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랫부분에 박힌 영문 이니셜, [Kwon Tae-jun].
그 정교하게 흘려 쓴 이름 석 자가 한서우의 시야를 가차 없이 난도질했다.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회전하던 수많은 장부의 소수점들이 단 하나의 숫자, 영(0)으로 수렴하며 차갑게 동결되는 감각이 일었다.
10년 전, 가문을 난도질하고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도원 신탁 자금의 최종 집행관. 그 잔혹한 판을 설계하고 승인한 진짜 배후가 지금 제 등 뒤에서 제 어깨를 감싸 안은 남자라니.
서우의 차가운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회전하여 권태준을 향했다.
언제나 포식자처럼 단단하고 여유롭던 태준의 눈동자에 미세한 균열이 일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얼굴 위로 스친 것은 당혹감인가, 아니면 들켜버린 자의 체념인가.
수백만 가지의 계산식이 서우의 머릿속을 스치며 충돌하는 그 찰나.
- 띵동.
정적을 깨부수는 초인종 소리가 테라피움의 높은 천장을 날카롭게 때렸다. 기계적인 마찰음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숨 막히는 침묵을 잔인하게 갈라놓았다.
“하, 하하하! 타이밍 한번 끝내주는군!”
거실 한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권도진이 피를 흘리는 패잔병처럼 실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제 손에 쥐린 종이 쪼가리를 흔들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벨 소리 들리지? 드디어 오셨네. 내 변호사들과 채권 추심팀이 말이야. 한서우, 너와 저 오만한 새끼의 목줄을 쥘 진짜 주인이!”
서우는 태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천천히 그의 품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허공에서 맞닿아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실이 끊어지듯 멀어졌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는 시린 냉기가 손끝을 타고 번져 나갔지만, 서우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이 혼란에 잠식당할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쓰레기를 완벽하게 청소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권도진의 비서와 정장을 차려입은 변호사 무리가 거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들의 맨 앞자리에는 거만한 미소를 지은 권도진이 서 있었다. 그의 품에는 이미 도원 파이낸셜의 직인이 찍힌 ‘계약 파기서’와 ‘채권 양도양수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어이, 동생. 그리고 내 제수씨.”
도진이 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의 구두 끝이 거만하게 허공을 흔들었다.
“태산 파이낸셜이 사채업자들과 도원 실업에 지고 있던 1,200억 원의 채권. 내가 방금 전액 대위변제하고 명의를 내 차명 계좌로 이전 완료했다. 법적으로 태산의 모든 자산과 서우 너의 신변에 대한 권리는 이제 나한테 있어.”
도진이 품에서 계약 파기서를 꺼내 유리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이 쇼윈도 결혼도 오늘부로 끝이야. 계약 조건 불이행 및 채무 불이행으로 인한 즉각적인 계약 파기. 서우 너는 몸뚱이 하나만 남기고 길거리로 나앉거나, 아니면 내 밑에 들어와서 기어야겠지. 선택해 봐.”
도진의 목소리에는 광기에 가까운 승리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서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차분한 태도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가죽 시트 위에 얹은 오른손 손가락 끝으로 톡, 톡, 책상을 두드렸다. 가상의 주판알을 튕기는 듯한 규칙적인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계산해.’
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권도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순간, 그녀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숫자의 장부들이 홀로그램처럼 스치며 시각화되기 시작했다. [인간 손익 계산안]의 전개와 동시에, 귀가 터질 듯한 이명이 고막을 찔렀다.
- 삐이이이-.
동시에 손끝에서부터 피가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저체온증이 밀려왔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서우는 허리를 곧게 편 채 버텼다.
도진의 머리 위로 붉은 글씨의 장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유 비자금: 도원 실업 차명 계좌 500억 원 (출처: 불법 비자금 조성 및 횡령)] [연계 자산: 명하 아트재단 위작 거래 내역 300억 원 (소유주: 서채율, 실질 지배자: 권도진)] [현재 가치: -1,200억 원 (채권 매입으로 인한 유동성 고갈 상태)]
서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 미소는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주버님. 다 좋은데, 하나만 여쭐게요. 그 1,200억 원짜리 채권을 매입하실 때, 채권 원장에 첨부된 서류들을 단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읽어보긴 하셨나요?”
도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계약서라면 내 일류 변호사들이 며칠 밤을 새우며 검토했어. 아무 문제 없는 완벽한 태산의 채무 증서다.”
“그렇겠죠. ‘겉보기’에는요.”
서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대기하고 있던 민주희 비서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파일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태산 파이낸셜이 가지고 있던 채권 중 800억 원은, 지난달 제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루미에르 파이낸셜’로 이미 우회 매각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루미에르는…….”
서우가 서류의 한 페이지를 펼쳐 도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도원 실업의 유령 자회사들과 연대 채무 보증이 얽혀 있는, 자본잠식 상태의 페이퍼 컴퍼니죠. 즉, 아주버님이 매입하신 채권은 태산의 자산을 지배하는 권리가 아니라, 루미에르가 지고 있던 ‘수천억 원대 부실 채무’의 연대 보증인 자격을 승계하는 독배였던 겁니다.”
도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간에 가셨다. 그의 변호사들이 다급하게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장을 넘기는 종이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변호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 이게 무슨…… 서우 씨, 이게 무슨 장난질이야!”
도진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난이라니요. 아주버님이 그토록 탐내시던 서채율 씨의 명하 아트재단 위작 횡령금 300억 원, 그리고 도원 실업 차명 계좌에 고이 숨겨두셨던 비자금 500억 원. 그 돈들이 오늘 밤 채권 인수를 위해 송금되는 순간, 루미에르의 채무 상환 계좌로 자동 예치되도록 설계를 끝내 두었습니다. 자금 세탁 방지법 위반 계좌로 묶여서 말이죠.”
서우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잔인하게 내리꽂혔다.
“결과적으로 아주버님은 태산의 목줄을 쥔 게 아니라, 본인의 차명 비자금 500억과 서채율의 횡령 자금 300억을 자진해서 국가에 헌납하고, 추가로 1,000억 원대의 부실 채무를 뒤집어쓴 신용불량자가 되신 겁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야! 김 변호사! 이거 다 거짓말이지? 어?”
도진이 변호사의 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대, 대표님…… 실제로 이 채권 계약서의 효력 조항에 우회 연대 채무 승계 조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금 출처가 도원 실업 차명 계좌와 연동되는 순간 자동으로 발효되도록…….”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검토를 어떻게 한 거야!”
도진이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쓸어버렸다.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깨지며 거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서우는 그 모습을 그저 냉담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도원 실업 차명 계좌 정보, 그리고 명하 아트재단의 위작 거래 리스트는 이미 금융감독원과 검찰청 특수부에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습니다. 대기업 후계자라는 분이 불법 비자금으로 부실 채권을 매입해 사기극을 벌이려 하셨으니, 내일 아침 뉴스 헤드라인이 아주 볼만하겠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이번에는 잘 정돈된 파란색 수트 차림의 검찰 수사관들과 정복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권도진에 대한 긴급 체포 영장이 들려 있었다.
“권도진 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불법 비자금 조성, 그리고 자금 세탁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이거 놓아!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도원 그룹 권도진이야! 아버지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도진이 사방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수사관들의 단단한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수갑이 채워지는 차가운 금속음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도진은 끌려 나가면서도 광기 어린 눈으로 태준과 서우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한서우! 권태준! 너희 둘 다 무사할 것 같아?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것 같냐고! 너희는 결국 서로를 뜯어먹다 파멸할 거야!”
그의 비명 섞인 저주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거실에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을 때, 서우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윽…….”
골든핑거의 과도한 사용으로 온몸의 신경이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입술은 핏기 없이 파랗게 질려갔다. 전신을 엄습하는 혹독한 추위에 서우는 제 팔목을 감싸 쥐며 바르르 떨었다. 체온이 위험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거칠고 단단한 손길이 서우의 어깨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차가운 살결을 파고들었다. 권태준이었다. 그는 서우를 제 가슴팍으로 강하게 밀착시키며, 그녀의 얼어붙은 두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하아…….”
태준의 체온이 닿는 순간, 서우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얼음물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비정상적으로 높고 뜨거운 그의 체온이 그녀의 차가운 몸 안으로 스며들며 얼어붙은 이성을 조금씩 깨웠다.
하지만 서우는 그의 품 안에서 안도하는 대신, 힘겹게 고개를 들어 태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넓은 가슴 팍 너머로, 바닥에 흩어진 10년 전 신탁 서류가 보였다. 여전히 그곳에는 [Kwon Tae-jun]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거…… 놓아.”
서우가 목쉰 소리로 말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태준은 오히려 그녀를 더 꽉 안아 누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집착이었다.
“설명해.”
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서명, 당신이 한 거 맞아? 10년 전, 우리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돈을 집행한 게…… 정말 당신이었어?”
태준의 턱끝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의 숨결이 서우의 이마에 뜨겁게 닿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비장했다.
“서우야.”
태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쇼윈도 부부의 가식적인 호칭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부름이었다.
“그 서명은 내가 한 게 맞아.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배신이 아니야. 그 신탁 자금은 네 아버지를 죽이기 위한 게 아니라…….”
태준이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서우의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 세 글자를 본 순간, 두 사람의 호흡이 동시에 멎었다.
[권중만 회장]
도원 그룹의 절대 권력자이자, 이 모든 승계 전쟁과 비극의 설계자.
서우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 귀에 대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지독하리만치 차분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 한서우 양. 내 첫째 놈을 제법 그럴듯하게 치워버렸더군.
노회한 포식자의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 네 아비가 하던 짓과 아주 판박이야. 내일 오전 9시, 본사 내 개인 집무실로 오너라. 태산 파이낸셜의 남은 채무와…… 10년 전 신탁 자금의 진짜 주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태준이 놈 없이, 혼자 와라.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서우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뜨거운 손이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