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이 영문을 모른 채 다가와 서우의 뒤통수를 감싸고 얼굴을 바짝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나랑 닿는 게 계약에 포함된 일이었던가, 부인?"
귓가를 간지럽히는 숨결은 뜨거웠고, 그가 내뿜는 짙은 우디 향은 서우의 호흡기를 단숨에 장악했다. 굳어 가던 손끝에서부터 기분 좋은 열기가 서서히 맥박을 타고 올라왔다. 얼어붙었던 혈관이 녹아내리며 찌릿한 통증과 함께 안도감이 찾아왔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우는 제 뺨을 스치는 태준의 단단한 손가락을 느끼며 이성을 다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태준의 집요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다, 이내 그의 굳게 다물린 입술로, 그리고 제 허리를 단단히 움켜쥔 그의 커다란 손으로 느리게 이동했다. 철저한 시선의 3단계 이동이었다.
"손익을 따져보죠."
서우가 속삭였다. 목소리는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방열기로서의 성능이 훌륭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독점 계약도 아닌 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폭리를 취하려는 건 곤란해요."
태준의 잘생긴 미간이 좁아졌다. 가슴팍을 밀어내는 서우의 손등 위로, 그의 손가락이 더 깊게 얽혀 들었다.
"폭리라니. 방금 전까지 시체처럼 얼어가던 몸뚱이를 살려 놓은 대가치고는 꽤 저렴하게 부른 것 같은데, 부인."
"비밀 하나당 온기 수급 한 번이라니요. 이건 명백한 비대칭 거래입니다. 내 정보 자산의 가치를 당신의 단순한 생체 열량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죠."
"단순한 생체 열량?"
태준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서우의 입술 산을 느리게, 그러나 위협적으로 쓸어내렸다. 닿은 피부가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웠다.
"그 단순한 열량이 없으면 당장 숨도 못 쉬고 주저앉을 분이 하시기에는 지나치게 거만한 소리로 들리는데."
"제 숨통의 가치는 제가 결정합니다."
서우는 입술에 가해지는 압박을 피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떴다.
"원하는 대가는 다른 방식으로 지불하죠. 도원 가문 내에서의 입지 강화, 혹은 권도진의 비자금 세탁 통로 차단 같은 실질적인 자산 가치로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놓으시죠. 비즈니스 파트너 간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태준은 서우의 얼어붙은 눈동자 너머에 도사린 고집을 읽어냈다. 타인을 향한 극도의 불신, 모든 것을 장부상의 수치로만 환산하려는 지독한 결함. 그 결함이 오히려 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그는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뗐다. 멀어지는 온기가 아쉬웠지만, 서우는 단 한 가닥의 아쉬움도 표정에 흘리지 않았다.
"안전거리라."
태준이 한 걸음 물러서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렸다.
"좋아. 그 잘난 안전거리의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조만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지."
***
다음 날 아침, 삼성동 펜트하우스 '테라피움'의 거실은 차가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도심은 온통 회색빛 안개에 잠겨 있었다. 대리석 식탁 위에 놓인 에스프레소 머신이 날카로운 작동음을 내며 검은 액체를 뿜어냈다.
서우는 실크 가운의 소매를 정돈하며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밤새 태준의 온기를 흡수한 덕분에 몸 상태는 정상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미약한 서늘함이 잔존해 있었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준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시원한 스킨 향과 특유의 체취가 거실의 차가운 공기를 단숨에 흐려놓았다.
서우는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으며, 미리 준비해 둔 태블릿 PC를 그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계약서 제5조 3항의 추가 조항입니다."
태준이 젖은 앞머리 사이로 서우를 흘겨보았다.
"아침부터 숨 막히게 구는군."
"확실히 해 두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신체 접촉의 범위와 지속 시간, 그리고 그에 따른 온기 수급의 대가 산정 기준을 명문화했습니다."
태준이 비스듬히 실소를 터뜨리며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손잡기 10분당 단순 정보 한 건 제공. 포옹 30분당 중간 급 정보 한 건. 지속적인 밀착 접촉은 비상 상황에 한해 상호 합의 하에 진행하되, 사후에 그에 상응하는 도원 가문 내부 기밀 제공... 참 정성스럽게도 써 갈겨 놨네."
"합리적인 가치 교환입니다."
서우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감각을 깨웠다.
"당신의 체온은 내게 생존 자원이고, 내 정보는 당신에게 권력 자원이죠. 자원 대 자원의 교환만큼 깔끔한 비즈니스는 없습니다."
"이봐, 한서우 씨."
태준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넓은 어깨가 대리석 식탁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이 계약서에 서명해 주는 대가로, 나 역시 원하는 조항을 하나 넣지."
"말씀하세요. 손해 분기점을 넘지 않는 선에서 검토하겠습니다."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네가 먼저 내 손을 잡을 것. 그리고 사교계 뱀새끼들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부부처럼 굴 것. 그 연기의 강도는 내가 결정한다."
태준의 집요한 시선이 서우의 입술에 머물렀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도원 가문의 안주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그게 네가 내 온기를 안전하게 수급받기 위한 최소한의 유지 비용이야."
서우는 잠시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가상의 주판을 튕기며 이득과 실을 계산하는 버릇이었다. 태준의 제안은 대외용 스킨십의 범위를 넓히는 대신, 사교계 전반에서 그녀의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합의하죠."
서우의 대답에 태준은 만족스러운 듯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첫 번째 현장 테스트는 오늘 저녁이 되겠군."
***
이틀 뒤 저녁, 성북동에 위치한 명하 아트센터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한민국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이는 '명하 재단 자선 파티'.
파티장의 높은 층고 아래로 거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사치스러운 명품 향수 냄새와 차가운 샴페인 기포의 향이 기묘하게 뒤섞여 감돌았다.
서우는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무결한 실크 화이트 드레스를 입고 태준의 팔짱을 꼈다. 태준은 몸에 맞춘 듯 정갈한 블랙 턱시도를 입고 있었는데, 그의 탄탄한 팔 근육이 서우의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 사람이 파티장에 들어서자, 순간 사방의 소음이 파도처럼 잦아들었다.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꽂혔다.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 질투, 그리고 몰락한 태산 파이낸셜의 외동딸을 향한 은근한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다들 눈으로 욕하는 재주들이 뛰어나군."
태준이 서우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자 서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장부 가치가 떨어지는 자들의 소음일 뿐이니까요."
서우가 차분하게 대꾸하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때, 군중 사이를 헤치고 한 여자가 걸어왔다.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 서채율이었다. 그녀는 명하 아트재단 이사장의 딸이자, 사교계에서 태준의 유력한 신부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서채율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서우의 귀에 걸린, 다소 수수한 귀걸이를 한 번 훑더니, 이내 서우의 목덜미를 지나 태준의 어깨 위에 얹힌 손가락으로 향했다. 노골적인 평가의 시선이었다.
"태준 오빠, 정말 오랜만이에요."
서채율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서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서우 씨도 오셨네요? 기사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태산 파이낸셜이 파산 위기라는 소문이 돌아서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도원 가문의 안주인이 되시다니. 역시 서우 씨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에요."
주변에 서 있던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수완'이라는 단어에 담긴 멸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몸을 팔아 가문을 구했다는 비아냥이나 다름없었다.
태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포식자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서우가 그의 팔을 가볍게 쥐며 막아섰다.
서우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렸다. 모욕감 때문이 아니었다. 서채율의 도발에 반응해 심장 박동이 빨라지자, 체내의 균형이 깨지며 '인간 손익 계산안'이 강제로 활성화되려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서우는 몰려오는 이명과 추위를 견디며 눈을 부릅떴다. 귀청을 찢는 듯한 "삐이-" 하는 기계음과 함께 주변의 소음이 멀어졌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피가 얼어붙는 듯한 갈라지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서채율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더니, 이내 서채율의 심장 부근에 반투명한 푸른색 장부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장부의 숫자들이 빠른 속도로 정렬되며 완성되었다.
[서채율 / 명하 아트재단 실무 이사] - 호감도: -92% (극도의 질투 및 증오) - 자산 가치: 450억 원 - 치명적 약점: 명하 아트재단 위작 유통 및 비자금 횡령 내역 (장부 가치: 300억 원) * 세부 내역: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 '장 부르디외'의 위작 3점을 진품으로 감정하여 도원 실업을 비롯한 대기업에 매각. 차액 300억 원을 페이퍼 컴퍼니 'C&Y 홀딩스'를 통해 횡령 및 세탁 완료.
서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고 있었고, 턱끝이 굳어 가고 있었지만, 서우는 태준의 팔을 더 꽉 움켜쥐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의지했다. 태준은 그녀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서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 묵묵히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서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서채율의 가식적인 미소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채율 씨."
서우의 목소리는 파티장의 오케스트라 선율보다 더 맑고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남의 가문 빚 걱정을 하시기에는, 본인 앞가림이 더 급해 보이시네요."
"뭐라구요?"
서채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명하 아트재단이 최근에 거래한 미술품들 말이에요."
서우는 목소리를 낮추어, 오직 서채율과 태준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속삭였다. 그러나 그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프랑스 작가 장 부르디외의 진품이라고 주장하셨던 그 그림들. 사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작이더군요. 그걸 대기업에 매각해서 챙긴 300억 원의 차액은 어디로 갔을까요? 혹시 'C&Y 홀딩스'라는 페이퍼 컴퍼니의 계좌번호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불러드릴 수도 있는데."
서채율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완벽하게 관리된 얼굴 근육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다고 확신했던, 재단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몰락한 가문의 한서우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서채율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주변의 귀부인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감지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우는 차갑게 얼어붙은 손으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사교계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싶으시다면, 최소한 쇠창살 안으로 들어갈 빌미는 만들지 마셨어야죠. 안 그래요, 채율 씨?"
서우의 완벽한 격상 반격이었다. 가난뱅이 딱지를 붙여 망신을 주려던 서채율은 이제 제 목줄을 쥔 사냥개 앞에 선 신세가 되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태준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서우의 차가운 손을 제 뜨거운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서채율을 향해 마지막 확인 사살을 날렸다.
"우리 부부의 자산 상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서 이사. 남의 장부 들여다볼 시간에 네 장부나 깨끗이 닦아 두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내 부인이 한 번 뱉은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거든."
서채율은 수치심과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자신을 향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분노로 하얗게 타버린 서채율은 눈앞에 보이는 한서우의 무결한 흰색 실크 드레스를 노려보았다. 저 잘난 척하는 얼굴을 더럽히고 싶다는 충동이 그녀의 이성을 완벽히 짓밟았다.
"이 건방진 년이..."
서채율의 입꼬리가 기가 찬 미소로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더니, 그대로 한서우의 가슴팍을 향해 붉은 액체를 세차게 내던졌다.
붉은 와인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서우의 순백색 드레스 위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