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쿵, 쿵!
대지를 짓밟는 무거운 철갑의 진동이 성벽을 타고 올라와 발끝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하늘을 가린 납빛 먹구름 사이로 매서운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슈바르츠발트의 최전방. 황태자 줄리안 드 엘마르가 이끄는 만 명의 황실 중앙 군대는 이미 흑장미 성을 빈틈없이 에워싼 채였다. 거대한 마법 공성 병기인 ‘신성 격화 광풍’ 장치들이 붉은빛 아가리를 벌리며 기괴한 마력 파동을 뿜어내자, 영원의 숲 침엽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꺾여 나갔다.
“유제스 카르텐! 그리고 내 어리석은 장난감이었던 엘디아 베르제!”
확성 마법을 타고 성벽을 후려치는 줄리안의 목소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반역죄를 지은 괴물들을 처단하기 위해 황실의 이름으로 엄벌을 내리노라! 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이 성의 모든 생명체를 단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성문 안쪽, 창백하게 질린 북부 기사들이 검자루를 쥔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수만 대군 앞에서의 압도적인 전력 차. 그러나 내 왼쪽 쇄골 아래 새겨진 흑장미 낙인은 그들의 두려움보다 더 뜨겁게, 살을 지지는 인두처럼 붉은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극통이 쇄골을 타고 목덜미로 뻗어 나가는 순간, 내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 상태창이 사납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퀘스트: ‘괴물의 구원자’가 활성화됩니다.] [적군 배치 투시 필터가 작동합니다. 실시간 적군 정보 공유 가능!] [※경고: 시스템 열람 대가로 공작 유제스의 마력 고통 동조율이 상승합니다. 현재 동조율: 49%]
“끄윽…….”
머릿속이 번개라도 맞은 듯 찌릿하게 울렸다.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붉은 여우털이 조밀하게 장식된 두꺼운 벨벳 망토를 여몄다. 망토 밑으로 드러난 에메랄드빛 실크 드레스의 자락이 매서운 북풍에 나비의 날개처럼 어지럽게 펄럭였다.
“엘디아.”
언제 다가왔는지, 얼음처럼 차가운 유제스의 손길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자멸적인 광기와 나를 향한 지독한 집착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 있어. 내 지옥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불태울 수 있으니까.”
“혼자서 타 죽으시겠다고요? 절대 안 되죠.”
나는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쳐내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오히려 생기 넘치게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제가 공작님께 뜯어내야 할 위자료와 영지 상속 지분이 얼만지 잊으셨어요? 당신이 여기서 재가 되면 제 완벽한 은퇴 계획은 공중분해 된다고요.”
“이 상황에서도 돈 타령이라니.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군.”
유제스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어둠의 수호 정령들이 뽀짝거리는 검은 안개 덩어리가 되어 나타나 내 어깨와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수호 정령들이 당신을 가문의 반려로 완벽히 승인했습니다!] [동조 부작용(통증)이 일시적으로 15% 완화됩니다.]
순간적으로 가슴을 옥죄던 통증이 스르륵 가라앉았다. 나는 지체 없이 성벽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을 대충 거머쥔 나는 품 안에서 마력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르나르 경! 들리나요?”
- 예, 부인! 성문 뒤에서 대기 중입니다!
마력 통신석 너머로 들리는 르나르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상태창이 보여주는 3D 입체 지도와 붉은색 점들로 빼곡한 적군 배치도를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지금 황실 중앙 군대 우익, 제3열 텐트 뒤쪽에 마력 공성 병기의 동력로가 노출되어 있어요. 정예 기사 열 명만 데리고 그곳을 타격하세요. 다른 곳은 볼 필요도 없어요.”
- 하지만 부인, 그곳은 적의 정예 철갑기사단이 매복해 있을 확률이 높은 사각지대……!
“아니요, 그 잘난 철갑기사단은 지금 좌익의 가시숲 구릉지에 전력 배치되어 있어요. 우익은 텅 빈 껍데기뿐이에요. 제 말을 믿고 당장 돌파하세요!”
내 단호한 지시에 르나르는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와 함께 짧게 대답했다.
-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동시에, 성벽 뒤편의 좁은 비밀 통로를 통해 북부의 정예 기사들이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쿠구구궁!
얼마 지나지 않아 우익 진영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가 자랑하던 ‘신성 격화 광풍’ 장치의 오른쪽 동력선이 처참하게 박살 나며 폭발한 것이다.
“뭐, 무슨 일이냐! 우익의 복병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저 멀리 황금 가마 위에서 줄리안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쾌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흑장미 성벽의 가파른 절벽을 타고 황실의 특수 공작조가 은밀하게 기어오르는 모습이 내 상태창의 적색 경고등과 함께 포착되었다. 그들의 손에는 성문을 안에서 열기 위한 마법 폭탄이 들려 있었다.
“어딜 감히 쥐새끼들이.”
나는 콧방귀를 뀌며 품 안을 뒤적였다. 손에 잡힌 것은 다름 아닌, 가식적인 계모 베아트리스 백작부인이 이송 마차에서 눈물을 흘리며 쥐여주었던 ‘비취 흑장미 빗’이었다.
원작 소설 속에서 엘디아를 즉사시키거나 불구로 만들기 위해 백작부인이 숨겨둔 치명적인 신경 가스 침이 내장된 살상 도구.
“어머님,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아주 유용하게 써 드릴게요.”
나는 빗의 끝부분에 달린 비취 장식을 강하게 움켜쥐고 비틀었다.
촤아아아악!
빗살 사이에서 투명하고 미세한 신경 독침들이 폭포수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황실 공작조들의 얼굴 위로 치명적인 독무가 정확히 쏟아졌다.
“아아악! 내 눈! 눈이 타들어 간다!”
“끄아아악! 숨이…… 숨이 안 쉬어져!”
독침에 맞은 자들이 눈을 움켜쥐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수십 미터 아래의 절벽으로 추풍낙엽처럼 추락했다. 백작부인이 나를 죽이려 준비했던 치명적인 덫이, 도리어 황실의 정예 특공대를 몰살하는 완벽한 살상 도구로 리버스 사용된 순간이었다.
“르나르 경, 방금 떨어진 놈들이 가지고 있던 마법 폭탄을 수거해서 좌익의 가시숲 초입에 던지세요!”
내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북부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들이 가져온 폭탄이 오히려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가시숲에 매복해 있던 황실 철갑기사단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우리의 배치를 귀신같이 알고 피하는 거지? 내부의 첩자가 있는 건가!”
줄리안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수천의 대군이 고작 백여 명의 북부 정예 기사들과 지형지물을 활용한 기습에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황태자 줄리안의 군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됩니다!] [아군 진영의 전투 효율이 200% 상승합니다!]
“이제 내 차례군.”
유제스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빼 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마력이 눈보라를 검게 물들였다.
“유제스, 무리하지 마세요!”
내가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성벽 아래로 몸을 날린 후였다.
슈우우우웅― 쾅!
그가 대지에 착지하는 순간, 검은 불꽃 장미의 파문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크아아악!”
대지가 갈라지며 수천, 수만 개의 검은 가시넝쿨이 솟구쳐 올라 황실 기사들의 다리와 목을 단단히 휘감았다. 가시덤불 지반의 기습적인 폭주에 황실 군대는 진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리멸렬 무너져 내렸다.
“괴, 괴물 놈! 쏴라! 마력 포를 발사해라!”
줄리안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마법 화살과 파편들이 유제스를 향해 빗발쳤다.
스윽.
날카로운 마력 화살 한 발이 유제스의 뺨과 어깨를 스치며 긴 검자국을 남겼다. 피가 배어 나오는 순간―.
“아아아악!”
내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조율 49%. 유제스가 입은 상처의 고통이 내 허벅지와 등줄기로 고스란히 복사되어 전달되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살점을 포를 뜨듯 저릿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고, 다리가 풀려 단상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위고: 동조 통증이 한계치에 다다릅니다. ‘흑장미 만개율’이 상승합니다!] [쇄골의 흑장미 인장이 목덜미를 타고 턱밑까지 뻗어 나갑니다!]
목 주변을 휘감는 검은 가시넝쿨의 문양이 피부 위로 기괴하게 도드라졌다. 숨이 턱 막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부인!”
깜짝 놀란 르나르가 나를 부축하려 달려왔지만, 나는 손을 내저어 그를 제지했다.
“오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제자리 지키세요.”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파서 눈물이 고였지만, 나는 우는 소리를 내는 대신 차갑게 웃어 보였다. 이전 삶의 배신 속에서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 고통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사냥감이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 고통에 쓰러질 줄 알고?’
머릿속으로 상태창의 구석에 숨겨진 희망 조항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미회수 조항: ‘흑장미 만개’가 특정 한계 호감도를 돌파하면 쌍방 생명 보존 인장으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살 거야. 반드시 살아남아서, 저 황태자 놈의 목을 치고 유제스에게서 평생 먹고 놀 수 있는 막대한 위자료를 받아낼 거라고!’
나는 단 1밀리미터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은 채, 다시 마력 통신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성 아래에서 홀로 수천의 군대를 학살하고 있는 유제스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유제스! 왼쪽 45도 방향, 적의 마법 사제들이 결계를 치고 있어요! 그곳을 깨부수면 끝이에요!”
유제스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피에 젖은 얼굴을 돌려 성벽 위의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내 목덜미까지 뻗어 나간 검은 인장을 발견하고 잘게 떨렸다.
그는 내가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고통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고 서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은 듯했다. 그의 눈빛이 애틋함과 미칠 듯한 집착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대에게 승리를 바치지, 나의 비.”
쿠구구구구!
유제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암흑의 참격이 황실 사제들의 결계를 단숨에 반으로 갈라버렸다. 결계가 깨지자마자 불꽃 장미의 파편들이 황태자의 본진을 덮쳤고, 황금 가마가 처참하게 박살 나며 줄리안은 진흙바닥으로 볼품없이 굴러떨어졌다.
“끄으윽……! 이, 이 괴물 놈들이……!”
줄리안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채 이를 갈았다. 만 명의 대군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무력화되었고, 남은 군사들은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완벽한 승리였다. 단 백여 명의 기사와 지형지물, 그리고 나의 상태창 정보력으로 거둔 기적 같은 대승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유제스가 피 묻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제스.”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던 그때, 줄리안이 광기에 가득 찬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품 안에서 기괴한 붉은색 호각을 꺼내 들었다.
“너희가…… 너희가 감히 나를 이리 모욕해? 카르텐의 더러운 괴물 놈들아!”
줄리안의 손에 들린 호각을 본 순간, 내 상태창이 붉은색 경고등을 미친 듯이 뿜어내며 기형적인 경고음을 울려댔다.
[※위험! 초특급 위험 요소 감지!] [황태자가 전대 황제의 ‘황혈의 지하실 족쇄’ 공명 트리거를 작동하려 합니다!] [유제스 카르텐의 심장에 각인된 저주의 원천과 비선형 공명 반응이 시작됩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 같았다.
황실에서 유제스에게 매일 먹여왔던 만성 독약 ‘레테의 눈물’의 진짜 쓰임새가 바로 이것이었나? 유제스가 먹던 진통 촉진제는 실상 그의 심장 속에 깃든 저주의 고리를 흐물흐물하게 녹여, 황실의 공명 호각 소리에 완벽히 종속되도록 설계된 예비 작업이었던 것이다!
“유제스, 안 돼요! 막아야 해요!”
내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지만, 줄리안의 입술이 이미 호각에 닿아 있었다.
삑――――――――!
귀를 찢는 듯한 기괴하고 날카로운 고주파의 소리가 슈바르츠발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유제스의 심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가문의 어둠을 억지로 뜯어내는 피의 주술이었다.
“……아윽! 끄아아아아악!”
유제스가 갑자기 검을 놓치며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온몸에 새겨진 검은 저주의 문양들이 기형적으로 요동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강대한 어둠의 마력이, 줄리안이 들고 있는 호각의 공명 주파수를 따라 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무서운 속도로 유실되기 시작했다.
유제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급격히 탁해졌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며, 그가 가진 모든 마력과 생명력이 순식간에 메말라가는 공포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이 괴물의 힘을 온전히 회수하는구나!”
줄리안이 광소하며 호각을 꽉 움켜쥐었다. 유제스의 몸이 힘없이 무너지며 진흙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나의 쇄골 아래 흑장미 인장 역시 유례없는 극통과 함께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