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하는 차 안, 가죽 시트 너머로 스며드는 한기는 에어컨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냉기에 서우는 손가락 끝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조차 아득할 만큼 손끝이 굳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서울의 야경이 일그러진 불빛의 선으로 번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이명이 귀를 먹먹하게 채웠다.
옆자리에 앉은 태준은 미동도 없이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짙은 체취, 시더우드 향에 섞인 미지근한 살결의 냄새가 좁은 차 안을 채우고 있었지만, 서우의 몸은 그 온기를 온전히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시트 위로 떨어진 서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태준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창밖의 어둠을 담고 있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먼저 가늘게 떨리는 서우의 어깨에 머물렀다. 이어 하얗게 질려 가죽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마침내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문 서우의 얼굴을 집요하게 꿰뚫었다. 태준이 낮게 읊조렸다.
"오늘 밤은 내 방 전시장 침대를 쓰지. 쇼윈도치고는 체온이 너무 낮아."
서우는 대답 대신 턱을 굳게 맞물렸다. 이가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오만방자한 남자의 눈에 자신이 쓸모없는 고장 난 계산기로 비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러나 차가 테라피움의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서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에 들어설 때까지도 서우의 체온은 단 0.1도도 오르지 않았다.
마스터베드룸의 대리석 바닥은 은색 조명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우는 무릎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벽면에 세워진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차가운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였다. 이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전시장 같았다.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운 가구들과 온기 없는 공기가 서우의 피부를 찔렀다.
"하으……."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서우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영하에 수렴하는 극도의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를 흔들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붉은색 숫자들이 허공에 어지럽게 떠올랐다.
[경고: 치명적 저체온증 진입] [현재 체온: 34.2℃]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장부 스캔 대가 누적]
귀가 터질 것 같은 이명 속에서, 지난번 권도진을 스캔했을 때 각인되었던 500억 원의 붉은 장부 숫자가 미친 듯이 명멸했다. 뇌를 찌르는 통증에 서우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살이 에이는 듯한 추위는 뼛속 장기까지 단단하게 얼려버릴 기세였다.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차가운 서리가 입안에서 맴도는 착각이 들었다.
스르륵, 사각거리는 샤워가운 자락 소리가 들렸다.
욕실에서 막 나온 태준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수증기가 서우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태준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늘 얼음처럼 차갑고 차분하게 자신을 득실로만 계산하던 여자가, 제 침대 밑바닥에서 짐승처럼 신음하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기묘한 충격을 선사했다.
태준이 서우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발끝이 서우의 시야에 닿았다.
"한서우."
그가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는 묘한 흥분과 억누를 수 없는 독점욕이 섞여 있었다.
서우는 떨리는 눈자위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먼저 서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훑었고, 이내 가늘게 떨리는 턱끝으로 내려왔으며, 최종적으로는 온기를 갈구하듯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서우의 손끝에 멈췄다. 3단계로 이어지는 집요한 시선 끝에 느린 열감이 묻어났다.
"도와…… 줘요."
서우의 이빨이 맞부딪치며 간신히 비명이 아닌 말을 뱉어냈다.
"도와달라?"
태준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강인한 손가락목이 서우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닿는 순간, 서우는 전기에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 온도가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해봐.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거래 말고, 한서우라는 여자가 권태준이라는 남자를 원한다고."
"당신은…… 내 유일한 가치 자산이에요. 그러니까……."
"여전히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뿐이군."
태준이 혀를 차며 서우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가볍게 힘을 주자 서우의 가냘픈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준은 서우를 그대로 들어 올려 자신의 넓고 거대한 침대 위로 내던지듯 눕혔다. 사각거리는 실크 이불의 차가운 감촉도 잠시, 이내 태준의 거대한 신체가 서우의 위를 덮쳐왔다.
"앗……."
서우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태준은 서우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붙잡아 누르며 제 몸을 밀착시켰다. 얇은 샤워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흉근과 허벅지의 열기가 서우의 얼어붙은 살갗을 파고들었다. 얼어붙었던 장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듯한 쾌감이 척추를 관통했다. 귀를 찢을 듯하던 이명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허공에 떠돌던 붉은 장부의 숫자들도 안개를 만난 서리처럼 스러져 갔다.
서우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아올리며 더 깊은 온기를 갈구했다. 태준의 넓은 어깨에 이마를 묻자, 시더우드의 짙은 향과 그의 체온이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몸 안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감각에 서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아, 권태준……."
"더 붙어봐. 원한다면 전부 줄 테니까."
태준의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그의 손가락이 서우의 등줄기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얇은 실크 셔츠가 자극적으로 쓸리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숨 막히는 성적 텐션이 두 사람의 호흡을 타고 허공에 엉겼다.
"이래서야 계약서에 도장은 제대로 찍겠어? 쓸모를 증명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기세인데."
태준이 서우의 귀밑을 입술로 스치며 속삭였다. 서우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도장은 이미 찍었죠. 당신이… 내 가장 비싼 방열기라는 조항은 없었지만."
"방열기라. 성능이 마음에 안 들면 환불이라도 요구할 건가?"
"성능은 훌륭하네요. 단지… 이자의 세율이 너무 높아서 고민 중이에요."
서우가 지지 않고 응수하자, 태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자신을 철저히 이용 가능한 도구로 정의하려는 그녀의 오만함이, 오히려 그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태준의 손바닥이 가차 없이 서우의 허리를 움켜쥐고 제 골반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밀착된 신체 사이로 서로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우의 불신증 섞인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태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세율이 높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한서우."
그의 손가락이 서우의 턱끝을 강하게 쥐어 올렸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우의 얼굴이 위를 향했다.
은색 조명 아래, 서로의 숨결이 닿는 초근접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태준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갈증과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귓가를 울리는 그의 거친 심장 박동 소리가 서우의 심박수와 완벽하게 겹쳐 떨어졌다.
태준이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서우를 가두고 짓씹듯 물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고작 이거였어?"
"고작이라니요."
서우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태준의 목덜미에 뺨을 기댄 채,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닿아 있는 살결마다 찌릿한 전류가 흐르며 굳어 있던 말초신경이 하나둘 살아나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이 온도가 흔해 빠진 잉여 자원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당장 부도를 막아줄 유일한 유동성 자산이에요."
"끝까지 자산이니 자원이니 하는 소리만 하는군."
태준의 눈매가 사납게 좁혀졌다. 그의 시선이 서우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향했다가, 밭은 숨을 내뱉는 붉은 입술로 내려앉았고, 이내 가운 깃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쇄골뼈의 미세한 떨림에 와서 멈췄다. 붉은 조명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목선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방 안을 채운 무거운 시더우드 향이 두 사람의 엉킨 호흡을 타고 더욱 진하게 피어올랐다. 태준은 무의식적으로 서우의 허리를 감싸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얇은 실크 천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허리곡선은 한 손에 잡힐 듯 가늘었다.
"이 온도가 없으면, 당신의 그 사치스러운 장부도 결국 잿더미가 될 텐데. 기고만장한 태도는 여전해."
"부러진 검은 쓸모가 없으니까요."
서우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체온이 35.5도 선을 넘어서자, 머릿속을 짓누르던 이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시야를 가리던 붉은 경고등이 걷힌 자리에, 선명하고 푸른 숫자들이 다시 정렬되기 시작했다.
[대상: 권도진]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잔액: 500,000,000,000 KRW (500억 원)] [상태: 자금 세탁 및 우회 송금 정황 포착 완료]
서우의 동공 속에서 차가운 지성이 빛을 발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규칙적이고 강한 심장 박동이 서우의 메마른 내면에 기묘한 안도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안도감마저 철저히 통제구역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이 포식자에게 뼈째로 씹혀 먹힐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우는 손가락 끝으로 태준의 탄탄한 가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마치 주판알을 튕기며 이율을 계산하는 듯한 집요한 몸짓이었다.
"권도진이 보낸 세무조사단, 내가 역으로 밟아줄게요."
태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밟아준다? 세무조사관들이 네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도진이가 보낸 놈들은 국세청에서도 가장 칼날이 예리한 에이스들이야. 도원 실업의 비호 아래 움직이는 사냥개들이라고."
"사냥개는 뼈다귀를 던져주면 주인을 무는 법이죠."
서우는 태준의 목덜미를 살짝 끌어당겨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차가운 숨결이 태준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어깨근육이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긴장했다.
"권도진이 숨겨둔 도원 실업의 차명 비자금 계좌. 정확히 500억 원짜리 장부가 내 머릿속에 있어요. 자금 이동 경로, 차명 주주 명부, 외화 밀반출 내역까지 전부 다."
"……500억?"
태준의 목소리에 난생처음으로 짙은 의문과 경계심이 서렸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서우의 눈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도진이가 목숨처럼 감추고 있는 치부일 텐데."
"비즈니스 기밀이에요. 출처를 묻는 건 이 바닥 상도덕에 어긋나죠."
서우는 태준의 뜨거운 뺨에 제 차가운 뺨을 살포시 비비며 속삭였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교차하는 감각이 허공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내가 그 500억짜리 폭탄을 국세청 조사단 손에 쥐여줄게요. 그럼 그 사냥개들은 태산 파이낸셜이나 당신의 개인 자산이 아니라, 권도진의 심장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게 될 거예요. 어때요, 이 정도면 내 몸값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소유욕으로 번들거렸다. 자신을 철저히 '방열기'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도진의 목줄을 죄어오는 이 영악한 여자가 지독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제 가슴팍을 두드릴 때마다, 태준은 자신의 이성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어놓은 '비즈니스'라는 선을 단숨에 뭉개버리고, 온전히 제 아래에 굴복시키고 싶다는 충동이 정수리까지 치밀었다.
"충분하지."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마스터베드룸의 침묵을 깼다.
"하지만 한서우, 잊지 마. 이 판의 주도권은 여전히 나한테 있어. 네가 아무리 대단한 장부를 쥐고 흔들어도, 내 온기가 없으면 넌 24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을 테니까."
그의 뜨거운 입술이 서우의 귓볼을 강하게 깨물었다가 떨어졌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릉-.
정적을 깨고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서우의 개인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서우와 태준의 시선이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으로 향했다. 발신인은 민주희 비서였다. 이 시간에 민 비서가 연락을 취해올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서우가 태준의 품에서 상체를 약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민 비서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을 완전히 잃은 채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서우 씨, 큰일 났어요."
"주희 씨, 진정해요. 무슨 일이죠? 세무조사단은 48시간 뒤에 움직인다고 했을 텐데……."
"아니에요! 권도진 대표가 일정을 앞당겼어요. 지금…… 지금 국세청 특별조사관들이 테라피움 로비에 들어섰어요. 영장을 들고, 지금 서우 씨가 있는 펜트하우스로 올라가고 있답니다!"
쿠르릉-.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펜트하우스 외부 전용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육중한 기계음이 문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48시간의 유예는 완전히 깨졌다. 사냥개들이 벌써 턱밑까지 당도한 것이다.
서우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태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은 거대한 폭풍을 마주한 맹수처럼 살기등등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