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감찰본부의 자진 해체 소식이 서초동 바닥을 휩쓴 날, 법무법인 한백의 18층 대표실 유리창 너머로 붉은 노을이 피처럼 번졌다.

백설희가 던진 승부수는 가차 없었다. 감찰이라는 내부의 칼날이 무뎌지자마자, 그녀는 강성그룹 우회 상속 집행을 단독으로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한백의 기획실이 발칵 뒤집혔고, 실무진은 숨 쉴 틈 없이 서류 뭉치를 날라댔다.

강태윤은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정장에 달린 은색 커프스링크를 천천히 맞추어 끼웠다. 귓가에서 삐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긁어댔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릿하게 뭉개지며 검은 그을음 같은 잔상이 내려앉았다.

미래 법률 대장을 최초로 조회했던 날이 떠올랐다. 머릿속의 모든 신경이 가위로 잘려 나가는 듯한 극통. 안구 뒤편이 찢어지며 찾아왔던 그 검붉은 암전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 지옥 같은 실명 전조를 유예시켜 준 유일한 열쇠.

태윤은 안주머니에서 차가운 유리 앰플을 꺼냈다. 한백의 로열패밀리와 정재계 극소수 VIP들만이 뇌졸중 및 급성 뇌압 상승을 막기 위해 철저히 비공개로 처방받아 사용한다는 극비 뇌신경 차단제, '뉴로세타-D'였다.

"결국 이 더러운 약물마저 너희들의 유산이군."

주사기 바늘이 혈관을 파고들자 차가운 액체가 머릿속의 열기를 강제로 얼려 버렸다. 짓눌리던 시야가 선명하게 트였다. 일시적인 구원이자, 뼈를 깎아내는 유예였다. 잔여 약효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판을 끝내야 했다.

태윤은 준비해 둔 가죽 서류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오늘, 백설희는 자신을 상속 집행 대리인이라는 이름의 사냥개로 내세웠다. 실패하면 모든 법적 책임을 뒤집어쓸 을(乙)의 자리.

그것이 바로 태윤이 원하던 완벽한 사냥터였다.

***

서울가정법원 제18심판정 복도는 무거울 정도로 고요했다. 강성그룹 상속 재산 분할 기일 및 세무 대리 심문이 열리는 법정 앞에는 이미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 변호사, 백 대표님이 이번 건에 대해 사소한 잡음도 용납하지 않으셨네. 서류 검토는 완벽하겠지?"

강성그룹 법무팀장이자 백설희의 심복인 송태수 비서실장이 태윤의 어깨를 짚으며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걱정 마십시오, 실장님. 대표님의 설계는 빈틈이 없습니다."

태윤은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생긋 웃었다. 그의 손에는 백설희가 기획한 '강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및 상속세 우회 계약서' 원본이 들려 있었다. 강한찬의 차명 주식을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양도한 뒤, 이를 다시 공익법인에 기부하는 형태의 정교한 탈세 시나리오였다.

법정 문이 열리고, 심판관들과 함께 이례적으로 참관인 자격의 사내들이 배석했다.

어두운 감색 정장을 차려입은 이들의 가슴팍에는 금빛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특별조사팀. 대기업의 탈세를 저승사자처럼 추적하는 대한민국 세무 당국의 심장부였다.

"강성그룹 피상속인 강진호 회장의 지분 상속 및 명의개서 청구 대리인, 법무법인 한백의 강태윤 변호사입니다."

태윤이 법대 앞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금일 제출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은 적법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범위 내에서 집행되는 공익 기부 절차입니다. 세무 당국의 오해가 없도록 상세 서류를 제출합니다."

태윤은 서류 봉투를 뜯어 서기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서류철의 가장 깊은 곳, 백설희가 직접 서명하고 날인한 '내부 약정서'가 교묘하게 끼워져 있었다. 일반적인 기부 계약서라면 절대 포함되지 않아야 할, 명의신탁 주식의 의결권 제한 및 배당금 반환 청구 소송 포기 각서였다.

이것은 명백한 명의신탁재산의 증여의제 대상이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45조의2 (명의신탁재산의 증여의제)] ① 권리의 이전이나 그 행사에 등기등본 등이 필요한 재산에 있어서 실제소유자와 명의자가 다를 경우에는 국세기본법 제14조에도 불구하고 그 명의자로 등기등본 등을 마친 날에 그 재산의 가액을 실제소유자가 명의자에게 증여한 것으로 본다.

국세청 특별조사팀의 박성호 과장이 서류를 넘기다 일순간 손가락을 멈췄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강 변호사. 이 47페이지 하단의 특약 조항은 뭡니까? 해외 신탁 자산의 실질적 지배권이 여전히 상속인 강한찬에게 귀속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걸 공익 기부라고 신고한 겁니까?"

송태수 실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태윤의 옷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강 변호사! 저게 무슨 소리야? 저 조항이 왜 저기 들어가 있어?"

태윤은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지어 보이며 목소리를 떨었다.

"아, 그, 그것은…… 단순한 자문 과정에서의 오기(誤記)인 것 같습니다. 백설희 대표님께서 직접 조율하신 문구라 실무진이 미처 삭제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사, 삭제하지 못해?"

박성호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가 법정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오기라고요? 법무법인 한백의 총괄대표 백설희의 친필 서명과 직인이 찍힌 이 약정서가 단순 오기란 말입니까? 이건 명백한 조세포탈 공모이자 소송 사기입니다!"

"과장님, 잠시만요! 오해가 있습니다. 한백은 단지 법률 자문을 했을 뿐……."

송태수가 다급히 변명하려 했으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였다.

태윤은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소리 없이 올렸다. 백설희가 구축해 둔 철옹성의 가장 약한 고리를 국세청의 눈앞에 정확하게 들이민 순간이었다.

***

그 시각, 서울중앙지검 인근의 한 카페.

"태윤아, 진짜 이 타이밍에 터뜨려도 되는 거냐?"

윤재필이 닳아빠진 가죽 가방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쪼가리들을 꺼내놓으며 물었다. 과거 강력부 에이스 검사였던 사내의 눈빛에 오랜만에 사냥꾼의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가 꺼내놓은 것은 사채 시장과 한백 상층부를 연결하는 사설 비밀 클럽 '화청'의 간이 장부 조각과 명단이었다. 과거 윤재필이 한백의 함정에 빠지기 직전 목숨 걸고 은닉해 두었던, 백설희의 아킬레스건 중의 아킬레스건.

"재필 형님. 국세청 조사4국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한백의 숨통을 끊을 적기입니다."

태윤은 장부의 특정 페이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백설희가 강성그룹 강한찬의 차명 계좌를 관리해 주며 화청을 통해 정기적으로 수수료를 상납받은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태윤은 미리 포섭해 둔 대한일보 사회부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기자님. 지금 바로 이메일 확인하세요. 엠바고는 없습니다. 한백 대표 백설희가 강성그룹의 상속세를 원천 증발시키기 위해 국세청 고위직에 로비를 시도했던 화청 비밀 장부 파일입니다. 단독으로 올리시죠."

- 강 변호사님, 이거 진짜 확실한 겁니까? 한백을 정면으로 치는 건데 우리 데스크가……-

"국세청 조사4국이 지금 막 한백 본사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러 출발했습니다. 데스크가 망설이는 사이에 다른 언론사에 특종 넘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다급한 타이핑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바로 작성 들어갑니다!"

전화를 끊은 태윤이 윤재필을 바라보았다.

"형님, 검찰청에 있는 최진엽 검사에게 연락하십시오. 국세청보다 먼저 한백의 서버를 선점해야 한다고 전하세요. 백설희가 증거를 파쇄하기 전에 말입니다."

윤재필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자기가 몸담은 로펌을 통째로 불태우려고 작정을 했어."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태윤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이명이 다시금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

한백 법무법인 본사 사옥.

로비의 회전문이 부서질 듯 돌아가며 푸른색 플라스틱 상자를 든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수사관들과 국세청 특별조사팀원들이었다.

"검찰입니다! 압수수색 영장 집행하러 왔습니다! 전 직원들은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검찰이 쳐들어온 거야?"

비서들과 어쏘 변호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기밀 서류를 파쇄기에 밀어 넣으려는 실무 변호사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수사관들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태윤은 자신의 사무실 문을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 같은 극통이 엄습했다. 미래 법률 대장이 뇌 속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실시간 정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태윤은 한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눈을 감았다.

'검색어. 백설희 비밀 수수료 장부 및 강한찬 차명 재산 수사 방향.'

뇌세포가 타들어가는 이명 속에서, 대장이 미래의 판결문과 수사 기록을 쏟아냈다.

[대검찰청 중수부 수사 보고서 (202X년 10월 발췌)] 피의자 백설희는 사설 클럽 '화청'의 비밀 계좌를 통해 강성그룹 강한찬의 차명 지분 자금을 세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수료 420억 원을 해외 페이퍼 컴퍼니 '블루 홀딩스'로 은닉한 사실이 확인됨.

태윤은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는 대장에서 읽어낸 스위스 가명 계좌의 흐름과 자금 세탁 경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이를 서울중앙지검 최진엽 검사의 무기명 제보 핫라인으로 전송했다.

검찰이 어디를 찔러야 한백의 심장부가 터지는지, 그 정교한 법적 해석 가이드를 검사의 손에 직접 쥐여준 셈이었다.

탁.

노트북을 닫은 태윤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코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하얀 셔츠 깃을 적셨다. 그는 손수건으로 담담하게 피를 닦아낸 뒤, 거울을 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강태윤!!!"

사무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백설희가 들이닥쳤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핏발 선 눈이 평소의 오만하던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네놈이지? 국세청에 그 계약서를 흘린 것도, 언론에 화청 장부를 뿌린 것도! 전부 네놈 짓이지?!"

백설희가 태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태윤은 가볍게 몸을 피하며, 여전히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대표님이 시키신 대로 법정에서 강성그룹의 상속 안건을 대리했을 뿐입니다. 을(乙)인 제가 무슨 힘이 있어 대형 로펌의 비밀을 밝히겠습니까?"

"이 교활한 자식이……!"

백설희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녀의 뒤로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백설희 대표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동행해 주시죠."

"이 손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백설희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다. 그녀의 오만한 명품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태윤은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시계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한백의 심장부가 쪼개지는 소리가 사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서 파쇄기가 돌아가는 앵앵거리는 소음과 비명, 수사관들의 고함으로 로펌은 이미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서, 태윤은 스마트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화면에 민세아의 이름이 떴다.

"세아 씨."

- 네, 강 변호사님. 뉴스 봤어요. 한백이 완전히 뒤집어졌네요.

민세아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흥분이 서려 있었다.

태윤은 창밖으로 검찰 호송차에 올라타는 백설희를 내려다보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마지막 무대를 시작할 차례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강성그룹과 한백의 목을 완전히 벨 시간입니다."

태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칼날처럼 번뜩였다.

"민세아 씨. 마침내 그 고장 난 군용 암호화 USB를 가져오세요. 사냥을 끝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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