수수료를 챙기는 구조입니다."

송우석은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입 쪼다 녀석이 저지른 대형 사고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백설희 대표가 그토록 원하던 '합법적 비자금 세탁 가판대'를 제 발로 헌상한 꼴이었다.

게다가 이 공을 자신이 가로챈다면? 백설희 대표의 눈에 들어 차기 총괄대표 라인의 확고한 2인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강태윤."

송우석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가늘고 끈적한 탐욕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너, 제법이구나. 이 꼼수를 신입 녀석이 혼자 생각했다?"

"아닙니다, 송 파트너님! 모두 파트너님의 평소 가르침과 한백의 위대한 시스템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파트너님께서 지시하신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랐을 뿐입니다."

태윤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공을 온전히 송우석에게 바치겠다는 굴종의 선언이었다. 송우석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있는 태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변호사는 모름지기 이래야지. 법의 테두리를 살짝 흐려서 우리 고객과 한백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그게 진짜 일류 변호사다. 아주 잘했어."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송 파트너님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겠습니다."

태윤은 바닥에 시선을 처박은 채,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차가운 미소였다.

'물었군, 멍청한 승냥이 새끼.'

그들이 핥아먹은 300억짜리 비자금 세탁 가판대는, 훗날 국세청 대대적인 기획 조사와 특별검사 도입 시 한백과 강성그룹의 목을 한 번에 동강 낼 완벽한 단두대가 될 터였다.

그 덫의 첫 번째 매듭이 묶였다.

***

몇 시간 뒤, 28층의 폭풍에서 벗어나 서초동 법조타운 인근의 한적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태윤은 시동을 켜지 않은 차 안에서 담배를 물었다.

창문을 조금 열자 매캐한 연기가 흐린 밤하늘로 흩어졌다.

똑똑.

조수석 창문이 거칠게 두드려졌다.

문을 열자, 텁수룩한 수염에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걸친 사내가 슥 올라탔다. 퀴퀴한 줄담배 냄새와 알코올 향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한백의 온갖 더러운 뒤처리를 전담하는 해결사이자, 왕년의 에이스 강력부 검사였던 윤재필이었다.

"야, 강태윤 변호사님? 대단하시네. 신입 핏덩이가 28층 시니어 룸에서 살아남다 못해 어깨까지 두드려 맞고 나오셨어?"

윤재필은 비아냥거리며 품에서 이쑤시개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쓰레기 특허 합의 건으로 한탕 크게 칠 줄 알았더니, 결국 기어들어가서 똥꼬나 빨아주고 온 거냐? 덕분에 내 수수료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인마."

태윤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조용히 윤재필을 응시했다.

"윤재필 씨."

"왜? 아쉬우면 형님이 술이나 한잔 사 주랴?"

"정선 카지노, 블랙잭 테이블 VIP 구역. 지난주 목요일 새벽 3시 15분."

윤재필의 이쑤시개가 뚝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바카라로 시원하게 날리시고 막판에 블랙잭으로 복구하려다 사채업자 '독사' 파 놈들한테 신체포기각서 쓰셨더군요. 원금 3억에 이자만 월 2천. 이번 주 금요일까지 안 갚으면 오른쪽 신장 하나 떼기로 계약하셨던데."

윤재필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품속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미행 붙였냐? 뒤를 캔 거야?"

"게다가 면직당하기 직전에 강남 유흥업소 여종업원 명의로 빼돌려 둔 차명 계좌 하나 있죠? 거기 남은 잔고 4천만 원도 이미 독사 애들이 압류 조치 들어가려고 법원에 가압류 신청서 접수했더군요. 내일 오전 중에 결정문 나옵니다."

"이, 이 개새끼가……!"

윤재필이 태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태윤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가라앉은 눈으로 윤재필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을 뿐이다. 그 눈빛에 담긴 압도적인 살기에, 윤재필의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과거 수많은 흉악범을 상대해 본 베테랑 검사 출신인 그조차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연과도 같은 인간불신의 눈빛이었다.

"손 치우시죠. 떼일 신장이 아까우면."

태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나랑 손을 잡으면, 내일 오전 중에 나올 가압류 결정을 기각시켜 주겠습니다. 그리고 독사 놈들 장부 털어서 그 사채 빚 전체를 무효로 만들어 주지."

윤재필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원하는 게 뭐야? 나 같은 타락한 쓰레기한테 뭘 바라고 이러는 건데?"

"사냥개."

태윤이 가죽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윤재필의 무릎 위에 던졌다.

"한백과 강성그룹이 버리는 쓰레기들을 주워 담는 사냥개가 필요해. 우선 네가 가지고 있는 그것부터 내놔."

윤재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라니?"

"시치미 떼지 마. 네가 한백 상층부 똥 닦아주면서 보험용으로 챙겨둔 거 있잖아. 서초동 지하시장의 비밀 요정 '화청'의 간이 장부 조각과 출입 명단 파편."

윤재필의 호흡이 멎었다.

그것은 자신이 한백에서 토사구팽당하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빼돌려 은닉해 둔 최후의 보루였다. 이 신입 변호사가 대체 어떻게 그것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공포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진짜 신입 변호사 맞아?"

"선택해."

태윤이 시계를 흘깃 보았다.

"사채업자들의 칼받이가 되어 길바닥에서 썩어갈 건지, 아니면 내 밑에서 한백의 목줄을 끊는 사냥개가 될 건지."

윤재필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을 뒤적였다. 그리고 가죽 안감 깊숙이 숨겨져 있던 때 묻은 수첩 조각 하나를 꺼냈다. 한백의 고위 파트너들과 정재계 인사들이 '화청'에서 주고받은 뇌물과 성 접대 정황이 간략하게 기록된 장부의 파편이었다.

태윤은 그것을 건네받아 대강 훑어보았다.

'완벽해.'

그는 장부를 다시 윤재필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이건 네가 계속 가지고 있어."

윤재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걸 나한테 다시 준다고?"

"그래. 그리고 한백 상층부 놈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은밀하게 흘려라. 냄새를 풍기란 말이야. 쥐새끼들이 미끼를 물 수 있도록."

윤재필의 눈에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인 빛이 감돌았다. 이 남자는 단순히 자신을 협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백이라는 거대한 공룡을 상대로 거대한 판을 짜고 있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칭찬으로 듣지."

태윤이 차 문을 열었다.

"내려.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윤재필은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고, 태윤은 가속페달을 밟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그날 밤.

서초동의 개인 오피스텔로 돌아온 태윤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책상 앞에 앉았다.

하루 내내 긴장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때, 머리 중심부에서부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아윽……!"

태윤은 책상을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더니, 이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미래 법률 대장을 과도하게 조회하고 현실의 인과율을 뒤흔든 대가였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의 흐려진 망막 위로 푸른빛의 텍스트가 강제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미래 법률 대장 동기화 중……] [현실과의 오차율 발생: 1.2%] [페널티 등급: 중(Moderate)] [일시적 시각 상실 예상 시간: 45분]

태윤은 이를 악물고 책상 서랍을 더듬었다. 미리 준비해 둔 한백 전용 특수 진통제 약병을 찾아 알약 두 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씁쓸한 약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미약하게나마 통증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시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대장의 텍스트만이 뇌리 속에 선명하게 빛났다.

[새로운 사건 데이터 동기화] [대상자: 민세아 (27세)] [관련 사건: 강성그룹 기술 탈취 및 민병두 대표 자살 방조 사건] [현재 상태: 강성그룹 경호팀에 의해 강제 감금 및 자살 위장 공작 진행 중] [위치: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432-10, 지하 연립주택] [잔여 시간: 2시간 15분]

태윤의 맥박이 급격히 빨라졌다.

민세아.

강성그룹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복수의 칼날을 갈던, 훗날 자신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될 그녀의 목숨이 지금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태윤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아직 눈이 보이지 않는다. 남은 시간은 단 두 시간.

태윤은 더듬거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찾아 윤재필의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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