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는 차가웠고, 비린내가 났다.

뺨을 타고 흐르던 것은 빗물이었을까, 아니면 이마가 깨져 흘러내리던 피였을까. 귓가를 때리던 둔탁한 타격음과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은 생생했다. 한백의 사냥개로 온갖 더러운 뒤처리를 전담했던 10년의 세월. 그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차가운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지는 배신뿐이었다.

"치워라."

귓가를 스치던 백설희의 건조한 목소리. 붉은 밑창이 선명한 크리스찬 루부탱 구두가 시야의 마지막을 장식했었다.

스윽.

"……!"

강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아스팔트가 아닌, 매끄럽게 왁스 칠이 된 최고급 데코타일 바닥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비린내가 아니라 옅은 라벤더 향의 방향제 냄새였다.

"야, 강태윤. 너 어제 잠 안 잤냐? 안색이 왜 그래?"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빳빳하게 풀이 죽은 감색 정장, 깃이 빳빳한 흰 셔츠, 그리고 가슴팍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원증. 사원증에는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 법무법인 한백 / 신입 어쏘시에이트 변호사 강태윤 ]

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손가락. 사냥개로 구르며 생긴 흉터들도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진짜 정신 못 차리네. 오늘 백 파트너님 첫 오리엔테이션인 거 몰라? 찍히면 바로 아웃이야, 인마."

말을 건넨 것은 연수원 동기이자, 훗날 한백에서 가장 먼저 태윤의 뒤통수를 쳤던 김우진이었다. 20대 후반 특유의 오만함과 날이 선 경쟁심이 눈빛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태윤은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끌어올렸다.

'돌아왔다.'

단순한 자각이 아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가슴속을 지배하는 지독한 불신과 증오가 이 시간의 왜곡을 증명하고 있었다. 10년 전, 법무법인 한백의 신입 연수실. 모든 비극과 굴종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쿵!

그 순간, 머릿속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윽……!"

태윤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허옇게 죽을 정도로 강한 압박이었다. 귓가에서 이명이 고주파 소음처럼 삐이익 울렸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뇌의 피질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거대한 정보의 덩어리가 강제로 압착되며 밀려드는 감각이었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우측 하단부터 시작해 검은 먹물이 번지듯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실명(失明)의 공포가 엄습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파가 쪼그라드는 통증 속에서, 뇌리에 정체불명의 활자들이 스스로 명조체 형태로 배열되며 거대한 책의 형태로 떠올랐다.

**[ 미래 법률 대장 (未來 法律 大帳) ]**

그것은 회귀 전 10년 동안 대한민국 사법부와 대기업, 그리고 한백이 저질렀던 모든 판결문과 비리 장부, 수사 기록이 총망라된 절대적인 데이터베이스였다.

태윤이 무의식적으로 그 페이지를 넘기려 검색어를 떠올린 순간, 머릿속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강성그룹, 2024년 횡령 사건 판결문.'

생각이 닿자마자 머릿속에 수십 페이지의 판결문이 시각화되어 박혔다. 동시에, 뇌세포가 문자 그대로 괴사하는 듯한 참혹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커흑……!"

태윤은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오른쪽 눈의 시야는 이미 완벽한 암흑으로 변해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셔츠를 적셨다.

"야, 강태윤! 너 진짜 왜 이래? 어디 아파?"

김우진이 질색하며 의자를 뒤로 물렸다. 주변의 신입 변호사들 역시 태윤을 벌레 보듯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첫날부터 숙취 때문에 저러는 거야? 개념 없다, 진짜." "한백 들어왔다고 벌써 긴장 풀렸나 보지."

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손으로 오른쪽 눈을 지그시 눌렀다.

지독한 등가교환의 법칙이었다. 미래를 엿보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뇌의 파괴와 일시적 실명. 극동의 통증 속에서 태윤은 과거 한백의 상층부 놈들이 은밀하게 복용하던 특수한 신경안정제 성분의 비급여 처방 약물을 떠올렸다. 뇌의 혈류를 강제로 제어해 신경 마비를 억제하는 약물.

'……8층 백설희의 개인 금고, 혹은 VIP 대기실 약장에 보관되어 있을 그 파란 알약.'

지금은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태윤은 턱을 사르르 떨며 통증을 뼈마디로 견뎌냈다. 오른쪽 눈의 암전은 약 2분이 지나서야 서서히 빛의 형체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시한부 능력이자, 동시에 한백과 강성그룹의 목줄을 쥘 유일한 무기였다.

"후우……."

태윤은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하다, 우진아. 어제 긴장해서 잠을 한숨도 못 잤더니 이명이 좀 심해서."

태윤은 비굴할 정도로 어깨를 움츠리며 싱긋 웃었다. 눈가가 잘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연약한 신입의 그것이었다.

"어휴, 깜짝 놀랐잖아. 첫날부터 쓰러지면 너 바로 낙오야. 정신 똑바로 차려."

김우진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소회의실의 육중한 체리목 문이 열렸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규칙적으로 때렸다.

또각. 또각.

회의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잡담을 나누던 신입 변호사 열두 명의 척추가 일제히 빳빳하게 굳어졌다.

수석 파트너 변호사, 백설희였다.

그녀는 타이트한 네이비 정장에 칼날처럼 날이 선 커리어우먼의 전형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한백의 핵심 파트너 자리를 꿰찬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의 등급을 매기는 도축업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백설희는 손목에 채워진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시계를 아주 자연스럽게 흘깃거렸다.

"오리엔테이션 시작 시각에서 정확히 1분 12초가 지났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으나 회의실 전체를 압박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한백은 여러분의 비싼 등록금을 대준 대학원이 아닙니다. 시간은 곧 돈이고, 여러분이 흘려보낸 1분 12초는 한백이 청구할 수 있는 빌러블 아워(Billable Hour)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신입 변호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 하나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백설희는 단상 뒤로 걸어가 태블릿 PC를 툭 던지듯 놓았다.

"신입 연수 기간 동안 여러분에게 주어질 과제는 단 하나. 한백이 보유한 대기업 고객사들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실적에 따라 여러분의 소속 팀이 결정될 겁니다. 금융팀, M&A팀…… 혹은 저 지하의 서면 작성 전담실로 가거나."

마지막 말에 김우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서면 전담실은 한백에서 사실상 '용도 폐기'된 변호사들이 밤새 서류만 복사하는 유배지였다.

"첫 번째 사건입니다."

백설희가 빔프로젝터를 켰다. 스크린 위로 거대한 제약회사의 로고와 함께 신생아 유해 물질 피해자 모임의 사진이 띄워졌다.

**[ 강성제약, 영아용 물티슈 유해 물질 검출 사건 소송 대리 ]**

"강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강성제약의 건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성분과 유사한 유해 물질이 영아용 물티슈에서 검출되어 현재 42가구의 유가족 및 피해자가 집단 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백설희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요구 조건은 명확합니다. 한백은 강성제약의 법률 대리인으로서 이 소송을 '철저히 파쇄'해야 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웠다.

"언론의 이목이 쏠려 있는 만큼, 법정에서 화려하게 승소하는 것은 오히려 강성그룹의 이미지에 타격을 줍니다. 따라서 이번 소송의 목표는 '피해자들과의 이면 합의'입니다. 하지만 합의금 총액은 5억 원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42가구 전체 합산 금액입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42가구에 총액 5억 원이라니. 가구당 고작 1,000만 원 안팎의 금액으로 영아 사망 및 장기 손상 피해를 합의하라는 소리였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지옥의 미션이었다.

게다가 이 소송의 이면에는 더 더러운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얽혀 있었다. 합의를 잘못 이끌어내면 대기업의 원망을 사고, 합의를 거부하고 법정으로 가면 언론의 포화 속에 한백이 독박을 쓰게 되는 구조였다.

"누가 맡겠습니까?"

백설희의 시선이 신입 변호사들을 훑었다.

김우진을 비롯한 소위 '엘리트' 라인의 동기들은 일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서류를 뒤적이는 척했다. 이 사건은 맡는 순간 커리어가 박살 날 것이 뻔한 독배였다. 이겨도 욕을 먹고, 지면 가차 없이 버림받는 사냥개 전용 덫.

침묵이 길어질수록 백설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로 그때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파트너님."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있었다.

강태윤이었다.

그는 허리를 약간 굽히고,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순종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이, 강태윤. 너 미쳤어?"

김우진이 옆에서 다급하게 소매를 잡아끌었으나, 태윤은 이를 가볍게 물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태윤 변호사라고 했나요?"

백설희의 차가운 시선이 태윤의 전신을 옭아맸다. 그녀의 눈빛에는 의아함과 동시에 얕잡아보는 빛이 역력했다.

"이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자원하는 겁니까? 신입의 패기만으로 덤볐다간, 변호사 등록증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서초동에서 퇴출당할 수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파트너님."

태윤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긴장감도, 분노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한백의 안녕과 파트너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직한 사냥개의 울음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강성그룹은 저희 한백의 가장 소중한 동반자입니다. 유가족들의 감정적인 떼쓰기에 대기업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제가 부족하지만, 파트너님의 지도 아래 한백의 품격에 걸맞은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태윤은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했다.

그 굴종의 깊이가 너무도 완벽하여, 회의실 안의 동기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저 새끼, 완전 딸랑이네." "이름 알리려고 독배를 덥석 무네.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비웃음 소리가 나지막하게 퍼졌지만, 태윤의 입꼬리는 보이지 않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이것이 바로 '을의 위장술'이었다. 강성그룹과 한백이 자신을 완벽하게 방심하고 부릴 수 있는 도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

사실 태윤의 머릿속 '미래 법률 대장'에는 이 소송의 진짜 판결문과 강성제약의 숨겨진 치명적 결함이 이미 통째로 들어와 있었다.

``` [서울중앙지방법원 2015. 11. 14. 선고 2015가합510234] 사건명: 손해배상(기) 원고: 민세아 외 41명 피고: 주식회사 강성제약 판결 요지: 피고는 제조물 책임법 제3조에 의거, 원고들에게 발생한 신체적 손해에 대하여 총액 120억 원의 배상 책임을 지며, 유해 물질 고의 은폐 정황이 인정되므로…… ```

이 소송은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강성제약이 120억 원의 배상금과 함께 기업 이미지가 공중분해 될 폭탄이었다. 백설희는 그 폭탄의 도화선을 대충 5억 원짜리 테이프로 붙여 막으려 하는 것이었고, 신입 변호사 하나를 제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좋습니다."

백설희의 입꼬리에 메마른 미소가 걸렸다.

"강태윤 변호사. 일주일 주겠습니다. 유가족 대표를 만나서 5억 원 이하의 이면 합의서를 받아오세요. 실패할 경우, 한백에서의 당신 자리는 없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파트너님."

태윤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순종적인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잔혹한 눈빛이 바닥의 차가운 유리에 슬쩍 비쳤다가 사라졌다.

'백설희. 네가 내민 그 독배가, 결국 네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될 거다.'

복수의 첫 번째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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