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402호 법정.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서늘하게 울렸다. 피고석에 앉은 강태윤은 일부러 한 치수 큰, 깃이 닳아빠진 다크 네이비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흘렀고, 안경테는 콧날 아래로 자꾸만 미끄러졌다.

누가 보아도 긴장감에 짓눌린 초짜 어쏘 변호사의 전형이었다.

"피고 대리인."

법대(法臺) 위에서 재판장이 안경 너머로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지루함과 짜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원고 측이 제시한 강성제약의 유해 물질 자체 내부 보고서에 대해 피고 측 의견은 어떻습니까? 제조물 책임법상의 결함을 인지하고도 묵인했다는 증거로 보이는데."

태윤은 움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 뭉치를 뒤적이다가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렸다. 피고석 바로 뒤, 참관인석에 앉아 있던 강성제약 법무팀 임성준 팀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게... 재판장님."

태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론을 시작했다.

"저희 피고 강성제약은 당시 제품 안전 기준을 준수하였으며... 원고 측이 제출한 보고서는 최종 결재가 나지 않은 초안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고의적인 은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초안이라 할지라도 유해성 경고가 누락된 채 출시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원고 대리인석에 앉은 중견 변호사 한만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쏘아붙였다. 서초동에서 뼈가 굵은 한만우의 입꼬리가 기고만장하게 올라갔다. 한백이 보낸 대리인이 고작 서류나 떨어뜨리는 신입 쪼다라는 사실을 간파한 기색이었다.

"피고 대리인은 법리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제조물 책임법 제3조 (제조물책임)] ① 제조업자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하여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본 조항에 따르면 제조업자의 고의 여부는 과실 책임의 성립 요건이 아닙니다. 결함의 존재와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만으로도 배상 책임은 충분히 성립합니다!"

한만우의 호통이 법정에 울려 퍼졌다.

태윤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류 가방을 뒤적였다.

"하지만 원고 측 보고서는 입수 경로가 불분명하며, 사본에 불과하여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의2에 준용하여, 전문증거에 불과한 사본은 원본과의 동일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민사재판에서 형소법의 전문법칙을 들이대다니, 한백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

한만우가 코방귀를 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유가족들의 눈에 분노와 함께 한 가닥 희망이 서렸다.

태윤의 헛발질 덕분에 강성제약의 과실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 그렇다면 원본을... 제출해 주시면 저희도 검토해 보겠습니다."

태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흘렸다.

대어(大魚)가 미끼를 문 순간이었다.

"원하신다면 다음 기일에 즉시 원본을 제출하겠습니다! 강성제약 연구소의 직인이 찍힌 오리지널 문서를 말입니다!"

한만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안경알 너머로 비친 그의 눈동자에는 법정의 그 누구도 읽지 못한 서늘한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원고 측이 그 원본을 법정에 공식 제출하는 순간, 강성제약의 유해 물질 은폐는 사법부의 공식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된다. 백설희가 아무리 뒤에서 손을 쓰려 해도, 법원에 박힌 공식 증거는 지울 수 없다. 태윤은 어설픈 신입의 외견으로 상대편이 가장 강력한 카드를 스스로 패에 쥐고 법정에 던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쯧, 저런 등신 같은 새끼를 변호사라고."

뒤편에서 임성준 팀장이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재판이 휴정되자마자, 임성준은 태윤의 덜미를 잡듯 다가왔다.

"강 변호사. 지금 장난합니까? 법정에서 질질 짜면서 상대한테 증거 제출할 기회를 퍼줘? 한백에서 당신 같은 낙하산을 보낸 이유가 대체 뭐야?"

태윤은 허리를 거의 90도로 꺾으며 연신 손을 비벼댔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 제가 법정 경험이 부족해서 그만 페이스에 말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설희 파트너한테 당장 컴플레인 걸 겁니다. 당신, 이번 합의 실패하면 변호사 자격증 반납할 준비나 해!"

임성준이 태윤의 어깨를 팍 밀치고 법정을 나섰다.

그들의 뒤로 동기 변호사들의 차가운 비웃음이 쏟아졌다. 멀리서 재판을 참관하러 온 한백의 동기 김우진이 팔짱을 낀 채 다가왔다.

"야, 강태윤.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민사법정에서 형소법 전문법칙을 읊냐? 판사 표정 봤어? 나라면 창피해서 오늘 당장 사표 쓴다."

"아하하, 우진 씨. 제가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하얘졌나 봐요. 좀 도와주세요."

태윤은 바보처럼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네 똥은 네가 치워야지."

김우진은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며 돌아섰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무능한 쓰레기로 확신하는 순간. 태윤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안쪽 칸막이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커버를 내린 뒤 주저앉았다.

가면을 벗을 시간이었다.

태윤은 눈을 감고 머릿속의 어둠을 대면했다.

'미래 법률 대장, 각성.'

뇌리가 번쩍이며 차가운 스파크가 일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뇌세포를 헤집기 시작했다.

"으윽...!"

태윤은 신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손등을 세게 깨물었다. 눈앞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일시적 실명 페널티. 시신경이 마비되며 차가운 어둠이 시야를 덮쳤지만, 그의 뇌 속에서는 미래의 판결문과 강성제약의 기밀 자산 목록이 선명한 활자로 떠올랐다.

[강성제약 영아 소송 - 이면 합의 시나리오 검색] [검색 결과: 강성제약 보유 특허 목록 및 가치 평가서]

```text [강성제약 내부 기밀: 휴면 특허 KR-10-2013-098431] - 특허명: 유기 화합물 분리 및 정제용 나노 필터 기술 - 가치 평가: 현재 장부가 0원 (상용화 실패로 분류) - 미래 가치: 2018년 바이오 벤처 '넥스트케어'의 표적 항암제 필터링 핵심 기술로 채택되어 로열티 가치 약 450억 원 추산. ```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통으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뇌 속의 계산기는 무서운 속도로 돌아갔다.

강성제약과 백설희가 제시한 이면 합의 가이드라인은 현금 5억 원 이하.

현금 5억 원으로는 유가족들의 평생 치료비와 보상금을 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합의서에 '강성제약이 보유한 휴면 특허 KR-10-2013-098431의 영구 무상 실시권 및 특허권을 원고들이 설립할 공익 재단에 양도한다'는 조항을 끼워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가치 0원짜리 쓰레기 특허다.

강성제약 법무팀 입장에서는 현금을 아끼면서 생색을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라 여길 것이다. 당장 장부상 손실도 전혀 없다. 그들은 태윤의 이 제안을 비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일 터였다.

하지만 3년 뒤, 이 특허는 450억 원짜리 황금알이 된다. 유가족들은 대기업의 시혜성 푼돈이 아니라, 대기업의 목줄을 쥔 특허권자로서 평생 마르지 않는 재단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후우..."

태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고, 결막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처방 약물 통을 꺼내 알약 하나를 삼켰다. 한백의 특수 처방 약물. 일시적인 실명 전조를 가라앉히는 극약이었다.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며 법조타운의 회색 벽이 눈에 들어왔다.

'백설희, 임성준. 너희가 나를 무능한 사냥개로 여기는 지금이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다.'

* * *

두 시간 뒤, 서초동의 한 한정식집 밀실.

강성제약 법무팀장 임성준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태윤이 지참한 이면 합의서 초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원고 대표이자 피해자 유가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은 민세아가 앉아 있었다.

민세아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지만, 태윤이 미리 밑작업을 해둔 덕에 극적인 타협 테이블에 앉은 상태였다.

"현금 4억 5천만 원에... 여기 이 특허 양도 조항은 뭡니까?"

임성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예! 임 팀장님."

태윤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따랐다.

"원고들이 설립할 '영아 환경 보건 재단'의 명분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그냥 돈만 주면 강성제약이 잘못을 인정한 꼴이 되니까요. 강성이 보유한 특허 중 상용화 가치가 없어 폐기 예정인 나노 필터 특허권을 무상 양도 형식으로 재단에 출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언론에는 '강성제약, 유가족 재단에 원천 기술 기부로 사회적 책임 다해'라고 포장할 수 있습니다."

"폐기 예정 특허라고?"

임성준이 법무팀 실무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실무자가 태블릿을 두드리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예, 팀장님. 장부가 0원 처리된 쓰레기 특허입니다. 유지 비용만 매년 수백만 원씩 나가는 애물단지입니다."

임성준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허, 머리를 썼네. 강 변호사, 법정에서는 맹탕인 줄 알았더니 이런 잔머리는 굴릴 줄 아는군? 우리 입장에선 쓰레기 치우고 언론 플레이까지 공짜로 하는 셈이니까."

"아유, 과찬이십니다. 모두 임 팀장님과 강성제약을 위한 충정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태윤은 허리를 굽히며 아첨했다.

민세아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태윤의 비굴한 태도에 구역질이 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태윤이 사전에 그녀에게 전달했던 쪽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고개를 숙여야, 3년 뒤 강성의 심장을 도려낼 칼을 쥘 수 있습니다.'

민세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현금 4억 5천만 원과 해당 특허권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민형사상 소송을 모두 취하하고, 향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민 대표님."

임성준은 개선장군처럼 만년필을 꺼내 합의서에 서명하고 강성제약의 법인 인감을 날인했다.

도장이 찍히는 둔탁한 소리가 밀실에 울렸다.

태윤은 합의서를 조심스럽게 수거해 가방에 넣었다. 겉으로는 안도하는 척 땀을 닦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희열이 요동쳤다.

'완성이다.'

합의서가 체결된 직후, 한백의 내부 메신저와 보고 라인을 통해 소식이 전파되었다.

[신입 강태윤 변호사, 강성제약 영아 소송 4억 5천만 원에 극적 이면 합의 완료. 특허 기부 형식으로 강성제약 브랜드 이미지 제고 기여.]

한백의 단체 대화방은 조롱과 실소로 도배되었다.

- 결국 푼돈 쥐여주고 합의했네. - 그 쓰레기 특허는 왜 받았대? 원고들이 바보인가? - 강태윤 저 새끼, 백 파트너한테 이쁨받으려고 강성에 아주 간을 빼줬구만. - 그래봤자 무능한 똥받이 이미지 낙인찍힌 건 안 변하지.

동기들의 비웃음 섞인 문자들이 쏟아졌지만, 태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비웃는 '쓰레기 특허'가 장차 어떤 괴물이 되어 돌아올지, 그 멍청한 대가리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태윤의 개인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백설희 파트너 변호사의 직속 비서였다.

"강태윤 변호사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극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지금 즉시 본사 28층 파트너실로 올라오십시오. 대표 변호사님 방에서 호출이 있었습니다."

태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표실에서요? 합의는 성공적으로 끝났는데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강성그룹 본사 법무실과 한백의 시니어 파트너들이 전부 28층에 집결해 있습니다. 분위기가 아주 안 좋습니다. 서두르십시오."

뚝.

전화가 끊겼다.

태윤은 손에 쥔 합의서 최종본을 내려다보았다. 합의서의 여백, 그리고 특허 양도 각서의 첨부 서류 조항들.

자신이 심어놓은 완벽한 덫에 벌써 꼬리가 밟힌 것인가? 아니면 한백의 수뇌부 중 누군가가 이 쓰레기 특허의 진짜 가치를 눈치챈 것인가?

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맴돌았다.

"어디, 한 번 들이받아 보시지."

그는 양복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한번 비굴하고 유순한 '을'의 가면을 얼굴에 덧씌웠다. 2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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