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터질 듯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망막을 하얗게 태워버릴 것처럼 쏟아졌다. 사교계가 발칵 뒤집힌 현장, 그 화려하고 위선적인 연회장의 한복판에서 한서우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바닥의 차가운 대리석 타일이 뺨에 닿기 직전,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는 억센 악력이 느껴졌다.

권태준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연사 속을 단 한 걸음의 지체도 없이 뚫고 들어왔다. 은색 셔터 소리와 눈이 멀 것 같은 광원 속에서, 태준은 서우의 상체를 제 단단한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그녀를 단숨에 번쩍 안아 올렸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진짜……."

귓가를 때리는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평소의 오만함 대신 날 선 초조함이 벼려져 있었다.

서우의 시선이 먼저 태준의 굳게 다문 턱선에 머물렀다. 이내 그의 길게 늘어진 속눈썹 아래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의 흔들림을 포착했다. 마지막으로 태준이 그녀의 얼어붙은 이마를 자신의 어깨에 묻으며 사납게 군중을 쏘아보는 것까지, 서우의 흐릿한 시야 속에 느리게 각인되었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고 고요했다. 비상등의 붉은 불빛만이 대시보드 위에서 조용히 깜빡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유리창에 하얀 김이 서렸다가 이내 차가운 서리로 변해 흘러내렸다. 태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핸들을 부술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우는 조수석에 웅크린 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결빙의 통증을 견뎌냈다.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댔지만, 머릿속의 장부는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삼성동 테라피움 펜트하우스의 초호화 복층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태준은 서우를 안은 채 곧장 안방 내부의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거대한 대리석 욕조가 덩그러니 놓인 공간은 한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태준은 서우를 욕조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혀두고는, 거친 손길로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쏴아아아―!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며 뜨거운 물이 욕조를 채우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태준의 숨결이 가쁘게 흩어졌다. 젖은 린넨 셔츠 아래로 드러난 그의 탄탄한 등근육이 거칠게 들썩였다.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그의 살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렬한 체온이 좁은 욕실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사시나무 떨듯 떠는 서우의 손끝은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입술마저 핏기를 잃고 퍼렇게 질린 채였다. 이를 맞부딪치며 내는 딱딱 소리가 욕실 안의 물소리 사이로 애처롭게 울렸다.

태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서우의 떨리는 손끝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다음 순간, 그의 눈길이 서우의 젖은 속눈썹을 타고 내려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허공에서 주판을 튕기듯 허공을 긁고 있는 서우의 굳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제 손길을 고정했다.

"그만해."

태준의 목소리가 젖은 수증기 사이로 낮게 깔렸다.

"계산…… 해야 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서우가 굳어버린 혀를 굴려 억지로 대답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그녀의 정신을 사정없이 흔들었지만, 눈앞의 장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권도진의…… 500억."

"그깟 돈 얘기는 나중에 해."

"아니, 지금 해야 돼. 내 장부에서…… 확실하게 털어내야 하니까."

서우는 억지로 집중하며 눈앞의 허공을 응시했다. 푸른빛의 홀로그램 장부가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권도진 —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 장부 가치: -50,000,000,000 KRW - 상태: 완벽 폭로 및 국세청 고발 완료 (회생 불가)

[서채율 — 명하 아트재단 위작 거래 및 횡령 내역] - 장부 가치: -30,000,000,000 KRW - 상태: 사교계 영구 매장 및 사기 혐의 긴급 체포 진행 중

두 적대자의 가치가 마이너스의 심연 속으로 처박히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장부에 기록되고 있었다. 완벽한 응징이었다. 그들이 태산 파이낸셜을 집어삼키기 위해 파놓았던 세무조사의 덫은, 서우가 터트린 비자금과 위작 거래라는 거대한 폭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머릿속의 장부가 화려하게 업데이트될수록, 서우의 체온은 생명의 한계선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다 갚았어……."

서우가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속삭였다.

"그들이 내 가문에 지운 빚도, 나를 옥죄던 사방의 압박도…… 이제 내 계산대로 다 갚아줬다고."

"그래서, 그 대가로 네 목숨을 내놓으시겠다?"

태준의 눈이 사납게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서우의 턱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뜨거운 악력이 차가운 피부를 타고 파고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서우의 몸은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이 멍청한 한서우. 네 그 빌어먹을 손익 계산서가 네 목숨보다 가치 있어?"

"나한테는 그게 내 존재 이유야. 구걸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완벽한 자립."

"자립? 잘난 자립 하다가 이 욕조 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싶어서 이래?"

태준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값비싼 명품 재킷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젖은 타일 위로 무거운 원단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구두를 신은 채로, 물이 목전까지 차오른 욕조 안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철벅이는 거친 물소리와 함께 뜨거운 온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태준은 서우의 허리를 안아 그대로 물속으로 이끌었다. 얇은 이브닝드레스 자락이 물속에서 꽃잎처럼 퍼져나갔고, 태준의 하얀 셔츠는 순식간에 물에 젖어 그의 단단한 몸바탕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뜨거운 자극에 서우가 짧은 신음을 뱉었다. 물의 열기뿐만이 아니었다. 서우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은 태준의 품은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태준은 사시나무 떨듯 떠는 서우의 등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그녀를 제 가슴팍으로 더 단단히 밀착시켰다. 그의 심장이 서우의 가슴뼈에 맞닿아 터질 듯이 뛰어대고 있었다.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젖은 옷감의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숨 쉬어, 한서우. 내 온기 똑바로 받아."

그의 거친 명령이 젖은 뺨 위로 쏟아졌다.

"추워…… 너무 추워, 태준아……."

서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차가운 이성은 이미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본능이 살아남기 위해 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입술이 그의 뜨거운 쇄골 부근에 닿자, 태준이 나직한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 그렇게 매달려. 계산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구걸해."

태준의 목소리가 젖은 수증기 속에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포식자 같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서우는 그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느꼈다. 그 강인하고 오만한 권태준이, 지금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원적인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손실을 걱정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심장 한구석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 같은 자들이 보이는 절박함이었다.

"넌 참 이상해……."

서우가 그의 젖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중얼거렸다.

"뭐가."

"왜 나 같은 계산기한테…… 이렇게까지 열을 내는 건데? 우리 계약은…… 철저한 상호 이득이었잖아."

태준이 서우의 뺨을 감싸 쥐고 강제로 얼굴을 마주 보게 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서우의 눈동자 깊은 곳을 꿰뚫었다.

"이득? 그래, 이득이지. 내가 시작한 이 게임의 가장 큰 이득이 뭔지 알아?"

"뭔데……?"

"너한테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되는 거."

태준의 손가락이 서우의 젖은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얼어붙었던 핏줄이 화끈거리며 깨어났다.

"네 장부에 적힌 그 어떤 숫자보다, 내 체온이 더 비싸다는 걸 네 뇌리에 박아넣는 거. 그래서 네가 평생 그 계산기를 두드릴 때마다 내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 그게 내 진짜 손익 계산이다."

그 순간, 서우의 눈앞에 다시 한번 장부의 홀로그램이 번쩍였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활성화된 '인간 손익 계산안'이 권태준의 머리 위로 붉은색 숫자를 띄워 올렸다.

[권태준의 잔여 가치 및 나를 향한 호감도 계산 중...]

언제나 명확한 수치로 떨어지던 장부의 하단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100억, 500억, 1000억……. 계산기의 숫자는 멈추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다. 1조를 넘어선 숫자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기괴한 노이즈를 일으켰다.

삐이이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숫자가 깨진 픽셀처럼 흩어지며 단 하나의 기호로 수렴되었다.

[측정 불가 (∞)]

무한대. 그 어떤 장부로도, 그 어떤 금전적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 서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타인을 오직 득실의 주판알로만 튕겨보던 그녀의 견고한 불신증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인간의 진심을 믿지 않던 그녀의 세계에서, 권태준이라는 존재가 계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산으로 우뚝 솟아오른 것이다.

"왜 그래."

태준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눈치채고 나직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서우가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태준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서우의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당겨 자신의 젖은 가슴팍에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물결이 두 사람의 몸짓을 따라 욕조 가장자리로 출렁이며 넘쳐흘렀다.

"거짓말하지 마. 또 머릿속으로 주판 튕기고 있었지?"

"……."

"내 몸값이 얼마쯤 되는지 계산이 끝났나 보군."

태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무거웠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서우의 젖은 이마와 코끝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서우는 그의 가슴에 뺨을 묻은 채, 빠르게 퍼져나가는 온기를 탐닉했다. 심장 부근의 마비가 풀리고, 손가락 끝에 온전한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명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살았다, 는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갈증이 그녀의 목구멍을 태웠다.

태준은 서우의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의 손길은 다정하면서도 맹목적인 집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먹이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맹수와도 같았다.

"넌 네 가치를 내 돈으로 매기지 마."

태준이 서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이미 널 목숨으로 상속받기로 결정했으니까."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