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기어오르던 검은 구두들의 거친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2층 서재 문턱까지 육박해 왔다. 권중만 회장이 보낸 사냥개들의 숨소리가 문틈 너머로 가쁘게 새어 들었다. 그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서우의 손안에 쥐여 있던 개인 단말기가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진동했다. 화면 위로 민주희 비서의 극비 보안 회선이 붉은 점멸을 일으켰다.
[권도진, 몰락을 피하기 위해 사설 사채업자 연합 ‘블랙머니’의 자금 1,200억 원 유입 확인. 태산 파이낸셜 채권 전량 인수 시도 중.]
그 짧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간 서우의 입꼬리가 가늘게 비틀려 올라갔다. 빙결 증상으로 하얗게 질려가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도원 그룹 회장이 10년 전의 신탁 조항이라는 유령을 내세워 목을 죄어오던 그 순간, 그의 아들이자 가장 멍청한 사냥개인 권도진은 제 발로 벼랑 끝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웃음이 나와?”
태준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서우의 귓가를 긁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서우의 허리를 옥죄며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열기가 서우의 차가운 뺨에 닿았지만, 서우는 눈동자를 굴려 문밖의 발소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권도진이 미끼를 물었어요.”
서우가 속삭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가상의 주판알을 퉁기는 고유의 버릇이었다. 머릿속의 ‘인간 손익 계산안’ 장부가 차가운 이명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권도진의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50,000,000,000 KRW (장부 가치 500억)] [서채율의 명하 아트재단 위작 거래 내역: 30,000,000,000 KRW (장부 가치 300억)]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두 개의 거대한 폭탄이 장부 위에서 붉은빛으로 날카롭게 명멸하고 있었다. 서우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고정되었다. 태준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기묘한 확신을 읽어내고는,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 쥐새끼가 사채 자금까지 끌어다 네 채권을 사고 있다는데, 그게 네 설계라는 건가.”
“네. 도진이가 가진 돈줄을 전부 한곳으로 모아야 한 번에 터뜨리기 쉬우니까요.”
서우는 태준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온몸의 관절이 얼어붙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콸콸 쏟아지는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고,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골든핑거를 한계까지 발동시킨 대가였다.
태준은 멀어지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제 가슴팍에 다시 처박았다.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직 온기 수급 안 끝났어, 한서우.”
그의 거친 숨결이 서우의 목덜미를 적셨다. 뜨거운 체온이 닿는 곳마다 얼어붙었던 피가 찌릿하게 돌기 시작했다.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척수를 타고 흘렀다.
서우는 입술을 짓씹으며 민 비서에게 송신 명령을 내렸다.
“민 비서님. 지금 즉시 시장에 소문을 흘리세요. 태산 파이낸셜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유 중인 강남 빌딩 지분과 우량 채권들을 반값에 급처분한다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권도진 측 비서실로 바로 흘러 들어가게 조치하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서우는 태준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권도진에게 마지막 도박을 할 판떼기를 깔아주는 거야.”
태준이 서우의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물었다. 그의 손길은 사나웠지만, 행동은 기묘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도진이가 네 우량 자산들을 헐값에 먹겠다고 달려들겠군. 제 목줄이 죄어오는 줄도 모르고.”
“맞아요. 내가 자금이 부족해 허덕이는 것처럼 연기할수록, 그 인간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할 테니까.”
서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얼음송곳처럼 예리했다.
***
그 시각, 도원 그룹 부회장실.
가죽 소파에 깊숙이 묻혀 있던 권도진은 비서가 가져온 태산 파이낸셜의 자산 매각 리스트를 받아 들자마자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구두 끝은 흥분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하! 한서우, 이 독한 년이 드디어 밑천이 드러났구나! 강남 빌딩 지분까지 반값에 던져? 진짜 급하긴 급한 모양이네!”
도진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회장님, 하지만 태산의 채권을 무리하게 인수하는 것은 리스크가 큽니다. 이미 사설 사채업자 연합 ‘블랙머니’에서 빌린 1,200억 원의 이자만 해도……”
“닥쳐! 이 기회를 놓치면 난 권태준 그 개자식 밑에서 평생 기어 다니며 살아야 해! 아버지가 10년 전 신탁 조항으로 한서우의 신변 처분권까지 흔들고 계실 때, 내가 태산의 채권을 싹쓸이해서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고!”
도진의 머릿속은 오직 권태준을 꺾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서우가 판 함정인지도 모른 채, 품 안의 비밀 금고 키를 꺼내 들었다.
“도원 실업 차명 계좌에 묶여 있는 비자금 500억 원, 지금 당장 전부 출금해. 그리고 명하 아트재단의 서채율이 보관하고 있는 위작 거래 대금 300억 원도 즉시 회수해라. 한 푼도 남김없이 태산 채권 매입에 쏟아부어.”
“부회장님, 그 자금들은 발각되면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태산만 먹으면 도원 파이낸셜로 세탁하면 그만이야! 당장 진행해!”
도진의 가학적인 미소가 어두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쥔 800억 원의 비밀 자금과 1,200억 원의 사채 자금, 도합 2,000억 원의 거대한 자본이 한서우라는 가녀린 먹잇감을 완벽하게 맷돌처럼 갈아버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같은 시각, 삼성동 펜트하우스 ‘테라피움’의 드넓은 거실.
통창 밖으로 폭우가 쏟아지며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거실의 은은한 간접 조명만이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소파 주변의 공기는 기묘한 열기와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우는 한계에 도달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골든핑거를 연이어 발동한 부작용으로 체온이 34도 이하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고,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푸르게 변해 있었다.
“춥지.”
태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서우의 가느다란 허리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로 눕혔다. 서우는 저항할 기력조차 없어 그의 넓은 무릎을 베고 누웠다.
태준의 손가락이 서우의 뺨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에 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그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당신 몸…… 유난히 뜨겁네.”
서우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네가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거야. 날 방열기 취급하는 건 여전하군.”
태준이 차가운 실소를 흘리며, 다른 한 손으로 서우의 얼어붙은 손가락들을 하나씩 쥐고 제 손가락 사이로 맞물려 깍지를 꼈다. 뼈마디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강력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밀착 속에서 서우의 이명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서우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마음껏 이용해 봐. 내 무릎이든, 내 체온이든, 내 가문이든.”
태준의 시선이 누워 있는 서우의 얼굴로 내려앉았다. 평소의 오만하고 차가운 눈빛 너머로, 기묘한 집착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서우의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푸른빛이 가시고 서서히 붉은 생기가 돌아오는 입술이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대신, 다 끝난 뒤엔 네 장부에서 내 지분을 가장 크게 비워둬야 할 거야. 난 푼돈 몇 푼으로 만족하는 투자자가 아니거든.”
“당신은 항상……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려고 하네.”
“당연하지. 너라는 자산을 완전히 내 수중에 넣을 때까지, 난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어.”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으나, 그 뒤에 숨겨진 포식자의 본능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가장 강력한 방패이자 무기가 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서우는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안정감과 뜨거운 온기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그의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태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서우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폭우 소리마저 지워버릴 만큼 밀도 높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서우의 머릿속 장부에서 숫자들이 급격하게 재조정되기 시작했다.
[권도진의 가용 자산: 0 KRW] [태산 파이낸셜 채권 확보율: 100% (매입 완료)] [경고: 도원 실업 비자금 계좌 및 명하 아트재단 위작 내역 노출 준비 완료]
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입술에 차가우면서도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덫이 닫혔어요.”
태준 역시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입꼬리를 올렸다.
“쥐새끼가 들어왔군.”
그 순간, 펜트하우스의 고요를 깨뜨리며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딩동—.
초인종 소리는 거만하고 요란하게 조용한 테라피움의 공기를 찢었다.
권도진이었다. 그는 자신이 태산의 모든 채권을 손에 넣고 완벽한 승리자가 되었다고 확신한 채, 계약 파기서와 한서우의 신변 인도 요구서를 품에 안고 당당하게 문 앞에 서 있었다.
서우는 태준의 무릎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몸은 여전히 차가웠으나,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려가서 손님을 맞이해야겠네요.”
서우가 서늘하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태준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어두운 복도 끝을 향해 잔인한 포식자의 눈빛을 던졌다.
이제, 사냥감을 도살할 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서우의 발걸음은 겉보기엔 한없이 침착했으나, 가느다란 발목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젖은 가죽 냄새와 비린 오존 향이 열린 중문 사이로 밀려들어 와 펜트하우스의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를 더럽혔다.
현관 앞,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은 세 명이었다. 그 중심에 선 권도진은 비에 젖은 고가의 수입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친 채,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서우의 시선이 도진의 품에 안긴 가죽 서류철에 잠시 머물렀다. 이내 그의 오만한 미소 위로 시선을 완만하게 끌어올린 그녀는, 마지막 순간 도진의 어깨 너머에 대기 중인 검은 양복의 사내들에게로 눈길을 완전히 비껴 보냈다. 철저한 무시이자 탐색이었다.
“어이, 제수씨. 얼굴색이 왜 그래? 꼭 초상집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도진이 구두 굽으로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짓이기며 한 걸음 내딛었다.
“불청객을 맞이하는 얼굴이 좋을 수는 없죠, 아주버님.”
서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진의 시선이 서우의 뒤쪽,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태준에게로 향했다. 태준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마치 하찮은 벌레의 재롱을 관찰하는 포식자 같은 눈빛으로 도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태준, 넌 여전히 건방지구나. 네 마누라 목줄이 내 손에 쥐어졌는데도 그 태도가 유지될지 보자고.”
도진이 품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 거실 테이블 위로 거칠게 던졌다. 툭, 하고 무거운 소리가 테라피움의 정적을 깨뜨렸다.
“태산 파이낸셜의 채권 전량 인수 계약서다. 블랙머니의 사채 자금까지 싹 긁어모아서 한 장도 남김없이 내가 다 사들였지. 법적으로 이제 태산의 모든 자산과 부채는 내 통제하에 있다.”
도진이 턱을 치켜세우며 서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건 아버지가 서명하신 신탁 조항 집행서. 제수씨, 10년 전 계약에 따라 당신 신변과 남은 자산의 처분권은 도원 그룹 회장 직속, 즉 내 권한으로 위임됐다. 이제 짐 싸서 나와야겠어. 도원 저택 지하에 네가 쓸 방은 마련해 뒀으니까.”
성공에 도취한 도진의 숨소리가 거칠게 거실을 채웠다.
서우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빤히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인간 손익 계산안’이 다시 한번 붉은 빛을 뿜어내며 기동했다.
[권도진의 총부채: 1,200,000,000 KRW (사채 연합 ‘블랙머니’ 고리대금)] [권도진의 불법 자금 세탁액: 800,000,000 KRW (도원 실업 비자금 및 위작 거래 대금)] [태산 채권의 실질 가치: 0 KRW (법적 무효화 명분 확보 완료)]
능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내자,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과 함께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리가 돋아나는 감각이 밀려왔다. 서우의 입술이 순식간에 파르르 떨리며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서우의 상체가 앞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 순간, 거칠고 뜨거운 손 하나가 서우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태준이었다. 그는 서우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 자신의 재킷 안감 속, 심장과 가장 가까운 뜨거운 가슴팍에 밀착시켰다.
화끈거리는 열기가 서우의 손끝을 타고 들어가 얼어붙은 혈관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명이 잦아들고 시야가 맑아졌다.
“권도진.”
태준이 서우의 정수리에 턱을 괸 채, 낮고 서늘한 음성을 뱉어냈다.
“네가 끄집어다 쓴 사채 자금 1,200억. 그리고 도원 실업에서 몰래 빼돌린 비자금 500억에 서채율 미술품 위작 대금 300억까지. 참 알뜰하게도 모아서 던졌더군.”
도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태준과 서우를 번갈아 보았다.
“너…… 그걸 어떻게……”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태준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네가 인수한 그 채권들, 내일 아침 금융감독원과 검찰 특수부에 송신될 자료들과 함께 휴지 조각이 될 예정이야. 불법 비자금과 위작 횡령금으로 매입한 채권의 효력이 법원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서우가 태준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며 도진의 무너지는 표정을 똑똑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주버님. 당신이 오늘 밤 태산의 채권을 100% 매입 완료하는 순간만을 기다렸어요. 자금 출처가 완벽하게 꼬여서 당신의 차명 계좌와 서채율의 장부가 도원 그룹 본사와 연결되는 바로 그 순간을요.”
서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당신은 승기를 잡았다고 믿었겠지만, 사실은 제 발로 거대한 올가미에 목을 넣은 거예요. 사채업자들은 내일 아침 당신의 비자금 계좌가 동결되는 순간, 1,200억 원의 담보로 도원 실업의 지분을 요구하겠죠.”
도진의 전신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완벽한 덫에 걸렸음을 직감한 사냥개의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광기 어린 눈빛으로 품 안에서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아니…… 아니야! 난 안 망해! 아버지가 준 이 신탁 조항은 진짜야! 10년 전 신탁 조항 제4조! 한서우, 네 아버지만 서명한 게 아니라고!”
도진이 종이를 찢어발기듯 펼쳐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똑똑히 봐! 이 신탁 조항의 최종 승인자이자 자본 제공자로 서명한 놈이 누구인지!”
서우의 시선이 도진이 던진 종이의 가장 아랫부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10년 전, 태산 파이낸셜을 파멸로 몰고 갔던 도원 신탁 자금의 최종 집행관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직인 옆에 흘림체로 쓰인 영문 이니셜과 낯익은 서명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Kwon Tae-jun]**
서우의 숨이 멎었다. 머릿속의 모든 숫자가 일시에 영(0)으로 수렴하며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가 10년 동안 증오해 마지않았던 가문의 원수, 아버지를 자살로 몰고 가고 태산을 공중분해 시킨 진짜 흑막의 배후에…… 지금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는 권태준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서우의 차가운 눈동자가 천천히 회전하여 태준의 얼굴을 향했다. 태준의 굳어버린 눈동자 속에서, 처음으로 숨길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창밖의 번개가 거실을 하얗게 가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잔인하게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