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다음 날 오전 8시 50분, 도원 그룹 본사 32층.

두터운 마호가니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고 건조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는 내내, 서우의 구두굽 소리만이 대리석 복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켰다. 가죽 냄새와 오래된 침향이 뒤섞인 집무실 안은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위장 속처럼 기괴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석에, 도원 그룹의 절대 권력자 권중만 회장이 앉아 있었다. 백발을 정갈하게 뒤로 넘긴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이 새겨놓은 깊은 주름보다 더 깊고 음습한 탐욕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권 회장은 찻잔을 내려놓지 않은 채, 들어서는 서우를 향해 느리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은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닌, 잘 길들여진 사냥개의 목줄을 가늠하는 주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태준이 없이 혼자 오라 했거늘, 정말로 홑몸으로 나타났구나.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제 분수를 모르는 건지.”

낮고 가라앉은 쇳소리가 넓은 집무실을 울렸다. 권 회장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기를 단숨에 꺾어놓으려는 지배자의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서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걸어가 노인의 맞은편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첫째, 그녀의 시선은 권 회장의 손끝에서 잘게 떨리는 찻잔의 표면을 향했다. 둘째, 숨을 고르며 시선을 들어 올려 그의 굳게 다물린 입술과 완고한 턱선을 훑었다. 셋째, 마침내 노인의 탁한 안광과 허공에서 정면으로 눈을 맞추었다.

서우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차분함이 권 회장의 심기를 건드린 듯, 그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버님께서 부르셨는데, 며느리로서 지체할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도원 그룹의 왕좌를 두고 벌이는 이 지저분한 판돈 정리는, 제삼자가 끼어들기엔 너무나 사적인 영역이니까요.”

서우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끝으로 소파의 가죽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탁, 탁, 탁. 가상의 주판알을 튕기며 머릿속의 계산기를 작동시키는 그녀만의 오랜 버릇이었다.

동시에 서우의 시야가 급격히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귓가에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려 퍼지며, 온몸의 혈관으로 얼음물이 흘러드는 감각이 엄습했다. 골든핑거, ‘인간 손익 계산안’이 활성화되는 징조였다.

권중만 회장의 머리 위로 붉고 무거운 장부 가치와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시각화되어 떠올랐다.

[보유 비자금 및 불법 승계 신탁 기금: 1,200억 원] [치명적인 약점 (10년 전 신탁 자금 비밀 조항): 2,000억 원] [한서우를 향한 호감도: -95% (철저한 배제 대상)] [현재 심리적 안정도: 85% → 78%]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서우는 내색하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귀가 터질 듯한 이명을 억누르며, 그녀는 권 회장을 향해 한 걸음 더 깊숙이 칼날을 밀어 넣었다.

“내 첫째 놈을 경찰에 넘겨버린 솜씨가 제법이더군.”

권 회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권도진이 그 모자란 놈이 제 발로 판 함정에 빠진 거라지만, 감히 도원의 핏줄을 내 허락도 없이 건드려? 네 아비가 태산 파이낸셜을 이끌고 내 발밑에서 기어 다니던 시절을 잊은 모양이구나. 그깟 잔재주로 도원의 후계 구도를 흔들 수 있을 것 같더냐?”

“잔재주라니요.”

서우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온기라곤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던 장남 권도진 사장이 지금 성동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이유가, 정말 그 애송이의 단순한 실수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품 안에서 얇은 태블릿 PC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볍게 던지듯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수많은 계좌 내역과 외화 송금 기록들이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권도진 사장이 관리하던 도원 실업의 차명 비자금 계좌 정보입니다. 장부 가치만 무려 500억 원에 달하죠. 제가 이 정보를 확보하고 금융감독원과 검찰 특수부에 동시에 찌르지 않았다면, 도진 씨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겠습니까?”

권 회장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서우의 목소리는 칼바람처럼 서늘하게 집무실의 공기를 갈랐다.

“서채율이 운영하는 명하 아트재단을 통해 수년간 자행된 위작 거래와 미술품 우회 증여, 그리고 300억 원대의 횡령 내역 역시 제 손을 거쳐 언론사에 송고되었습니다. 도원 가문의 가장 유력한 혼처이자 뒷배였던 명하 그룹이 왜 하루아침에 꼬리를 자르고 숨었는지, 설마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신 건 아니겠지요?”

이것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권도진의 500억 원대 비자금 계좌와 서채율의 300억 원대 위작 횡령 내역. 도원의 좌우 날개를 하나씩 잘라내며 권 회장의 숨통을 죄어온 서우의 치밀하고도 완벽한 사냥 기록이었다.

권 회장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노인의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고,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심리적 안정도가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심리적 안정도: 78% → 52%]

“네 이년……!”

“목소리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님.”

서우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가락을 깍지 끼며 말을 가로막았다.

“제가 여기 온 것은, 고작 그런 잔챙이들의 목숨줄을 자랑하려 함이 아닙니다. 진짜 본론은 이제부터니까요.”

서우는 태블릿 화면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이윽고 화면에 나타난 것은 누렇게 바랜 10년 전의 계약서 스캔본이었다. 그 서류의 최하단에는 [Kwon Tae-jun]이라는 서명과 함께, 도원 그룹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10년 전, 도원 신탁 자금의 귀속 권한 비밀 조항.”

그 단어가 서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순간, 권 회장의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얼음 송곳이 그의 심장을 찌른 것처럼.

“이 신탁 자금은 표면상으로는 태산 파이낸셜의 투자금 유치를 위한 담보 성격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버님께서 불법적인 가업 승계와 증여세 탈루를 위해 설계하신 차명 신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챈 저희 아버지를 입막음하기 위해, 태산 파이낸셜에 2,000억 원의 허위 채무 프레임을 씌워 파산으로 몰고 가셨죠.”

서우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이명이 더욱 거세지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흐려졌지만,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권 회장의 머리 위에 뜬 장부가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간과하신 비밀 조항이 하나 있더군요. 해당 신탁 기금의 운용 과정에서 불법적인 자금 세탁이나 명의 도용이 발생할 경우, 신탁 자금 전액은 원래의 위탁자인 ‘태산 금융’으로 즉시 원귀(原歸)된다는 특약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탁의 최종 집행 서명권자는…… 권태준이 아닌, 권중만 회장,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서우의 목소리에 서린 서슬 퍼런 확신에 권 회장의 턱끝이 파르르 떨렸다.

“태준이의 서명은 가짜였습니다. 아버님이 태준이의 명의를 도용해 서명하고, 모든 법적 책임을 그 아이에게 떠넘기려 하셨던 것이죠. 만약 이 비밀 조항과 명의 도용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원 그룹의 현 지배 구조 전체가 불법 승계로 규정되어 공중분해 될 겁니다.”

정적. 집무실 안은 단 한 줌의 바람도 통하지 않는 진공 상태가 되었다.

말 한마디 없는 침묵의 압박 속에서, 노회한 지배자의 눈동자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권 회장의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마다, 서우의 시야에 비친 그의 계산서 파동은 사정없이 요동치며 하향 조정되었다.

[현재 심리적 안정도: 52% → 28% → 14%] [치명적인 약점 노출로 인한 예상 손실액: 2,000억 원 (도원 그룹 지분 가치 폭락 가정 시 측정 불가)]

권 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찻잔을 건드렸고, 찻잔이 쓰러지며 식어버린 찻물이 테이블 위로 보기 흉하게 번져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무너져 내리는 도원 제국의 운명과도 같았다.

“……원하는 게 뭐냐.”

패배를 인정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힘없이 갈라져 있었다.

서우는 미리 준비해 온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미끄러뜨렸다. 번져나간 찻물조차 닿지 않는 완벽하게 건조한 구역에 놓인 서류였다.

“태산 파이낸셜의 남은 채무 2,000억 원 전액 면제. 그리고 도원 그룹과 태산 파이낸셜 간의 모든 지분 관계 및 채무 계약의 영구적인 종결. 이 서류에 서명하십시오.”

서우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것으로 아버님은 도원의 붕괴를 막으시는 겁니다. 아주 저렴한 비용이지요.”

권 회장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만년필 끝끝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평생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흔들던 지배자의 손이, 일개 몰락 가문의 딸이 내민 계약서 앞에서 굴욕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서우는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고, 골든핑거의 반작용으로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야 해.’

권태준의 온기가 간절했다. 그의 뜨거운 품이, 그녀의 얼어붙은 혈관을 녹여주던 그 비현실적인 열감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수 없다. 이것은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하는 완벽한 자립의 순간이었다.

서우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권 회장을 압박했다.

“서명하십시오, 아버님. 제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만년필 끝이 마침내 종이 위에 닿았다. 스윽, 서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권중만 회장의 친필 서명이 계약서 하단에 새겨졌다. 도원 그룹의 직인까지 찍히는 순간, 서우의 머릿속에서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장부가 업데이트되었다.

[태산 파이낸셜 채무: 0원 (완전 상환 및 면제)] [도원 그룹과의 종속 관계: 해소]

완벽한 독립이었다. 가문을 짓누르던 거대한 사슬이 마침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챙기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쿵-!

집무실의 두꺼운 마호가니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혔다.

비서들의 만류하는 비명 소리를 뚫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한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정하던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고, 셔츠 깃은 거칠게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권태준이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집무실 안의 풍경을 빠르게 훑었다. 얼어붙은 채 서류를 쥐고 있는 서우와, 초라하게 무너져 있는 권 회장.

태준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서우에게 다가와, 그녀의 차갑게 식어버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가 서우의 얼어붙은 피부를 타고 심장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한서우.”

태준이 이를 악물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눈빛은 분노와 집착, 그리고 안도감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자서 이 짓을 벌여? 감히 나를 빼놓고 내 아버지와 거래를 해?”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서우의 뺨에 닿았다. 완전히 해결된 계약서와, 갑작스럽게 난입한 계약 남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며 새로운 폭풍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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