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화면 위로 백설희의 서슬 퍼런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로비에 모여든 한백 직원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살을 찔러왔지만, 강태윤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다.
"공모죄 역고소라."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 차가운 안개가 서렸다.
백설희가 제 무덤을 파기 위해 로펌의 전 재산을 걸고 판을 벌였다. 백 명의 변호사단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는 결국, 그녀가 쥐고 있는 마지막 패가 그만큼 빈약하다는 방증에 불과했다. 태윤은 귓가로 조용히 흘러내리는 이명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유리 앰플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뉴로세타-D.'
처음 10년 전으로 회귀해 머릿속의 '미래 법률 대장'을 최초로 조회했을 때, 뇌신경이 통째로 끊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찾아왔던 완전한 암전. 그때 태윤을 구원한 것은 한백의 로열패밀리들만이 극비리에 스위스에서 들여와 복용한다던 이 특수 뇌신경 차단제였다. 뇌압을 강제로 떨어뜨리고 시각 신경을 일시적으로 개방하는 기적의 약물. 하지만 그 대가는 고스란히 영혼을 갉아먹는 이명과 경련으로 돌아왔다.
태윤은 약물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껴 둘 필요는 없겠지. 오늘이 마지막 축제니까."
***
사흘 뒤,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이례적으로 형사 합의부의 특별 기일과 법무부 변호사 징계위원회의 현장 실사가 병합된 특별 법정이 열렸다. 방청석은 이미 백설희의 역고소 선언을 취재하려는 기자들과 정계 관계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법정 우측의 피고인 겸 대리인 석에 홀로 선 강태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그 맞은편에는 한백의 간판급 전관 변호사 서른 명이 거대한 장벽처럼 도열해 있었다. 부장판사 출신, 검장 출신의 거물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법정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피고인 강태윤 변호사."
재판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넘겼다.
"한백 측에서 제출한 역고소장 및 공모 혐의 입증 자료에 따르면, 피고인은 강성그룹 강한찬의 자금 세탁 및 특허 침해 소송 과정에서 단순한 대리인을 넘어 능동적인 설계자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소명하시겠습니까?"
한백 측의 수석 대리인인 전직 대법관 출신 임형우 변호사가 거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장님, 소명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저희 한백이 자체 조사한 내부 전산망 기록과 강태윤 변호사의 개인 계좌 이체 내역에 따르면, 강한찬 사장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정체불명의 자금이 흘러 들어간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는 변호사법 제34조 위반이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임형우의 목소리가 법정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방청석에서 나직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백설희는 피고인석 뒤편, 증인 대기석에 수의를 입은 채 앉아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태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금 세탁의 설계자라. 아주 흥미로운 각본이군요."
태윤은 법대 앞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 각본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있습니다. 임 변호사님께서 언급하신 그 수십억 원의 자금이 흘러간 '진짜 계좌'의 주인 말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엄연히 강태윤 자네 명의의 신한은행 계좌에..."
"그 계좌가 사설 비밀 클럽 '화청'의 차명 세탁용 계좌라는 사실을 빼놓으셨더군요."
태윤이 손짓하자, 법정의 대형 스크린에 낡은 종이 조각들과 디지털화된 장부의 조각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과거 윤재필이 사채 시장과 한백 상층부의 더러운 거래를 추적하며 목숨 걸고 은닉했던, 화청의 간이 장부 원본과 VIP 명단이었다.
"이 장부는 한백의 수석 파트너 백설희가 화청을 통해 정·재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공여하고, 강성그룹의 비자금을 세탁해 온 실제 내역입니다. 임 변호사님이 제시한 제 명의의 계좌는, 백설희의 지시에 의해 도용된 수십 개의 유령 계좌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여기, 백설희의 친필 서명이 담긴 화청 내부 결재 문서가 그 증거입니다."
"저, 저건...!"
임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법정 뒤편에 앉아 있던 백설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태윤은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미래 법률 대장'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판례와 법조문을 쏟아냈다.
``` [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6도15256 판결] 타인의 명의를 도용하여 금융거래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범죄수익을 은닉한 경우, 명의를 도용당한 피해자는 형법상 공범이 아닌 명의도용의 피해자에 불과하며, 해당 거래로 인한 형사적 책임은 실제 거래를 주도하고 지배한 실질적 행위자에게 귀속된다. ```
태윤은 법조문을 그대로 암송하듯 읊조리며 임형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한백의 정예 변호사 서른 분이 모이셨는데, 이 기본적인 판례조차 검토하지 않고 기소 의견을 내셨습니까? 아니면, 백설희의 강요에 의해 허위 소송을 기획하신 겁니까?"
"이, 이봐요! 강 변호사! 그 장부의 진위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위 여부요?"
태윤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럼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드려야겠군요."
태윤은 주머니에서 작고 낡은 군용 USB를 꺼내 들었다. 민세아가 자살하기 직전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자 기술 탈취의 스모킹 건이었다.
"강성그룹이 한백과 공모하여 진행한 원천 기술 강탈 사건의 실체입니다. 이 고장 났던 군용 암호화 USB를 복구한 결과, 백설희가 직접 서명하고 승인한 '강성 상속세 무력화 및 특허 우회 등록 기획서'의 원본 파일이 나왔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복구된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속세를 0원으로 만들기 위해 중소기업의 특허를 강탈하고, 이를 가짜 해외 법인으로 빼돌린 상세한 자금 흐름도가 붉은 선으로 촘촘히 얽혀 있었다.
"이 기획서의 작성 시점은 제가 한백에 입사하기 3년 전입니다. 신입 변호사인 제가 3년 전에 작성된 강성그룹의 상속세 탈루 계획을 설계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윤의 서슬 퍼런 반박에 서른 명의 한백 변호사단 중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전관들의 위엄은 이미 진흙탕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돼..."
백설희가 이빨을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강태윤... 네가 감히 그걸 어떻게..."
그 순간, 태윤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미래 법률 대장을 과도하게 조회한 페널티였다. 대장의 정보와 현실의 오차가 커질수록 페널티의 강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두통과 함께 코끝에서 비릿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뚝. 뚝.
붉은 피가 태윤의 하얀 와이셔츠 깃을 적시며 법정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 변호사님?!"
방청석에 앉아 있던 민세아가 비명을 지르듯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윤재필 역시 굳은 표정으로 태윤을 주시했다.
하지만 태윤은 피를 닦지 않았다. 오히려 흘러내리는 피를 그대로 둔 채,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법대를 붙잡았다. 그의 입가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것마저도 철저히 계산된 연출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태윤은 피가 섞인 가쁜 숨을 내쉬며 언론의 카메라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거대 로펌 한백이 자신들의 법적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한 명의 신입 변호사를 어떻게 사지로 몰고 가는지 보고 계십니다. 저는 이 더러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법정 안의 기자들이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플래시 불빛이 피 흘리는 태윤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방청석의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거대 악에 맞서 목숨을 잃어가며 진실을 부르짖는 젊은 변호사. 대중이 가장 열광하는 영웅의 프레임이 완벽하게 씌워진 순간이었다.
재판장의 두드리는 의사봉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정숙하십시오! 검찰 측, 즉시 백설희 피고인의 자금 세탁 및 소송 사기 혐의에 대한 추가 영장 발부를 검토하고, 한백 변호사단의 허위 고소 제기 경위를 조사하십시오."
완벽한 파멸이었다.
한백의 정예 변호사 서른 명은 단 한 마디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서류 가방을 챙기기 바빴다. 그들이 쌓아 올린 철옹성은 신입 변호사 단 한 명의 가공할 법적 공세와 설계 앞에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법정 경위들이 백설희의 양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수갑의 차가운 쇳소리가 대법정에 청아하게 울렸다.
백설희는 경위들에게 끌려 나가며 태윤의 옆을 지나쳤다. 그녀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태윤의 어깨를 낚아채듯 끌어당기며, 오직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뱀처럼 읊조렸다.
"강태윤... 네가 이긴 것 같지?"
그녀의 숨결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착각하지 마. 내가 죽어도, 내 뒤에 있는 현직 헌법재판관들과 청와대 라인은 널 가만두지 않아. 넌 결국 뼈도 못 추리고 찢겨 죽을 거다. 이 사법부 전체가 한백의 손아귀에 있어...!"
백설희가 끌려 나간 문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윤은 피 묻은 입술을 천천히 닦아내며, 어둠이 짙게 깔린 법정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새로운 사냥감들의 이름이 차례로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