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디 가, 한서우. 아직 우리 얘기 안 끝났잖아."

비열한 침묵을 찢고 권도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우를 향해 뻗쳐오는 그의 조롱 섞인 시선을 눈치챈 순간, 권태준의 커다란 손이 서우의 손가락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며 단단히 얽어쥐었다.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서우의 차가운 살결 위로 쏟아졌다. 태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넓은 어깨로 서우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도진의 안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비켜, 태준아.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이 몰락한 가문의 계집애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 도원 실업의 장부를 들먹이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어."

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억지로 여유로운 척 포장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살짝 떨리는 그의 눈꺼풀은 그가 느끼는 극도의 불안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서우는 태준의 등 뒤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준의 넓은 등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코끝을 스쳤다. 마른 장작이 타들어 갈 때 나는 듯한 짙은 우디 향이 밀폐된 거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우는 은밀하게 가상의 주판을 튕기듯 검지손가락 끝으로 태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정보. 장부 가치 500억 원.'

서우의 망막 위에 붉은색 숫자가 어른거렸다. 그녀의 고유한 개안(開眼) 능력인 '인간 손익 계산안'이 도진의 머리 위에 띄워놓은 치명적인 약점의 액수였다. 저 숫자가 가리키는 진실은 권도진이라는 인간을 단숨에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폭탄이었다.

여기서 틈을 보이면 안 된다. 이 결혼이 완벽한 비즈니스이자 철저한 동맹임을 저 사냥개 같은 사촌 형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서우는 태준의 손아귀에 잡힌 손녀마디에 슬며시 힘을 주며, 오히려 그의 품속으로 한 걸음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에 그녀의 어깨가 부드럽게 맞닿았다.

"형님."

서우의 목소리가 거실의 대리석 바닥을 타고 맑게 울려 퍼졌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지극히 우아하고 단정하게 다듬어진 음조였다.

"방금 하신 말씀은 참 듣기 거북하네요. 몰락이라니요. 태산 파이낸셜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우는 슬며시 눈리를 휘어뜨리며 태준의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태준의 굳게 다문 입술을 거쳐, 이윽고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안착했다. 3단계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눈맞춤 속에서, 서우는 태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포착했다.

"제 남편이 될 사람 앞동네에서 제 뒷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시는 건, 도원 가문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가 싶어서요."

태준의 입꼬리가 찰나의 순간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영악한 남자는 서우가 던진 패를 단번에 알아채고 판에 동참했다. 그가 잡고 있던 서우의 손을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더 깊숙이 손가락을 얽어매며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골반이 노골적으로 밀착되었다. 서우의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태준의 뜨거운 체온이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들었지, 형?"

태준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에 담긴 조소는 도진의 고막을 잔인하게 긁어내렸다.

"내 아내가 형의 무례함 때문에 불쾌해하잖아. 도원 실업의 장부?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아버지가 알면 아주 흥미로워하실 만한 구좌 번호 몇 개가 내 머릿속에도 돌아다니고 있거든."

"너, 너희들……!"

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서우는 태준의 가슴에 가만히 뺨을 기대며, 도진을 향해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사소한 벌레를 보듯 무심하고도 오만한 눈빛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보시다시피, 저희 부부의 사적인 밤은 꽤 바빠서요. 아직 욕조에 따뜻한 물도 받아놓지 못했거든요."

서우의 귓가에 태준의 짧은 흡기가 들려왔다. 연기치고는 꽤나 자극적인 멘트였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도진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태준의 흔들림 없는 오만함과, 그 품에 안겨 자신을 비웃고 있는 서우의 여유로운 태도. 그 완벽한 부부의 모습에 도진은 더 이상 파고들 틈을 찾지 못했다.

"……두고 봐. 이 가짜 연극이 언제까지 갈지."

도진은 짓씹듯 내뱉고는 거칠게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쾅, 하고 묵직한 방화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구동음이 들릴 때까지, 두 사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로를 안은 채 서 있었다.

마침내 완벽한 정적이 찾아온 순간.

"이제 연극은 끝났……."

서우가 태준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뒤척인 찰나였다.

쿵-!

머릿속을 강타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눈앞의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번져갔다.

[경고: '인간 손익 계산안' 과부하로 인한 부작용 발생.] [체온 급강하 중. 현재 체온 34.2도.] [빙결 증상이 시작됩니다.]

"윽……."

서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혈관 속의 피가 차가운 얼음 결정으로 변해버리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전신을 덮쳤다. 손끝부터 시작된 감각 마비는 빠르게 손목을 타고 어깨로 치달았다. 손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어 마치 동상에 걸린 것처럼 굳어갔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하얀 입김이 서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서우?"

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손에 들린 서우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이 왜 이래. 너 어디 아파?"

서우는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귀를 찌르는 이명 소리 때문에 태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녀의 뇌리를 지배했다.

'온기. 더 많은 온기가 필요해.'

서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태준의 빳빳하게 다려진 화이트 셔츠 깃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 근처를 파고들며 사정없이 매달렸다.

"어……?"

태준이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서우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이마가 태준의 쇄골뼈 부근에 쿵 하고 부딪혔다.

"서우야, 너 지금……."

"가만히 있어."

서우가 짓씹듯 속삭였다.

그녀의 이가 덜덜 맞부딪치는 소리가 태준의 가슴팍에 직접 닿아 울렸다.

태준은 굳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예리한 눈동자가 제 품에 매달려 사르르 떨고 있는 여자의 정수리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여자의 호흡은 가빴고, 그녀가 움켜쥔 셔츠 자락을 통해 전달되는 체온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가웠다. 마치 시체를 만지는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매달려올수록, 태준의 몸 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태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서우의 얇은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닿는 곳마다 차디찬 서우의 살결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얼어붙었던 피를 다시 돌게 만들었다.

[체온 상승 중. 현재 체온 34.8도.] [빙결 완화 감지.]

머릿속의 이명이 조금씩 잦아들자, 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태준의 셔츠를 적셨다.

태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한서우는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마치 생명줄을 잡은 것처럼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항상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신을 사물 취급하던 그 오만한 여자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의 눈빛에 깃든 의문이 점차 짙은 소유욕과 집착으로 변해갔다. 그가 아는 한서우는 절대 이유 없이 타인에게 기대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 기묘한 체온의 변화, 그리고 자신에게 매달리는 이 절박한 행동에는 분명히 그가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태준은 서우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의 단단한 팔뚝이 서우의 척추를 단단히 구속했다.

"이봐, 한서우."

태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고 은밀하게 울렸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서우의 젖은 목덜미를 스치며 미묘한 전율을 선사했다.

"방금 전엔 도진이 앞이라 연기한 거라고 치자."

태준이 천천히 손을 올려 서우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며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리게끔 만들었다.

서우는 저항하려 했지만,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과 그의 묵직한 완력에 밀려 결국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했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태준의 짙은 눈동자 속에 오롯이 담긴 제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술이 서우의 입술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지금 이건 대체 무슨 계산법이지?"

태준이 물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포식자의 여유와, 동시에 억누를 수 없는 갈증이 뒤섞여 있었다.

"나랑 닿는 게 계약에 포함된 일이었던가, 부인?"

서우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태준의 턱끝을 타고 내려온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이마를 지나 콧등을 간질였다. 손끝은 여전히 감각이 마비된 듯 얼어붙어 있었으나, 그와 맞닿은 가슴과 허리만큼은 불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극단적인 냉기와 온기가 몸 안에서 거칠게 부딪치며 기묘한 전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우는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셔츠 깃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유지 보수 비용이라고 해 두죠."

"유지 보수치고는 지나치게 열정적인데."

태준의 목소리에 깊은 조소가 섞여 들었다. 그의 시선이 서우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거쳐, 잔뜩 굳어 있는 어깨로 느리게 이동했다.

서우 역시 지지 않고 시선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길이 먼저 사납게 요동치는 태준의 목울대에 머물렀다. 이어 단단하게 다물린 그의 턱선을 느리게 훑어 내린 뒤, 마침내 오만함으로 가득 찬 그의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3단계로 이어지는 집요한 시선의 충돌 속에서, 공기는 질식할 것처럼 무거워졌다.

"계약서 제5조를 잊으셨나 보네요."

서우가 입술을 열었다. 차가운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지만, 어조만큼은 단단했다.

"‘을’은 ‘갑’의 대외적 신뢰도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협조를 다한다. 도진 형님 앞에서 완벽한 쇼윈도 부부로 보이려면 이 정도 밀착은 감수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도진이가 가고 난 뒤에도 내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건 어떤 조항에 적혀 있지?"

태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틈이 완전히 사라졌다. 서우의 얇은 슬랙스 너머로 태준의 단단한 허벅지가 노골적으로 맞부딪쳤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에 서우의 굳어 있던 손가락 마디가 마침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체온 상승 중. 현재 체온 35.2도.] [이명 강도 감소. 정상 범주 진입 중.]

눈앞을 어지럽히던 붉은 경고등이 서서히 걷히며 태준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시야에 들어왔다. 살았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서우는 자신을 단단히 죔쇠처럼 묶고 있는 태준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태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감싸 쥔 손아귀에 힘을 주어 서우를 제 가슴팍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이건 사후 처리입니다."

서우가 짓씹듯 내뱉으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도진 형님이 완전히 펜트하우스를 벗어났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출 수 없으니까요. 이제 완전히 가셨으니 그만 놓으시죠."

"공짜로 넘어가기엔 내 방열 성능이 지나치게 훌륭한 것 같은데, 부인."

태준이 서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마른 장작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짙은 우디 향이 서우의 호흡기를 가득 채웠다.

"방금 전 네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어. 그리고 지금은 내 온기를 빨아들이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지. 이걸 단순한 ‘연기’나 ‘사후 처리’라는 말로 퉁치기엔 내 손해가 너무 크지 않나?"

태준의 손가락이 서우의 척추뼈를 하나하나 쓸어내리듯 느리게 움직였다. 닿는 곳마다 찌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 남자는 영악하다. 육체적인 반응만으로도 서우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서우의 이성이 차갑게 경고했다. 이 남자에게 약점을 잡히는 순간, 3년 뒤 완벽한 독립을 꿈꾸는 그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타인을 믿지 않는 서우에게 가치의 등가교환이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가가 뭐죠, 권태준 씨."

서우가 그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며 차갑게 물었다.

태준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서우의 뒤통수를 감싸 쥔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녀의 얼굴을 제 눈앞에 완벽히 고정시켰다. 피할 길 없는 시선 속에서 포식자의 집요한 열망이 이글거렸다.

"앞으로 내 온기가 필요할 때마다."

태준의 엄지손가락이 서우의 붉어진 입술 산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지극히 자극적이고도 위협적인 손길이었다.

"네 그 잘난 비밀을 하나씩 내놔. 방금 도진이에게 던졌던 그 장부의 출처처럼,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진짜 패들을."

서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으면."

태준이 속삭이며 서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다음번엔 이 차가운 거실 바닥에서 네가 얼어 죽어가는 걸 그저 지켜만 볼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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