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앵거리는 문서 파쇄기 소음이 15층 복도 전체를 짓눌렀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친 법무법인 한백의 사옥은 거대한 난지도나 다름없었다. 캐비닛이 열려 젖혀지고, 기밀 마크가 찍힌 서류 봉투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백설희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내려간 지 불과 수십 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태윤은 귀를 찌르는 소음 속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창밖을 응시했다. 아래쪽 도로에는 파란색 검찰 호송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탁.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들어선 인물은 연행에서 무사히 풀려난 윤재필이었다. 그는 헝클어진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태윤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강태윤. 진짜 사람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데 뭐 있네. 검찰청 취조실 에어컨 바람이 아주 뼈를 시리게 하더라."
윤재필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품 안에서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책상 위로 툭 던졌다. 수첩 사이로 누렇게 바랜 종이 쪼가리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네가 말한 게 이거지? 사채 시장 큰손들하고 한백 늙은이들이 비밀 클럽 '화청'에서 굴리던 사설 사모펀드 간이 장부. 그리고 VIP 진짜 명단."
태윤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윤재필이 은밀하게 은닉해 두었던 한백 상층부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윤 변호사님."
"고생은 무슨. 이거 털리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한백 창립 멤버들까지 싹 다 한강 가야 해. 그나저나 약속한 지분은 확실하게 챙겨주는 거지?"
"제가 을의 신의를 저버린 적이 있던가요."
태윤이 서늘하게 미소 짓는 순간, 열린 문틈으로 또 다른 그림자가 비쳤다.
민세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빛은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칠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선명한 군용 USB 메모리가 꽉 쥐여 있었다. 아버지가 자살하기 직전까지 목숨처럼 품고 있었던, 그러나 복잡한 군용 암호화 프로토콜이 걸린 채 고장 나 버려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유품이었다.
"가져왔어요. 강 변호사님 말대로…… 기어이 한백이 무너지는 날에 맞춰서."
민세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태윤은 손짓으로 윤재필을 가리켰다.
"윤 변호사님이 데려온 전문가들이 대기 중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국방부 망 빼고는 다 뚫을 수 있는 사설 포렌식 팀이죠."
사무실 구석, 윤재필이 미리 대기시켜 둔 어둠의 경로 해커들이 특수 복구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장비가 구동되는 웅웅거리는 진동음이 방 안을 채웠다.
"이거 군용 256비트 암호화 장치라 일반적인 크래킹으로는 평생 걸려도 안 열립니다."
작업을 지켜보던 해커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하드웨어 칩셋 자체를 우회해서 메모리를 직접 덤프하는 방식을 쓰면 가능합니다. 마침 한백 내부 망이 압수수색으로 마비되어서 외부 신호 간섭도 없군요."
모니터 위로 수천 개의 소스코드가 어지럽게 흘러내렸다.
태윤은 그 광격을 지켜보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미래 법률 대장'을 개방할 징조였다.
'지금이다.'
그는 눈을 감고 뇌 속의 아티팩트를 강제로 가동했다.
[검색어: 강성그룹 기술 강탈 사건 및 민성진 사망 사건 관련 최종 판결문]
콰과광!
머릿속에서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듯한 이명과 함께, 안구가 뒤집히는 듯한 극심한 안압이 전해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사물이 사라지고 오직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붉은색 글자들만이 둥둥 떠올랐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괴사하는 고통에 태윤의 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대로 영구 실명에 이를 터였다.
태윤은 품 안에서 미리 준비해 둔 주사기를 꺼냈다. 한백의 로열패밀리들만이 극비리에 사용한다는 뇌신경 차단제, '뉴로세타-D'였다.
그는 숙련된 동작으로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왼쪽 팔뚝 정맥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약물이 혈관을 타고 뇌로 직행했다.
스으으으.
뇌압이 급격히 내려가며 마비되었던 시신경이 억지로 개방되었다. 이명은 잦아들었지만, 약물의 부작용으로 손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지독한 독극물이지만, 지금의 태윤에게는 미래를 보기 위한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머릿속 대장에 기록된 미래의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 [사건번호: 2026고합1094] 피고인: 강한찬, 백설희 주문: 피고인 강한찬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피고인 백설희를 징역 8년에 처한다. 이유: 피고인들은 피해자 민성진이 보유한 원천 특허 기술을 무단 강탈하기 위해 한백의 영향력을 이용, 기획 소송을 남발하여 피해자의 법인 '아론텍'을 고의로 부도에 이르게 하였음. 그 과정에서 피고인 강한찬은 피해자에 대한 극단적 선택 유도 및 사실상의 살인교사를 모의한 정황이 인정됨... ```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열렸습니다!"
해커의 외침과 함께 모니터 화면에 녹음 파일 하나가 활성화되었다.
민세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태윤은 마우스를 가져가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지직거리는 잡음 끝에 들려오는 똑똑한 목소리들이었다.
- "강 사장님, 민성진이가 특허 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대로 가면 강성 신소재 라인 전체가 멈춥니다." - "그럼 어쩌라고? 어이, 백 변호사. 돈 받아 처먹었으면 일을 하란 말이야. 그 늙은이 하나 매장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론텍의 자금줄을 묶고, 민성진 본인을 사기 혐의로 기소 의견 송치하도록 이미 검찰 라인을 움직였습니다. 다만 본인이 끝까지 버틸 경우..." - "버티면? 죽여서라도 입 막아. 사고사든 자살이든 유서 한 장 조작하는 게 대수야? 내 눈앞에서 그 틀딱 새끼 안 보이게 해."
백설희와 강한찬의 목소리였다.
살인교사와 특허 강탈을 모의하는 추악한 육성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
민세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어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아버지가 왜 그런 비참한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 배후에 숨겨진 잔인한 진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태윤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위로 따위가 아니었다. 핏빛 어린 동맹의 확인이었다.
"민세아 씨. 울 시간은 끝났습니다. 이제 이 자들을 법정이라는 단두대 위로 올릴 시간입니다."
민세아가 눈을 치켜떴다. 눈물로 얼룩진 눈동자 속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네. 그자들을... 제 손으로 찢어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요."
"좋습니다. 법정 최종 공방의 증인석은 당신 자리입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이 USB가 그들의 심장을 꿰뚫는 창끝이 될 겁니다."
태윤은 즉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머릿속 대장에서 검색한 법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강한찬의 주식거래 중지 행정처분 신청서와 긴급 체포영장 발부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해 나갔다.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문장들은 단순한 변론서가 아니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교살하기 위한 법적 올가미였다.
<br>
|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 (조세포탈 등) | | :---: | | ① 연간 포탈세액 등이 10억원 이상인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 | ② 제1항의 경우에는 포탈세액 등의 2배 이상 5배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을 병과한다. |
<br>
태윤은 이 조항을 기반으로 강한찬과 강성그룹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특허 강탈 기술의 로열티를 세탁한 정황을 엮어 법원에 대리 접수했다.
그가 엔터 키를 누른 지 정확히 세 시간 뒤.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사와 포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가 하나의 기사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속보] 강성그룹 3세 강한찬, 중소기업 특허 강탈 및 조직적 살인교사 정황 녹취록 단독 입수! [뉴스데스크] "죽여서라도 입 막아" 강한찬 육성 파일 파문... 강성그룹 주가, 개장 직후 하한가 직행. [금융위] 강성그룹 전 계열사 주식거래 전격 일시 중지 조치 검토.
"미쳤군, 진짜 미쳤어."
윤재필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찬 이 새끼, 이제 진짜 끝장이다. 강성그룹 시가총액이 지금 몇 조 원 단위로 증발하고 있어. 이사회고 뭐고 일가 친척들이 먼저 나서서 찢어 발기려 들걸?"
그때, 태윤의 개인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한찬'이었다.
태윤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 "강 변호사! 강태윤!!! 너지? 네놈이 그 녹음 파일 다 넘긴 거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의 기고만장하던 태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냥개에게 쫓기는 광기에 찬 짐승의 비명이었다. 배경음으로 고가의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 사장님. 목소리가 많이 상하셨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이 개새끼가...! 내가 돈 줄게! 백설희 그 미친년이 주기로 한 돈의 열 배, 아니 백 배라도 줄 테니까 당장 그거 조작된 거라고 기자회견 해! 내 도주 자금 세탁하는 계좌 알잖아? 거기로 일단 5백억 쏠 테니까 제발...!"
태윤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강 사장님. 법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변호사는 많지만, 이미 발부된 체포영장과 전 국민의 눈은 돈으로 살 수 없거든요."
- "뭐? 야! 강태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강성그룹 후계자 강한찬이야! 내가 널 죽여버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는 모양이군요. 당신은 이제 후계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자일 뿐입니다."
태윤은 가차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윤재필은 마른침을 삼켰고, 민세아는 비로소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태윤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지연형 복수 설계의 마지막 장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태윤이 한백 사옥 로비에 들어섰을 때, 분위기는 전날보다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비 중앙의 대형 모니터에는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 인물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구치소 가처분 신청을 통해 임시 변호인 접견실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백설희였다.
그녀의 수의 차림은 초라했으나, 눈빛만큼은 독사처럼 살아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한백 소속의 정예 변호사 수십 명이 도열해 있었다.
- "본 법무법인은 이번 강성그룹 사태의 모든 배후에, 신입 변호사 강태윤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강태윤은 피고인 강한찬의 자금 세탁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한 공범입니다."
백설희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선언했다.
- "한백은 오늘부로 변호사 백 명을 총동원해 강태윤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공모 혐의로 역고소할 것임을 밝힙니다. 아울러 그의 변호사 자격을 영구 박탈하는 징계 절차에 착수합니다."
로비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윤에게 쏠렸다.
백설희가 벼랑 끝에서 판을 뒤흔들기 위해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자신만 죽지 않겠다는, 한백의 모든 조직력을 동원해 태윤을 논개처럼 물고 늘어지겠다는 선전포고.
태윤은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한백의 무덤을 파기 위한 진짜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