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바람이 창틀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는 와중에도, 마른 가문비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은 겨울새들은 조그만 부리를 맞대며 가녀린 울음소리를 나누고 있었다.
비록 그 가녀린 온기조차 엘도라도 영지를 뒤덮은 가혹한 동토의 이빨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아…….”
에일린은 시려오는 손끝을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대며 가느다란 숨을 불어넣었다. 허옇게 피어오른 입김이 이내 얼어붙은 가게의 천장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붉게 부어올라 감각이 무뎌진 지 오래였다.
전생에서 촉망받던 파티시에였던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피폐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 파산 직전의 가문에서 내쫓긴 서녀라는 비참한 신분이었다.
가문은 그녀를 이 쓸쓸하고 황량한 최북단의 변방으로 내던졌고, 남겨진 것은 다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과 차디차게 식어 버린 벽돌 오븐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내쫓지 못할 나만의 안식처.’
에일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과거 버림받았던 기억은 차가운 가시가 되어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타인의 무조건적인 호의 따위는 믿지 않는다. 오직 철저한 손익계산과 계약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황폐한 영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허름한 제과점이라도 완벽한 자기 소유로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낡은 오븐의 안쪽 구석을 마른걸레로 쓸어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 단단하고 이질적인 감촉이 닿았다. 먼지와 검은 그을음 사이에서 삐져나온 것은, 얼어붙은 신비한 별 모양의 씨앗이었다.
‘이게 뭐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얼음처럼 투명한 결정이 씨앗의 표면을 감싸고 있었다. 혹한 속에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는 기묘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씨앗을 집어 들어 낡은 앞치마 주머니 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주머니를 타고 미약한 냉기가 전해졌지만, 왠지 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보관해 두는 편이 계산상 이득이었다.
그때였다.
쿵-!
가게의 낡은 나무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차가운 눈바람이 실내로 들이닥쳤다. 문틀이 비명을 지르며 덜컹거렸고, 들이쳐 온 바람에 바닥의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이,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줄 알았더니 진짜 여기 있었군.”
가죽 코트 안으로 두꺼운 모피를 껴입은 사내 셋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가죽 부츠가 밟고 지나간 자리마다 시커먼 진흙과 녹아내린 눈이 지저분하게 번졌다.
가장 앞장선 사내의 손에는 가닥가닥 얼어붙은 가죽 표지의 사채 장부가 들려 있었다. 영지의 악명 높은 사채업자, 브론이었다.
에일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냘픈 어깨가 추위와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긴 제 개인 자산으로 임대한 점포입니다. 허락 없이 기물을 파손하고 들어오신 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자 불법 침입인데요.”
“법? 계약?”
브론이 코웃음을 치며 장부로 자신의 손바닥을 툭툭 쳤다. 그의 입에서 지독한 담배 냄새와 알코올 향이 섞인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 얼어 죽을 영지에서 대공가 서녀라는 년이 제법 똑 부러지는 척을 하는군. 네 애비가 우리한테 빌려 간 돈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가문이 파산했으니, 그 핏줄인 네년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할 거 아니냐!”
“저는 이미 가문에서 제명당해 호적에서 파인 몸입니다. 그들이 진 빚은 저와 법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게 청구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아요.”
에일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냉정했다. 철저한 계산하에 자신과 가문의 선을 그었다.
하지만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엘도라도에서 사채업자들에게 그런 상식적인 계산법이 통할 리 없었다.
브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기집애가 곱게 말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당장 이 쓰레기 같은 점포에서 꺼져! 여기 있는 가구며 오븐이며 전부 뜯어서 팔아치울 테니까!”
사내 하나가 몽둥이를 휘둘러 진열대를 내리쳤다.
콰창-!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며 날카로운 파편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에일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렵게 구한 가구들이 부서지는 소리는 그녀의 심장을 찢는 것 같았다.
“그만두세요!”
“어디서 소리를 질러!”
브론이 거친 손길로 에일린의 덜덜 떨리는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크게 치켜들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향해 세차게 내리누르려는 찰나였다.
시간이 멈춘 듯, 사방의 공기가 기묘하게 얼어붙었다.
윙-!
돌연 에일린의 시야 전체가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공중에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의 황금빛 책 한 권이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나타났다. 눈을 의심케 하는 찬란한 광경에 브론의 손이 허공에 굳어 버렸다.
[‘영혼의 제과 장부’가 개점 승인을 완료했습니다.] [점포명: 안식의 단향] [점주: 에일린 엘도라도 (소유권 100% 확정)]
머릿속에 맑은 종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에일린의 눈앞에 있는 사채업자들의 머리 위로 기괴한 수치들이 둥둥 떠올랐다.
[손님: 브론] [영혼의 결핍도: 85% (탐욕 및 극심한 동한증)] [추천 마법 레시피: ‘따스함 한 움큼 진저 스콘’] [제조 대가: 점주의 생명 마력 소모 소량 (한기 유발)]
‘마법 레시피…… 제과 장부?’
에일린의 심장이 거차게 요동쳤다. 전생의 지식과 이 세계의 마법이 융합된 경이로운 힘이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장부는 그녀에게 생존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당장의 파산을 면하고 저들을 쫓아내려면, 이 레시피를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자신의 생명 마력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몸속의 온기를 빼앗기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지금은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손익계산을 따져봐도 지금은 이 도박에 영혼을 걸어야 했다.
황금빛 장부의 마력에 묶인 사채업자들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에일린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오븐 옆, 그녀가 전 재산을 털어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구해 놓았던 밀가루 포대와 밭에서 직접 캐온 생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흐트러짐 없이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차가운 무염 버터를 밀가루에 넣고 스크래퍼로 잘게 다졌다. 사각사각, 버터가 밀가루와 섞이며 모래알처럼 고슬고슬한 질감으로 변해갔다.
여기에 잘 갈아낸 알싸하고 매콤한 생강 즙과 달콤하고 끈적한 벌꿀을 듬뿍 부었다.
반죽이 뭉쳐지기 시작하자, 에일린은 그것을 둥글게 뭉쳐 오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그녀를 덮쳤다.
“으윽…….”
이가 덜덜 부딪히고 뼈마디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시려왔다. 생명 마력이 소모되는 대가였다.
그녀는 오븐의 벽을 짚으며 겨우 버텼다. 가슴속에 맺혀 있던 고독한 한기가 이 베이킹의 과정 속에서 따스한 불길로 무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븐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오븐의 틈새로 기적 같은 향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코끝을 톡 쏘는 알싸하고 매콤한 생강 향이 차가운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뒤이어 녹아내린 벌꿀의 끈적하고 달콤한 풍미가 묵직하게 퍼졌고, 마지막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황금빛 스콘의 구수하고 포슬포슬한 냄새가 온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차가웠던 가게의 공기가 순식간에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가라앉았다.
“이, 이 냄새는 대체……?”
브론이 멍한 얼굴로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붉은 핏발이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가 머리를 흔들며 다시 악을 썼다.
“이 기집애가 잔머리를 굴려?! 마법으로 우릴 홀리려 드는구나! 당장 다 때려 부숴!”
브론이 가죽 장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쇠못이 박힌 몽둥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에일린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살벌한 파편 소리에 에일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쿵-!!!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맑고 청아한 유리 종소리가 온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어, 어억?!”
비명과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에일린이 슬며시 눈을 뜨자, 그녀의 눈앞에 둥근 황금빛 반투명 방어막이 쳐져 있었다.
브론이 휘두른 몽둥이는 그 투명한 정화의 방어막에 부딪쳐 무참히 튕겨 나갔고, 그 반동으로 브론은 바닥을 구르며 사정없이 나자빠졌다.
“끄으윽! 내 손, 내 손목이……!”
브론이 손목을 움켜잡고 비명을 질렀다.
황금빛 방어막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영지의 정화 마력이 깃든 방어막은 사채업자가 품고 있던 탐욕과 폭력성을 그대로 반사해 튕겨 보낸 것이었다.
가게 바닥에 서려 있던 시커먼 서리들이 방어막의 온기에 닿아 스르륵 녹아내리며 맑은 물방울로 변해갔다.
[영토 정화율: 0.1% 상승] [가게 내부의 안전 결계가 강화되었습니다.]
시각화된 장부의 메시지가 에일린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슴속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언제나 당하기만 하던 서녀의 삶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공간을 지켜낸 순간이었다.
에일린은 차갑게 식어 가던 손 끝에 다시금 따뜻한 온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진 브론을 내려다보았다.
“제 가게에서 당장 나가주셔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곳은 당신들이 함부로 침범할 수 있는 무법지대가 아니니까요.”
에일린의 목소리에는 단호하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선 브론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에일린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독기는 방어막의 정화 마력조차 다 녹여내지 못할 만큼 깊고 어두웠다.
“이…… 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나를 모욕해?”
브론이 잇새로 피를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이 품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마법 좀 쓴다고 까불지 마라. 대공가에서도 버린 년 주제에……!”
그가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시퍼런 냉기가 불길하게 일렁이는 결정체였다.
사용이 엄격히 금지된 마법 무기, ‘빙마석 폭탄’이었다.
“다 같이 얼어 죽는 거다!!!”
딸깍-!
브론의 손끝에서 신관이 작동하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요한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폭탄의 표면을 따라 푸른 마력의 균열이 쩍쩍 갈라지며,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를 빙점 이하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