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서슬 퍼런 작두날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감각에 척추뼈가 바스라지는 착각이 일었다.

까드득, 뼈와 쇠붙이가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환청이 귓가를 난타했다. 엘디아는 단두대 위에서 자신의 잘린 머리가 댕그렁 굴러떨어지던 찰나의 잔상을 털어내며 번쩍 눈을 떴다.

허공을 허우적대던 손끝에 잡힌 것은 싸늘하고 거친 벨벳 시트였다.

“하아, 하아……!”

가슴을 옥죄는 코르셋의 뻣뻣한 고래뼈가 갈비뼈를 짓눌러 숨이 턱 막혔다. 엘디아는 제 목을 조르는 겹겹의 오간자 레이스를 신경질적으로 움켜쥐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 같은 레이스의 거친 감각과 함께,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이 허리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방은 어두컴컴했고, 차창 너머로는 윙윙거리는 칼바람 소리만 요란했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살아서 돌아왔다. 제국을 피로 물들인 악녀, 엘디아 베르제의 육신으로.

머릿속에 엉겨 붙어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곳은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온갖 악행을 일삼다 결국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목이 잘려 죽는 피폐 소설 <심연의 구원자> 속 세계였다. 그리고 자신은 방금 막, 원작 소설의 시작점이자 파멸의 급행열차에 탑승한 상태였다.

베르제 백작가에서 평생을 개처럼 구박받던 서녀, 엘디아.

그녀는 지금 북부의 지배자이자 미치광이 괴물이라 불리는 유제스 카르텐 공작에게 정략결혼이라는 명목하에 ‘산 제물’로 송환되는 중이었다.

“윽…….”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엘디아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차가운 은박 자수가 놓인 크림색 실크 드레스는 혹한의 북부 날씨를 막아주기엔 턱없이 얄팍했다. 이 얇디얇은 천 가지만 걸치게 해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다 너를 위해서란다, 엘디아. 카르텐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문을 구원하거라.’

자애로운 미소를 가장하며 제 뺨을 쓰다듬던 계모, 베아트리스 백작부인의 손길은 뱀의 혀보다 축축하고 불쾌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속삭이던 황태자 줄리안.

‘엘디아, 네가 공작의 침소에 드는 그날이 바로 우리 가문과 황실이 평화를 되찾는 날이다. 나를 믿어라.’

믿으라고?

그 가스라이팅에 속아 유제스 공작의 침실에 독을 풀고, 결국 반역죄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것이 원작 속 엘디아의 최후였다. 황태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껍데기처럼 버려지는 소모품. 그것이 베르제 백작가와 황실이 설계해 둔 완벽한 덫이었다.

엘디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눈물이 고이려던 눈동자엔 이내 시리도록 차가운 독기가 들어찼다.

“나를 밟고 올라서서 단물만 빨아먹겠다 이거지.”

두 번은 안 당해. 그 잘나신 대가리를 단두대 아래로 굴려주는 한이 있어도, 이 개 같은 목숨줄을 어떻게든 붙잡고 살아남을 테니까.

완벽한 신분적 자유. 그리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막대한 부. 그것만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밧줄이었다.

덜컥!

마차가 크게 요동치며 멈춰 섰다. 밖에서 낄낄거리는 사내들의 야비한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백작가에서 붙여준 호송 경비들이었다. 그들은 엘디아를 공작에게 바쳐질 제물, 혹은 곧 죽을 시체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어이, 베르제 영애! 아직 숨은 붙어 있으신가?”

거칠게 문이 열리며 밤공기의 매서운 한기가 마차 안으로 왈칵 들이쳤다. 붉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코와 술 냄새를 풍기는 경비대장 잭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시선이 엘디아의 얄팍한 드레스 자락과 드러난 쇄골 언저리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북부의 괴물 공작 놈이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말이야. 가자마자 목이 뜯겨 죽으면 우리 노고가 아깝지 않겠어?”

옆에 서 있던 다른 경비가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백작부인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혼수 상자도 있는데,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억울하잖아?”

조롱 섞인 가시 돋친 말들이 엘디아의 귓가를 스쳤다. 평소의 엘디아라면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 애원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엘디아는 턱을 우아하게 치켜올린 채, 서늘한 눈빛으로 잭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이 무릎 위에 놓인 조그만 가죽 가방을 스쳤다. 그 안에는 베아트리스 백작부인이 억지로 쥐여준 혼수 상자가 들어 있었다.

“입 조심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차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어?”

잭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늘 주눅 들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만 내던 서녀의 입에서 나온 어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오만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였다.

엘디아는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정리하며, 가방 안에서 묵직한 혼수 상자를 꺼냈다. 손끝에 닿는 상자의 표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단단했다. 상자를 열자,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기괴하게 반짝이는 비취 흑장미 빗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비취로 정교하게 조각된 흑장미 빗.

겉보기엔 화려한 장신구였지만, 엘디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빗의 살대 안쪽에 미세하게 도포된, 들이마시는 순간 신경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가스 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계모 베아트리스가 자신을 부추겨 공작을 찌르게 하거나, 혹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자신을 입막음하기 위해 쥐여준 살상 도구였다.

엘디아는 비취 빗의 날카로운 끝부분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이 베일 듯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주인을 무는 사냥개는 사냥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죽이 벗겨지는 법이지.”

“이, 이년이 미쳤나……!”

잭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엘디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빗을 부드럽게 고쳐 쥐며 그를 압박했다.

“내가 비록 버려지는 서녀라 할지라도, 아직은 베르제 백작가의 이름을 달고 있어. 그리고 내 행선지는 제국 최북단을 지배하는 카르텐 공작저다. 가문과 공작가의 국혼을 망친 죄값을, 네겟놈들이 목숨으로 치를 수 있을까?”

“……!”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공작이 너희 삼족을 멸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 빗으로 네 눈알을 파내 줄 테니.”

엘디아의 눈동자가 야수처럼 번뜩였다. 살기등등한 기세에 압도당한 잭은 저도 모르게 마차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겁에 질려 떨던 사냥감이 순식간에 포식자의 눈빛을 하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삡-!

머릿속이 쪼개지는 듯한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눈앞의 풍경이 일순간 정지하더니, 붉디붉은 불꽃 같은 문자 형상들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스템 동기화율 0% : '피학적 동조의 상태창'을 귀하의 신경망에 봉인합니다.]

‘……상태창?’

엘디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경고: 본 시스템은 대상(유제스 카르텐)의 심리 상태와 공략 루트를 열람할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을 제공합니다.] [단,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거하여, 시스템을 열람하거나 가동할 때마다 대상이 겪는 어둠의 저주와 육체적 극통이 동일한 강도로 귀하의 신경망에 즉시 동조됩니다.] [현재 동조 만개율: 0% (100% 도달 시 영혼 폭열 및 즉사)]

머릿속을 울리는 가차 없고 기계적인 목소리.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뇌리에 깊숙이 박힌 붉은 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이중의 족쇄였다. 남주의 마음을 읽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주가 느끼는 뼈가 바스러지고 살이 타들어 가는 지옥 같은 고통을 고스란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 골든핑거.

“하, 하하…….”

엘디아의 입새로 거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독기를 품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경비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사색이 되어 마차 문을 쾅 닫아버렸다.

“미친년, 진짜 미쳤어! 빨리 출발해!”

마차가 다시 요동치며 눈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엘디아는 흔들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 슈바르츠발트의 침엽수들이 기괴한 괴물의 손가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져 창문을 깨뜨릴 기세로 몰아쳤다.

저 멀리, 영원한 겨울의 어둠 속에 갇힌 거대한 요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검은 침엽과 날카로운 가시넝쿨로 빽빽하게 뒤덮인 곳. 카르텐 공작가의 본거지, ‘흑장미 성’이었다. 성벽을 타고 흐르는 어두운 마력의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곳이 내가 살아남아야 할 지옥이구나.’

엘디아는 손에 쥔 비취 빗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쿠구구궁-!

마차가 거대한 성문 앞에 멈춰 서자, 굳게 닫혀 있던 검은 철문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안개와 폭설이 뒤섞인 광장 너머,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형상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검은 가죽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온몸에 그림자 같은 가시덤불을 칼날처럼 두른 사내.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 사이로, 굶주린 맹수처럼 붉게 타오르는 핏빛 눈동자가 마차 안의 엘디아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장검이 눈밭 위로 싸늘한 철제 궤적을 그리며 질질 끌렸다. 살의. 오직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발기겠다는 광포한 살의가 대기를 얼려버렸다.

스릉-!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검끝이 엘디아의 목덜미를 겨누는 순간, 그녀의 왼쪽 쇄골 아래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뇌리에 떠오른 핏빛 상태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위험! 대상의 살의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유제스 카르텐의 현재 심리 상태: '자멸적 학살']

“끄응……!”

단지 상태창의 문자를 읽었을 뿐인데, 뇌수를 송곳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공작 유제스 카르텐이 품고 있는 자멸적인 살의와 어둠의 마력이, 상태창이라는 기괴한 회선을 타고 엘디아의 신경망에 고스란히 동조된 탓이었다.

허파가 찌그러지는 듯한 압박감에 호흡이 서그럭거렸다. 쇄골 아래 새겨진 연리의 흑장미 낙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얄팍한 크레페 드 실크 드레스 위로 붉은 핏방울을 배어 물었다.

하지만 엘디아는 입술을 꽉 깨물어 비명을 안으로 삼켰다. 아파서 질질 짜는 건 전생의 배신으로 충분했다. 지금 울어봤자 돌아오는 건 목이 날아가는 단두대 엔딩뿐이다.

콰르릉-!

마차의 문짝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눈밭 위로 뒹굴었다.

폭풍처럼 밀려든 칼바람이 엘디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유제스 카르텐은 그야말로 파멸의 화신 같았다.

어깨를 뒤덮은 거칠고 묵직한 검은 늑대 모피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아 얼어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칠흑의 무쇠 흉갑은 검붉게 산화되어 음산한 안광을 뿜어냈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 ‘레퀴엠’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해낼 것처럼 흉포한 마력을 품고 울부짖고 있었다.

“베르제에서 보낸 첩자년인가.”

유제스의 목소리는 슈바르츠발트의 만년설보다 더 차갑고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면 그저 내 손에 짓겨 죽으러 온 고깃덩이인가.”

대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엘디아의 가냘픈 목덜미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살갗을 자극하자, 쇄골 밑의 흑장미 낙인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동조율 상승: 5%!] [대상(유제스 카르텐)의 ‘영혼을 잠식하는 어둠의 심연’ 고통이 동기화됩니다!]

“으, 윽……!”

순간, 온몸의 뼈마디가 통째로 으스러져 파스스 가루가 되는 듯한 극통이 엘디아를 덮쳤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고, 심장이 뜨거운 용암에 담긴 것처럼 타들어 갔다. 이것이 유제스가 매일 밤 홀로 견뎌내고 있는 지옥의 일부란 말인가.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엘디아는 오히려 이빨을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목을 겨눈 칼날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칼날에 목덜미를 더 바짝 밀착시켰다.

“둘 다 아니에요, 공작님.”

“……뭐라?”

“저는 그저 당신이 스스로를 불태워 파멸하기 전에, 꽤 짭짤한 거래를 제안하러 온 투자자랍니다.”

유제스의 한쪽 눈썹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살기가 등등한 미치광이의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래를 운운하는 여자는 그의 생애 통틀어 처음이었다.

“거래? 목이 잘린 시체와는 거래하지 않는다.”

“그럼 제 목을 치기 전에, 당신 가심속에서 날뛰는 그 끔찍한 불길부터 끄는 게 어때요?”

“네년이 감히……!”

유제스의 안색이 단숨에 흉포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던 어둠의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며, 온몸에서 검은 가시덩굴 같은 그림자 마력이 아지랑이치며 뻗어 나왔다.

[경고! 대상의 저주 폭주 수치 급상승!] [동조율 12% 돌파! 귀하의 생명력이 급격히 소모됩니다!]

‘커흑……!’

입안 가득 비릿한 피 점액이 고였다. 폐부가 찢어지는 감각에 엘디아는 비틀거렸지만, 악착같이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며 마차 바닥을 딛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얇은 슬리퍼를 신은 발끝이 허리까지 쌓인 차가운 눈밭에 파묻혔다. 매서운 칼바람에 그녀가 입은 크림색 실크 드레스와 어깨의 얄팍한 오간자 레이스가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릇 흩날렸다.

유제스는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는 엘디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의 살기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하거나, 괴물이라며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터였다. 하지만 이 가냘픈 여자는 오히려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제 발로 죽음의 영역에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공작님.”

엘디아가 유제스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녀의 새하얀 뺨은 북부의 한기에 얼어붙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입술 끝에는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 투명하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고통,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 무겁지 않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신이 매일 밤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자멸을 꿈꾸는 거, 다 보여요.”

엘디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유제스의 차가운 무쇠 건틀릿을 덥석 쥐었다.

화아악-!

손끝이 닿는 순간, 상태창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타했다.

[동조 극통 가동! 카르텐 가문의 '그림자 저주'가 영혼을 잠식합니다!] [경고: 고통 지수 임계점 돌파!]

“아……!”

엘디아의 가슴속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뇌 속의 신경 세포가 하나하나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전신이 사정없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싶을 정도의 지옥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유제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심장을 옥죄며 머리를 깨부술 듯 날뛰던 어둠의 마력이, 이 기괴한 여자의 손길이 닿자마자 기적처럼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고통의 절반 이상이 그녀에게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가’ 분산되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유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디아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왼쪽 쇄골 아래에서 새카만 흑장미 가시덤불이 살가죽을 뚫고 나와 목덜미를 향해 스그럭스그럭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제 수명을 깎아 먹으며 그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있었다.

“거봐요.”

엘디아는 피가 섞인 침을 눈밭 위에 퉤 뱉어내며, 유제스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만큼 당신의 그 더러운 지옥을 잘 이해해 줄 파트너는 제국 전체를 뒤져도 없을걸요?”

“…….”

“그러니 날 죽이지 마요. 기왕 죽을 거라면, 서로의 이용 가치를 한계까지 빨아먹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잖아요?”

유제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어둠을 두려워해 피하거나, 혹은 그것을 이용해 가문을 파멸시키려던 가식적인 선의만을 보아왔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그 어떤 다정함도 가장하지 않았다. 철저히 서로의 이득과 파트너십을 요구하며, 기꺼이 그의 피비린내 나는 지옥 속으로 제 발을 자진해서 밀어 넣고 있었다.

자멸을 갈망하던 유제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괴하고도 뜨거운 집착의 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륵.

유제스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서려 있던 광포한 살기가, 이제는 이 오만하고 독기 어린 여자를 향한 기이한 탐색과 집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베르제의 서녀가 이토록 미친년일 줄은 몰랐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공작님.”

엘디아는 다리가 풀려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끝까지 턱을 치켜세우며 도도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흑장미 성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가슴뼈를 울리는 기괴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유제스의 심장 부근에서 푸른빛의 족쇄 형상이 일순간 명멸했다가 사라졌다.

[시스템 긴급 경보!] [유제스 카르텐의 심장에 각인된 저주의 원천이 외부의 미확인 파동과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공명율 급상승! 대상의 심리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해집니다!]

유제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다시 초점을 잃으며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가 머리를 감싸 쥐며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크윽, 당장 내 성에서 꺼져라! 내 안의 괴물이 네 목을 뜯기 전에!”

폭설 속에서 피어오른 검은 가시덤불이 성벽 전체를 휘감으며 사방을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살아가기 위해 도달한 이곳에서, 더 거대한 파멸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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