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 가치를 내 돈으로 매기지 마. 내가 이미 널 목숨으로 상속받기로 결정했으니까.”
욕조 안의 더운 공기가 권태준의 낮은 목소리를 타고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는 순간, 한서우는 호흡을 멈췄다.
태준의 시선이 먼저 물방울이 맺힌 서우의 쇄골뼈 부근을 느리게 훑었다. 이어 살짝 달아오른 뺨을 거쳐, 이내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단 3단계의 시선 이동만으로도 서우는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유칼립투스 향과 뜨거운 살결의 체취가 물 안개의 비린내를 지우며 코끝을 찔렀다. 얼어붙었던 서우의 손가락 끝에 찌릿한 전류가 흐르며 온기가 빠르게 차올랐다. 이명은 잦아들었지만, 심장 박동은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
“……농담이 지나쳐.”
서우가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농담으로 들려? 장부밖에 모르는 네 머릿속 계산기가 오작동할 만큼 진심인데.”
태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서우의 젖은 뺨바닥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은 거의 화상에 가까울 정도로 뜨거웠다.
“내 몸값이 측정 불가라면, 넌 나한테 무엇을 지불할 생각이지?”
“내 가문의 독립. 그거면 당신에게도 남는 장사잖아.”
“그건 비즈니스고. 내가 원하는 건 네 장부에 없는 거야, 한서우.”
태준의 손가락이 서우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놓았다. 붉게 짓눌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얽혔다. 서우는 침을 삼키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더 얽히다가는 정말로 이 계산기 같은 심장이 영영 고장 나 버릴 것만 같았다.
* * *
이튿날 아침.
삼성동 펜트하우스 ‘테라피움’의 침실은 차가운 겨울 아침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리넨 시트의 마른 버석거림이 살결에 닿는 감각에 서우는 눈을 떴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 위에 남은 온기만이 간밤의 뜨거웠던 접촉을 증명하고 있었다. 서우는 침대 헤드보드에 기대앉아 제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차갑게 식어 가야 할 손가락이 지금은 지극히 정상적인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권태준이라는 방열기가 준 온기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서우는 습관적으로 검지와 중지를 침대 나뭇결 위에서 톡톡 두드렸다. 가상의 주판을 튕기는 몸짓이었다.
독립. 자립. 빚 청산.
머릿속으로 차가운 단어들을 주입하며 심장에 돋아난 솜털 같은 감정들을 짓밟았다. 권태준의 가치가 ‘측정 불가’로 떴다고 해서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인간의 호의와 진심만큼 변동성이 크고 위험한 자산은 없다. 오직 눈에 보이는 장부와 숫자만이 배신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향한 냉정한 다짐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드레스룸에서 빳빳하게 풀이 죽은 실크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을 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등에 뜬 이름은 비서 민주희였다.
“말해, 민 비서.”
— 사장님, 드디어 터졌습니다. 명하 아트재단 법인 계좌랑 서채율의 개인 금고 거래 내역이 완전히 확보되어 검찰과 주요 언론사에 동시 송부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민주희의 목소리는 평소의 담백함을 잃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머릿속 장부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서채율의 명하 아트재단 위작 거래 및 횡령 내역: 300억 원 — 폭로 및 회수 완료] [권도진의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정보: 500억 원 — 금융감독원 정밀 추적 개시]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서채율이었다. 겉으로는 고고한 자선 사업가이자 도원 그룹의 차기 안주인을 자처하던 그녀의 가면이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명하 아트재단을 통해 흘러 들어간 수백억 대의 위작 거래와 비자금 세탁 정황이 낱낱이 공개되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서채율의 가문은 물론,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던 도원 가문의 사교계 영향력까지 한순간에 진흙탕에 처박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태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간질을 일삼던 이복형 권도진 역시 자신이 숨겨둔 500억 원 규모의 차명 계좌가 폭로되면서 숨통이 조여들었다. 금융감독원의 특별 세무조사단이 도원 실업 본사를 압수수색했다는 속보가 이른 아침부터 뉴스 특보로 깔렸다. 권도진은 제 목숨줄을 부지하기 바빠 서우를 공격할 여력조차 잃어버렸다.
“예상대로군. 두 사람 모두 발버둥 칠 시간조차 없었겠지.”
서우가 차분하게 말하며 서재의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 네, 서채율은 오늘 오전 검찰 출석 통보를 받았고, 권도진 역시 이사회 소집조차 못 하고 자택에 연금되다시피 격리되었습니다. 사실상 사교계와 도원 가문 내에서의 입지는 완전히 끝난 셈입니다.
통쾌한 사이다가 가슴을 관통했다. 자신을 몰락 가문의 비천한 딸이라 비웃으며 덫을 놓았던 자들이, 결국 자신이 휘두른 장부의 칼날에 베여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직 제 손으로 일궈낸 완벽한 격상 반격이었다.
하지만 서우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 도원 그룹의 가장 거대하고 추악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태준의 개인 서재에서 엿보았던 기밀 파일. 10년 전 도원 그룹 회장이 숨겨둔 ‘신탁 자금의 귀속 권한 비밀 조항’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원 가문의 정점에 서 있는 권중만 회장. 그는 제 자식들과 며느리 후보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을 묵인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존재는 가차 없이 쳐내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움직임은 서우의 예상을 비껴가지 않았다.
민주희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사장님…… 도원 홀딩스 측에서 방금 태산 파이낸셜 본사로 공식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퀵이 아니라, 도원 그룹 법무팀 소속 변호사들이 직접 들고 왔습니다.
서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손가락 끝이 다시 책상 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탁, 탁.
“내용이 뭐지?”
— 기한 이익 상실(EOD) 통고입니다. 태산 파이낸셜이 도원 측 채권단에 지고 있는 2,000억 원의 부채에 대해, 계약서상의 ‘신용 등급 하락 및 경영 불안정’ 조항을 근거로 즉시 상환을 요구했습니다.
“즉시 상환이라니. 기한이 언제까지로 되어 있어?”
— 48시간 이내입니다. 모레 오전 10시까지 상환하지 않으면, 태산 파이낸셜의 모든 자산에 대해 강제 집행 및 청산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서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채율과 권도진의 몰락을 지켜보던 권중만 회장이 드디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제 가문의 치부가 드러나자, 꼬리를 자르는 동시에 그 원인 제공자인 태산 파이낸셜을 아예 공중분해시켜 입을 막으려는 잔인하고도 신속한 결정이었다.
2,000억 원.
현재 태산 파이낸셜의 유동성으로는 도저히 48시간 이내에 마련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부채가 청산 단계로 넘어가면,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서우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그녀는 다시 도원 가문의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권중만 회장다운 방식이네.”
서우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권태준 부사장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의 자금력이라면 2,000억 원 정도는……
“아니.”
서우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권태준에게 구걸하지 않아. 이건 내 전쟁이야. 그 사람에게 손을 벌리는 순간, 우리의 대등한 계약 관계는 무너지고 난 평생 그 사람의 방열기로 살아야 해.”
서우는 전화를 끊고 서재 책상 위에 놓인 태산 파이낸셜의 재무제표를 노려보았다. 숫자들이 붉은색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환영이 보였다.
체온이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가벼운 빙결 증상이 찾아왔지만, 서우는 이 악물고 버텼다. 지금은 권태준의 온기에 기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도원 법무팀의 기한 이익 상실 고지서를 집어 들었다. 백색의 고급 수입지에 인쇄된 거만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사는 합의된 채무 이행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서우는 망설임 없이 고지서를 양손으로 잡았다.
찌이이익.
거친 마찰음과 함께 종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녀는 찢어진 고지서 조각들을 다시 한번 사등분하여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던져버렸다.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거대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서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사냥감의 위치에서 사냥꾼의 위치로 올라서기 위해선, 판을 흔드는 모험이 필요했다.
서우는 다시 인터폰을 들어 민주희에게 연결했다.
“민 비서.”
— 네, 사장님.
“지금 당장 태산 파이낸셜 본사에 있는 모든 회계 장부와 이중 금고의 기밀 서류들을 챙기세요. 본사는 곧 도원 측의 가압류 신청으로 봉쇄될 겁니다.”
— 어디로 옮길까요? 도원 측의 추적이 닿지 않는 곳이어야 할 텐데요.
서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았다. 저 높고 견고한 빌딩 숲 어딘가에, 권중만 회장이 숨겨둔 은밀한 약점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내가 미리 준비해 둔 비밀 임시 아지트로 이송하세요. 지금부터 우리는 도원 그룹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합니다.”
서우의 목소리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문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포식자의 아가리 앞에서, 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그 목덜미를 물어뜯을 준비를 시작했다. 48시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통화를 마친 서우가 전화를 내려놓는 순간, 서재의 무거운 제브라우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문간에 기댄 권태준의 시선이 가장 먼저 바닥에 흩어진 하얀 고지서 조각들로 향했다. 이어 그의 느릿한 눈길이 서우의 하얗게 질려 가볍게 떨리는 손가락 끝을 훑었다. 마침내 한기를 품은 채 그를 쏘아보는 서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그의 시선이 단단히 박혔다. 단 3단계의 시선 이동만으로도 서재 안의 공기가 무겁게 응축되었다.
그에게선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옅은 커피 향이 풍겼다. 서우의 빙결 증상으로 인해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던 서재의 온도가, 그가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미세하게 일렁였다. 걸어 다니는 거대한 화로 같은 존재감이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서재나 뒤적일 줄 알았더니, 제법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군.”
태준이 긴 다리로 서재 안쪽을 향해 걸어왔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위협적인 파열음을 냈다.
“남의 서재라니. 이 펜트하우스 지분의 절반은 내 명의야, 권태준.”
서우가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몸을 버텼다. 손끝에서 시작된 마비가 팔꿈치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명이 웅웅거리며 시야 가장자리가 푸르스름하게 가라앉았다.
“그 기개는 마음에 드는데, 몸은 정직하지 못하네.”
그가 서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서우의 차가운 뺨을 스쳤다.
“48시간 안에 2,000억 원이라. 우리 아버지가 네 숨통을 아주 확실하게 끊어놓기로 작정하셨더군.”
“도움 같은 건 기대 안 해.”
“기대해 봐도 되는데. 네가 내 바지깃이라도 붙잡고 매달리면, 그까짓 2,000억쯤은 내가 선심 쓰듯 내어줄 수도 있지.”
“그 돈을 받는 순간 난 당신의 완벽한 소유물이 되겠지. 난 그런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
서우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등 뒤는 차가운 책상 모서리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태준의 눈매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서우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앗……!”
서우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닿은 살결을 통해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온기가 폭포수처럼 밀려들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얼음 파편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감각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그 안도감 뒤에는 굴욕감과 지독한 갈증이 뒤따랐다.
“이 차가운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태준이 서우의 손목을 잡은 채 그녀를 제 가슴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서우의 이마가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이명 때문에 내 목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 텐데. 도원 그룹의 심장부를 타격하겠다고?”
“이거 놓으라고 했어.”
서우가 그의 가슴을 밀쳐내려 했지만, 태준은 바위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밀착시켰다.
“민 비서가 향한 그 비밀 아지트.”
태준의 입술이 서우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서우의 심장을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려준 곳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그 위치를 벌써 알고 사람들을 보냈을까?”
서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빙결 증상 때문이 아니었다. 순수한 경악이었다.
“무슨…… 소리야?”
“10년 전 신탁 자금의 비밀 조항. 아버지는 네가 태산의 장부를 들고 어디로 움직일지 이미 10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짜두셨거든. 네 아버지가 죽기 전부터 말이야.”
태준이 서우의 턱을 부드럽게 쥐어 올리며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소유욕과 집착이 일렁였다.
“지금 네 비서가 도착할 아지트에는 장부를 태워버릴 불길과, 널 기다리는 수사관들이 깔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