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민주희에게 장부 이송을 지시하며 찢어버린 상환 고지서의 잔해들이 서재의 짙은 네이비색 카펫 위로 눈송이처럼 흩어져 있었다.

태준의 품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지독할 정도로 뜨거웠다. 서우의 귓가를 찢을 듯 울리던 이명이 그 인위적인 온기에 밀려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소름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알려준 곳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그 위치를 벌써 알고 사람들을 보냈을까?”

귓가에 닿은 태준의 숨결에는 그가 즐겨 마시는 싱글 몰트위스키의 쌉싸름한 오크 향과 체온이 섞여 있었다. 서우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손바닥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짚었다. 얇은 실크 셔츠 너머로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손끝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먼저 태준의 단단하게 다물린 입술 언저리에 머물렀다. 이어 턱 끝의 날카로운 선을 지나, 마침내 지독한 집착이 일렁이는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서우는 흔들리던 눈빛을 지워내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권중만 회장님이 10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짜두셨다고?”

“그래. 네 아버지가 태산의 이름으로 도원의 신탁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이 덫은 완성되어 있었어. 네가 아무리 도망쳐봐야 결국 내 아버지가 짜놓은 궤도 위라는 뜻이지.”

태준이 속삭이며 서우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귀에 힘을 주었다. 마치 제 영역 안에 들어온 사냥감을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포식자처럼, 그의 체온이 서우의 차가운 피부를 강박적으로 파고들었다.

서우는 긴장감에 젖어드는 와중에도 머릿속의 주판을 튕겼다. 검지와 중지를 가볍게 움직이며 머릿속 장부의 숫자를 맞추는 그녀만의 버릇이 시작되었다.

‘태산 파이낸셜의 남은 채무 2,000억 원. 권중만 회장의 최종 목적은 채무 불이행을 빌미로 태산의 모든 자산 가치를 도원 그룹에 강제 귀속시키는 것.’

만약 여기서 태준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서우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서, 당신 돈으로 그 2,000억 원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못 할 것도 없지. 나한테는 그저 장부상의 단수 차이에 불과한 금액이니까. 조건은 간단해. 한서우, 네가 내 완벽한 아내가 되는 것.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그 얼치기 같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짜 내 소유가 되겠다고 약속해.”

태준의 목소리에는 거만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서우가 결국 자신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서우는 비웃음이 섞인 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 이번에는 태준도 순순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서우는 헝클어진 옷가지를 단정히 정돈하며 오만한 남편을 응시했다.

“거절하겠어.”

태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거절? 지금 네 손에 든 패가 뭔지 잊은 모양인데, 48시간 뒤면 태산은 공중분해된다.”

“당신 돈으로 이 구렁텅이를 빠져나가는 순간, 난 당신의 완벽한 채무자가 돼. 도원 그룹이라는 쇠사슬을 벗어나기 위해 권태준이라는 더 단단한 족쇄를 차는 꼴이지. 난 그런 멍청한 거래는 안 해.”

서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단단하고 명료했다.

“난 온전치 못한 손으로 빚을 메우고 싶지 않아. 타인의 동정이나 원조로 얻은 자립은 진짜 자립이 아니니까. 난 내 방식대로 도원 그룹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완벽하게 독립할 거야. 당신한테 구걸해서 목숨을 구걸하는 신데렐라 노릇은 내 적성에 안 맞거든.”

태준은 턱을 괴고 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기이한 열기가 번져 나갔다. 분노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그 지독한 독종 같은 면모에 한층 더 깊이 매료된 이의 눈빛이었다.

“지독한 계산기 같으니라고.”

태준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자기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도 손익 계산서부터 두드리고 있군. 좋아, 그 고집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지. 하지만 내 아내가 도원 그룹의 수사관들에게 비참하게 끌려가는 꼴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무슨 뜻이야?”

“민 비서가 향한 아지트의 정보는 이미 내 선에서 오염시켰어.”

태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가 보낸 수사관들이 그곳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이 마주할 것은 텅 빈 고철 창고와 가짜 장부상자들뿐일 거다. 진짜 장부들은 이미 내가 확보한 안전 가옥으로 이송 중이지. 물론, 네 승인 없이 열어보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서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태준은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듯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그의 온기가 아직 차가운 서우의 뺨을 노골적으로 데웠다.

“장외의 잡음은 내가 전부 차단해 주지. 도원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압박은 내 방패 뒤에서 해결해. 넌 네가 좋아하는 그 머리싸움으로 판을 짜봐, 한서우. 덫을 놓든, 사기를 치든 마음대로 해봐.”

태준의 입술이 서우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대신, 네가 실패해서 내 품으로 도망쳐 올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남긴 열기와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만을 남겨둔 채, 태준은 서재를 나섰다.

혼자 남겨진 서우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몸 안의 빙결 증상이 완전히 가라앉자,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졌다.

그녀는 책상 위의 전용 태블릿을 켜고 민주희 비서에게 보안 회선을 연결했다.

“민 비서님, 상황은 어떻습니까?”

― 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권태준 전무 측의 경호팀이 개입하여 수사관들의 추적을 따돌렸습니다. 현재 진짜 장부들은 안전하게 확보된 상태입니다.

민주희의 차분한 음성에 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더욱 냉혹하게 눈을 빛냈다.

“잘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덫을 놓을 차례입니다.”

서우는 화면에 도원 그룹의 우회 채권 주간사인 ‘서일 인베스트먼트’의 내부 구조도를 띄웠다. 권중만 회장은 태산 파이낸셜의 채권을 직접 인수하는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이 서일 인베스트먼트라는 외주 업체를 앞잡이로 내세웠다.

“도원 회장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대리인의 숨통을 끊어놓으면 그만이지.”

서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고유 능력인 ‘인간 손익 계산안’을 활성화했다.

순간, 귓가에 웅성거리는 이명과 함께 시야가 붉고 푸른 숫자의 장부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손끝이 급격하게 차가워지며 얼어붙는 통증이 찾아왔지만, 서우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버텼다. 머릿속 장부에서 두 개의 거대한 숫자가 튀어나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첫 번째, 2화에서 권도진을 스캔했을 때 심어두었던 치명적인 약점.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정보 — 장부 가치: 500억 원]**

두 번째, 12화에서 서채율을 사교계에서 매장하며 확보해 둔 결정적 카드. **[명하 아트재단 위작 거래 및 횡령 내역 — 장부 가치: 300억 원]**

서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이 두 장부의 가치를 합치면 정확히 800억 원. 도원 가문의 두 얼간이가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은밀하게 굴리던 지하의 돈이었다.

“민 비서님, 지금 즉시 금융감독원과 검찰청 특수부에 익명으로 제보를 넣으세요. 도원 실업의 차명 계좌와 명하 아트재단의 횡령 자금이 서일 인베스트먼트의 태산 채권 인수 자금으로 우회 유입되고 있다는 정황 증거 파일입니다.”

― 예? 하지만 대표님, 그 자금들은 원래……?

“권도진과 서채율이 자신들의 몰락을 막기 위해 마지막 발악으로 서일 인베스트먼트의 사모펀드에 밀어 넣은 돈입니다. 그들은 이 돈으로 태산의 채권을 인수해 도원 회장에게 바치고, 자신들의 입지를 회복하려 하겠죠.”

서우는 차가워진 손가락으로 주판을 튕기듯 허공을 두드렸다.

“서일 인베스트먼트가 태산의 채무 2,000억 원을 인수하려는 순간, 그들이 굴리는 펀드의 핵심 자금 800억 원이 불법 비자금 및 횡령금으로 동결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서일 인베스트먼트는 채권 인수 대금을 기한 내에 납입하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죠.”

― 아……! 그러면 도원 회장이 설계한 채권 회수 계획 전체가 마비되는군요.

“단순한 마비가 아니야.”

서우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렸다.

“외주 주간사가 무너지면, 태산의 채권은 시장에 헐값으로 매물로 나오게 되어 있어. 도원 그룹의 신용도 역시 바닥을 치겠지. 10년 전 권중만 회장이 숨겨둔 신탁 자금의 비밀 조항…… 그 조항을 발동시켜 태산의 채무 전액을 도원의 신무기 개발 투자금과 상쇄시키는 진짜 판은 그때 시작되는 거야.”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서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귀를 찌르는 이명이 한층 더 거세졌고, 손끝은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태준의 개인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직 식지 않은 미지근한 온기가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혈류를 깨웠다. 태준이 남겨놓은 온기 덕분에 빙결 증상의 파멸적인 고통을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권태준, 당신이 내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했지.’

서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웃었다.

‘그럼 난 도원 그룹의 심장에 가장 날카로운 창을 꽂아넣을 뿐이야.’

그때, 태블릿 화면에서 다급한 경보음이 울렸다. 화면에 민주희의 경악한 얼굴이 떠올랐다.

― 대표님! 방금 긴급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권도진이 움직였습니다!

“권도진이요?”

― 예, 검찰과 금감원의 압박이 시작되자 완전히 코너에 몰린 모양입니다. 도원 실업의 비자금이 묶일 위기에 처하자, 권도진이 사설 사채업자 연합의 자금까지 무리하게 끌어다 서일 인베스트먼트에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든 태산의 채권을 강제 인수해서 회장님께 바치고 살아남으려는 마지막 도박입니다!

사설 사채업자 연합. 명동의 지하 금융을 쥐고 흔드는 어둠의 큰손들의 자금이었다. 권도진이 제 무덤을 파기 위해 마침내 사채업자들의 돈까지 끌어들여 판돈을 키운 것이다.

민주희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지만, 서우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서우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것은, 완벽한 승기를 잡은 포식자의 미소였다.

“제 발로 무덤을 파는구나, 권도진.”

“민 비서님. 사설 사채업자 연합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삼도 파이낸스’ 조 회장에게 이 정보를 흘리세요.”

서우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했다.

― 조 회장에게 말씀이십니까? 그자는 업계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계산이 빠른 인간입니다. 만약 우리가 거짓 정보를 줬다고 판단하면 태산마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거짓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조 회장에게 전하세요. 권도진이 서일 인베스트먼트에 투입하려는 자금의 담보로 제시한 도원 실업의 주식과 명하 아트재단의 채권들은, 이미 검찰과 금감원에 의해 동결 처리가 진행 중인 ‘유령 자산’이라고요.”

서우는 태블릿 화면에 나타난 권도진의 실시간 자산 흐름도를 응시했다. 화면 너머로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듯, 그녀의 망막 위로 권도진의 숨겨진 비자금 장부 가치가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모습이 시각화되었다.

“조 회장 성격에 제 돈 수백억 원이 허공으로 날아가게 생긴 걸 안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죠. 권도진의 목을 조르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가 끌어들인 그 사채업자들이 될 겁니다.”

― 아……! 권도진이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돈을 상환하지 못하면, 그들이 서일 인베스트먼트에 투입된 자금을 즉시 회수하려 들겠군요.

“그렇죠. 그렇게 되면 도원 회장이 설계한 태산 채권 강제 인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내부에서부터 처참하게 터져버릴 겁니다. 권도진은 도원 가문의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매장될 거고, 서채율 역시 위작 횡령 혐의에 사채 연루설까지 더해져 재기 불능이 되겠죠.”

말을 마친 서우는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억눌러왔던 대가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머릿속 장부를 극도로 팽창시켜 권도진과 서채율, 그리고 사채업자 연합의 자금 궤적까지 동시에 스캔한 부작용이었다.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시야가 거뭇하게 흐려졌다.

서우는 타오르는 태블릿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길이 태준이 떠나간 닫힌 문틈으로 향했다가, 미세하게 흔들린 끝에 자신의 차갑게 얼어붙은 손끝으로 떨어졌다. 시선의 이동 끝에 남은 것은 지독한 한기뿐이었다.

“윽……”

허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척추를 타고 극심한 오한이 휘몰아쳤다. 서우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서재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흩어졌다.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 둔탁한 감촉만을 전해왔다. 책상을 짚은 손이 힘없이 미끄러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무거운 오크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내 방패 뒤에 얌전히 숨어 있으라고 했을 텐데.”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서재 안으로 강력한 열기가 난입했다.

태준이었다. 그는 애초에 이 공간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들이닥치자마자 서우의 무너지는 몸을 단단한 팔로 낚아챘다.

“앗……!”

닿는 순간, 서우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태준의 체온은 마치 뜨거운 용암 같았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얼어붙어 멈춰 가던 혈류가 거칠게 요동치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해빙의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뇌척수액을 타고 흘렀다.

태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서우의 턱을 거칠게 쥐어 올렸다.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그녀의 차가운 볼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또 그 빌어먹을 능력을 썼군. 온몸이 얼음장이야. 나 없으면 10분도 못 버티고 숨이 넘어갈 인간이,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날뛰는 거지?”

“방패는…… 나를 지켜줄 뿐이야.”

서우는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참아내며, 태준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셔츠 깃을 생명줄처럼 움켜쥐는 꼴이 될 뿐이었다.

“도원 회장의 목을 치는 건…… 내 손으로 해야 해. 그래야 진짜 독립이니까.”

“독립?”

태준의 눈매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서우의 허리를 더 세게 감싸 안으며, 두 사람 사이의 틈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얇은 실크 드레스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포식자 같은 심장박동이 서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내 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주제에 독립을 논해? 한서우, 넌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없어. 네 몸의 온기를 쥐고 흔드는 건 나니까.”

“당신이 가진 건…… 내 체온 조절권뿐이야. 내 이성과 영혼은…… 여전히 내 장부 위에 있어.”

“그 장부째로 널 사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태준의 입술이 서우의 귓가를 자극하듯 스쳐 지나갔다. 그의 날숨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살결이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과 미묘한 열기가 얽혀들던 바로 그 순간, 태준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붉은색 보안 단말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태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서우를 품에 안은 채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내렸다.

**[발신: 권중만 회장]**

단말기 화면에는 짤막한 텍스트 메시지와 함께 하나의 문서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태준이 화면을 터치해 파일을 열자, 서우의 눈동자 역시 그 화면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우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모든 계산식이 일시에 정지했다.

[도원 신탁 자금 비밀 조항 제4조: 태산 파이낸셜의 채무 상환 지연 및 디폴트 징후 포착 시, 신탁 자금의 담보권은 즉시 도원 그룹 회장 직속으로 귀속되며, 채무자의 직계 비속(한서우)의 신변 및 자산 처분권 또한 10년 전 체결된 사전 동의서에 의거하여 즉각 집행한다.]

그 아래에는 서우조차 본 적 없는, 그녀의 아버지가 10년 전에 직접 서명한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건……”

서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권중만 회장은 권도진과 서일 인베스트먼트를 사지로 밀어 넣을 서우의 움직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을 미끼로 던져 서우가 사채업자들과 검찰을 움직이게 만든 뒤, 그 틈을 타 10년 전의 진짜 덫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태준이 단말기를 쥔 손에 핏대를 세우며 읊조렸다.

“아버지가 움직이셨군. 사채업자들이 권도진의 목을 따기 전에, 10년 전 신탁 조항을 명분으로 널 도원 저택으로 강제 연행하겠다는 뜻이야. 법적인 효력을 완벽하게 갖춘 채로.”

그때, 펜트하우스 아래층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여러 명의 거친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계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우는 태준의 품 안에서 굳어버린 채, 문밖에서 다가오는 어둠의 그림자들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번개가 치며 서재 안을 하얗게 비추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녀의 계산 위에, 도원 회장이 던진 10년 전의 거대한 유령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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