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윤. 지금 당장 대표실로 올라와라. 네가 보낸 그 설계서…… 대체 무슨 뜻이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백설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미세한 호흡의 변화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탐욕과 경계가 뒤섞인 포식자의 숨소리.
태윤은 입술 가장자리에 맺힌 핏방울을 혀끝으로 핥았다. 비릿한 쇠 맛이 혀를 자극하며 흐려지던 감각을 깨웠다.
"지금 올라가는 중입니다, 대표님."
"차 안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꼴로 내 카펫을 더럽힐 생각은 아니겠지?"
"대표님의 카펫을 더럽힐 피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피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5분 뒤에 뵙겠습니다."
태윤은 전화를 끊었다. 운전대를 잡은 민세아의 옆모습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백미러를 통해 태윤의 엉망이 된 얼굴에 머물렀다. 강한찬의 구두굽에 짓밟혀 터진 뺨과 찢어진 입술, 그리고 피로 물든 셔츠 깃.
"정말 이대로 갈 건가요?"
민세아의 목소리에 걱정보다는 기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태윤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뺨의 통증 때문에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이 상처들이 백 대표의 의심을 지워줄 가장 확실한 면죄부입니다. 세아 씨는 약속대로 움직여 주십시오."
태윤은 품속에서 작은 가죽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소형 주사기 세 대가 들어 있었다.
'뉴로세타-D.'
한백의 로열패밀리와 극소수의 파트너들만이 극비리에 처방받아 사용하는 뇌신경 차단제. 미래 법률 대장을 최초로 조회했을 때, 태윤의 뇌세포는 폭발적인 정보량을 견디지 못하고 마비되기 시작했었다. 눈앞이 암전되고 사지가 마비되는 그 끔찍한 실명 전조 증상.
과거 한백의 사냥개 시절, 그는 백설희의 금고에서 이 약물의 정체와 성분표를 우연히 훔쳐보았다. 한백이 정·재계 고위층의 뇌 질환이나 마약성 중독을 은폐하기 위해 스위스 사설 연구소에서 밀수입하던 특효약. 뇌압을 급격히 낮추고 신경 전달 물질을 강제로 활성화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정상화하는 신의 약물인 동시에, 뇌를 갉아먹는 독약이었다.
태윤은 익숙한 동작으로 주사기 하나를 꺼내 소매를 걷어붙였다.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러 넣는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읏……."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타고 뇌로 직행하자, 관자놀이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이내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극도로 선명해졌다. 흐릿하게 번지던 가로등 불빛들이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제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귀끝을 파고드는 가느다란 이명은 약물로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은 길어야 두 시간.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판을 짜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민세아가 차를 세운 곳은 서초동 한백 본사 빌딩의 지하 전용 주차장이었다. 태윤은 흩어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차 문을 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
한백 총괄대표실.
넓고 어두운 방 한가운데,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뒤에 백설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태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손목에 찬 파텍 필립 시계를 흘깃거렸다.
똑, 딱.
초침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백설희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태윤의 얼굴을 응시했다. 엉망이 된 얼굴과 피 묻은 칼라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차가운 흥미가 서렸다.
"꼴이 볼만하군. 강성그룹의 후계자에게 아주 제대로 밟힌 모양이야."
태윤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언제나처럼 완벽한 '을'의 자세였다.
"강한찬 상무의 성정을 자극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소모였습니다. 제 몸 하나 상하는 것으로 강성을 흔들 키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태윤은 품에서 녹음기와 태블릿 PC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화청 정원에서 녹취한 강한찬 상무의 폭행 및 불법 감금 음성 파일입니다. 그리고 이 태블릿에는 강 상무가 직접 지시한 기술 유출 관련 자금 세탁 경로가 담겨 있습니다."
백설희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태블릿을 끌어당겨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 띄워진 복잡한 지분 구조와 은닉 계좌의 흐름을 보는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건…… 단순한 자금 세탁이 아니군. 강한찬이 사외이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만든 유령회사의 지분 구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의 종착지는 한백이 관리하는 비공개 자산 신탁 펀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강한찬은 이 기술 탈취 건이 터지면 자신이 매장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폭행하며 입을 막으려 한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카드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말해 봐."
백설희가 턱을 괴며 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탐욕의 빛이 일렁였다.
"강한찬을 폭행죄로 징역형에 처하는 것은 하책입니다. 강성이 다른 후계자를 세우면 그만이니까요. 상책은, 이 약점을 쥐고 강한찬을 영원히 한백의 사냥개로 만드는 것입니다."
태윤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제가 강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법률 자문단장 자리를 수임받겠습니다. 겉으로는 강한찬의 무죄를 변론하고 이 기술 유출 사태를 완벽하게 덮어주는 구원자 역할을 수행하는 겁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독약을 주입하겠습니다."
"독약이라니?"
"강한찬이 보유한 강성그룹의 핵심 지분 전부를, 한백이 배후에서 지배하는 신설 공익재단으로 출연하게 만드는 기획입니다. 세금을 영원히 탈루할 수 있는 합법적인 구멍을 만들어주겠다고 미끼를 던지면, 탐욕에 눈이 먼 그는 의심 없이 서명할 것입니다."
백설희는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은 태윤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태윤은 이 타이밍에 쐐기를 박아야 함을 직감했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서류 봉투 하나를 더 꺼냈다.
"그리고 이것도 함께 올리겠습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장부의 복사본 일부였다. 사채 시장의 큰손들과 한백의 상층부, 그리고 강성그룹의 비자금이 얽히고설킨 비밀 클럽 '화청'의 간이 장부 조각. 윤재필이 은밀히 은닉해 두었던 바로 그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백설희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걸…… 네가 어떻게 가졌지?"
"윤재필 전 검사를 제 수하로 길들였습니다. 그가 사채 시장을 돌며 수집한 한백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이제 이 장부의 통제권은 저를 거쳐 대표님께 귀속될 것입니다. 최진엽 검사 역시 이미 제 통제 하에 두었으니, 검찰발 리스크는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백설희는 장부 조각을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마침내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강태윤. 너는 사냥개치고는 너무 똑똑해. 그게 가끔은 주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지."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을 아는 개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목표는 오직 하나, 한백의 그늘 아래에서 제 몫의 이권을 챙기는 것뿐입니다."
태윤은 다시 한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비굴할 정도로 완벽한 을의 굴종. 백설희는 그 모습에 마침내 경계를 풀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강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률 자문단장 자리는 네가 맡아라. 강한찬의 대가리를 부수든, 목줄을 채우든 네 방식대로 해 봐. 단, 한백의 몫은 단 1퍼센트도 누수되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대표실을 나서는 태윤의 등 뒤로 백설희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태윤은 문이 닫히는 순간,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번째 덫이 완성되었다.'
***
사흘 뒤. 강성그룹 본사 사장실.
방 안은 폭풍이 쓸고 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수입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고급 가죽 소파는 거칠게 찢겨 있었다.
강한찬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숨을 몰아쉬며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이게 말이 돼? 청와대 행정관 출신 율사들이 다 붙었는데도 기소유예가 안 나온다고?!"
그의 앞에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는 비서실 직원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검찰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최진엽 검사가 이끄는 수사팀이 기술 유출 관련 해외 페이퍼 컴퍼니 계좌를 이미 특정했다는 소문이……."
"개소리 하지 마! 돈을 얼마나 처먹였는데 이제 와서 딴소리야!"
강한찬이 책상 위의 모니터를 쓸어버리려던 순간, 사장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화풀이, 잠시 멈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무님."
단정한 수트 차림의 강태윤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뺨에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걸음걸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강한찬은 태윤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빨을 갈았다.
"강태윤…… 네놈이 여길 기어들어 와? 사냥개 새끼가 주인한테 이빨을 드러내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태윤은 화를 내는 대신, 천천히 다가가 깨진 도자기 파편을 구두 끝으로 치웠다. 그리고 가방에서 서류 한 부를 꺼내 강한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상무님을 구하러 온 구원자에게 하실 말씀치고는 매정하시군요."
"뭐? 구원자?"
"이 서류를 보십시오."
강한찬이 코웃음을 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txt [강성그룹 핵심 기술 유출 및 외환거래법 위반 사건 관련 변론 전략서]
1. 피의자(강한찬)의 고의성 전면 부인 전략 - 해외 기술 합작 법인 설립 과정에서의 '단순 경영상 과실'로 프레임 전환. - 피해 기업(민세아 측)과의 원만한 형사 합의 및 고소 취하 확보.
2. 조세 회피 및 지분 승계 합법화 구조안 - 강한찬 보유 강성 지분(12.4%)을 신설 '강성 미래인재 공익재단'으로 전량 무상 출연. -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16조 법적 예외 조항 활용: "공익법인 등에 출연한 재산의 가액은 상속세 과세가액에 산입하지 아니한다." - 재단 이사회 구성을 강한찬의 우호 지분으로 100% 장악하여, 세금 없이 실질 지배권 영구 유지. ```
강한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서류의 내용과 태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세금을 한 푼도 안 내고 내 지분을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단순히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공익재단이라는 철옹성 뒤로 숨기는 겁니다. 검찰도, 국세청도 공익재단의 자산에는 쉽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리고 상무님을 압박하던 민세아 대표 건은…… 이미 해결했습니다."
태윤이 손짓하자, 사장실 문이 다시 열리며 민세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움츠러든 어깨. 완벽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상무님……."
민세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특허권과 기술 자료 전부를 강성에 양도하고, 향후 어떠한 민형사상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희 가족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고장 난 군용 암호화 USB가 들어 있었다. 태윤의 지시에 따른 철저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강한찬의 목을 벨 날만을 기다리는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강한찬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하하하! 거 봐! 결국 돈 몇 푼 쥐여주면 기어 다니는 벌레 수준인 것을!"
강한찬은 민세아가 내민 합의서에 거칠게 서명하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꺼져.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
민세아가 눈물을 훔치며 방을 빠져나가자, 강한찬은 태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강 변호사. 역시 한백의 사냥개 중에서도 네가 최고야. 지난번 정원에서의 일은 내가 좀 흥분해서 그랬던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말라고."
"상무님의 깊은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을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태윤은 비굴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내가 백설희 대표한테 직접 전화해서 한백의 차기 파트너 자리는 무조건 너로 지정하라고 압박을 넣어주지. 강태윤, 넌 이제 내 전담 사냥개다."
강한찬은 기분이 좋아진 듯 호쾌하게 웃으며 지분 이전 계약서와 공익재단 설립 서류에 펜을 가져갔다.
사각, 사각.
그의 손 끝에서 강성그룹의 상속 지분 전체가 태윤이 설계한 공익재단으로 넘어가는 서명이 완료되었다. 세금을 영원히 탈루하게 해 주겠다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 스스로 자신의 목에 밧줄을 매단 순간이었다.
이 재단의 이사회는 겉으로는 강한찬의 우호 인사들로 채워지겠지만, 실질적으로는 태윤이 미래 정보를 통해 확보한 약점을 쥔 꼭두각시들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강한찬은 이제 빈껍데기 상무에 불과했다.
태윤의 입가에 차가운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위이잉-.
태윤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동시에 그의 뇌리를 스치는 극심한 편두통. 눈앞의 빛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어두운 홀로그램 같은 텍스트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미래 법률 대장의 실시간 강제 업데이트였다.
```txt [경고: 미래 경로의 급격한 변동 감지] - 대상자: 강한찬 (강성그룹 상무) - 변동 사항: 강한찬의 지분 이전 계약 체결로 인해 기존 '강성그룹 승계 시나리오' 전면 파기. - 새로운 위협 발생: 강한찬의 이복형제(강준찬, 강혜원) 연합체 결성. - 행동 분석: 강태윤의 법률 자문단장 임명에 의문을 품고 사설 탐정을 고용하여 강태윤의 회귀 전 행적 및 윤재필과의 불법 거래 정황 내사 착수. ```
태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지분 이전을 완료한 강한찬이 잔을 들어 올리며 태윤을 향해 외쳤다.
"자, 강 변호사! 우리의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며 건배하지!"
그러나 태윤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귓가에는 새로운 사냥감들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등 뒤를 노리는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