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직, 지지직.

유리 테이블 표면에 은백색의 성에가 엉겨 붙기 시작했다. 서우는 제 손끝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극단적인 인공의 냉기를 내려다보았다. 혈관을 타고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얼음 송곳의 감각은 생생한 고통이었다. 귓가에는 이미 이명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삐이이— 하는 기계음 속에서 서채율의 일그러진 얼굴이 모자이크처럼 번졌다.

"오지 마."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새어 나왔다. 서우는 얼어붙는 오른손을 실크 드레스 자락 뒤로 숨겼다.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리며 보이지 않는 가상의 주판알을 튕겼다. 숫자를 세어야 했다. 머릿속의 이성을 붙잡아 줄 유일한 끈은 오직 계산기뿐이었다.

`[서채율 향후 가치: KRW -30,000,000,000]` `[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연계 계좌 잔액: KRW 50,000,000,000]`

눈앞의 공간이 차가운 청색 장부로 뒤덮였다. 숫자들이 허공에서 붉고 푸른 빛을 발하며 어지럽게 명멸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체온이 0.5도씩 하강하는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간 숨결이 갤러리의 따뜻한 조명 아래서 하얗게 얼어붙어 흩어졌다.

"한서우, 너 지금 상태가……."

서채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시선이 서우의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린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에 머물렀다. 사교계의 영악한 여우답게, 상대의 약점을 포착하는 감각만큼은 짐승처럼 빨랐다. 채율의 눈동자에 찰나의 의혹과 이내 고개를 드는 비열한 확신이 교차했다.

"몸이 아주 안 좋아 보이네? 무리해서 남의 축제에 흙탕물을 뿌리려니까 뇌에 과부하라도 온 거야?"

채율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가죽 바인더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프랑스 감정협회(CNES)의 공인 직인이 찍힌 미술품 보증서였다.

"이게 네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 하던 '라 투르'의 정식 감정서야. 내 명하 아트재단이 보유한 모든 작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진품이지. 네 알량한 입놀림으로 흠집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뜻이야."

서우는 테이블을 짚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이 닿은 유리 표면이 냉기로 인해 하얗게 불투명해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감출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공기가 서서히 희박해지는 감각 속에서도, 서우의 눈동자는 채율이 내민 종이 위의 숫자를 정확히 꿰뚫었다.

계산안의 푸른 빛이 보증서 테두리를 감싸 안았다.

`[문서 가치: KRW 0 (위조율 98.7%)]` `[위조 서명 대가 지급액: KRW 30,000,000]` `[실제 수령인: 프랑스 감정협회 전직 하급 서기 피에르 뒤퐁]`

서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오히려 얼음처럼 투명하고 날카롭게 울렸다.

"프랑스 감정협회의 정식 감정서라."

"그래. 이제 네 무례함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준비나……."

"보증서 우측 하단의 일련번호, 'CNES-2024-089'. 그리고 그 옆에 날인된 수석 감정사 장 뤽의 친필 자필 서명."

서우는 한 걸음 내딛었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서늘한 파열음을 냈다. 채율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시선이 서우의 입술에서 그녀가 든 서류로, 그리고 다시 서우의 차가운 눈동자로 빠르게 이동했다. 3단계로 이어지는 불안의 징후였다.

"그 서명, 위조네요."

서우가 단호하게 단어를 뱉어냈다.

"뭐, 뭐라고?"

"장 뤽 감정사는 올해 2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했어요. 그의 필체는 미세한 떨림이 반영되어 굴곡이 생기는데, 이 서명은 지나치게 매끄럽군요. 마치 누군가 기계로 트레이싱한 것처럼."

서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차가운 냉기가 서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식혔다. 채율은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오류."

서우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켰다.

"CNES의 공식 수수료는 유로화로만 결제되며, 고유 소득세 코드가 반드시 상단에 표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서류에는 도원 실업의 프랑스 현지 유령 법인인 'D-Holdings'의 계좌 번호가 은밀히 각인되어 있군요. 감정비 명목으로 송금된 3천만 원. 아니, 정확히는 유로화로 2만 1천 유로. 그 돈이 위조의 대가였겠죠?"

"이, 이건 억지야! 네가 뭘 안다고……!"

"모를 리가 없죠."

서우는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굳어 가고 있었지만, 미리 설정해 둔 단축키를 누르는 것쯤은 본능으로 가능했다.

"제가 숫자에 아주 예민하거든요. 특히 남의 돈이 어디서 새어나가 어디로 들어가는지에 대해서는."

서우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당신이 명하 아트재단을 통해 지난 3년간 위작을 유통하며 조성한 비자금 300억 원. 그리고 그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사용한 도원 실업의 차명 계좌 정보."

그 순간, 갤러리 내부에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교계의 부인들이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먼지마저 얼어붙어 멈춘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서채율 씨. 그리고 그 뒤에 숨은 권도진 씨."

서우가 마침내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당신들이 공유하는 도원 실업의 차명 비자금 계좌. 계좌번호는 신한은행 110-384-******. 예금주는 권도진의 개인 비서인 김태수. 잔액은 정확히 500억 원."

서채율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서우는 홀 전면에 설치된 대형 미디어 월을 향해 스마트폰을 치켜들었다.

"중요한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이 이제 그 진실을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서우가 액정을 가볍게 탭했다.

그와 동시에, 갤러리 내부에 모인 수십 명의 사교계 명사들의 주머니와 핸드백 속에서 기계적인 알림음이 연쇄적으로 울려 퍼졌다.

타라링. 띡, 띡, 띡.

사방에서 스마트폰이 울려댔다. 부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확인한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면에는 명하 아트재단의 숨겨진 이중 장부, 위작 거래 리스트, 그리고 권도진의 도원 실업 비자금 계좌에서 서채율의 개인 계좌로 흘러 들어간 자금의 실시간 추적 경로가 완벽한 도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소수점 한 자리까지 오차 없이 들어맞는, 반박 불가능한 증거의 집합체였다.

"이게...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명하 아트재단이 위작을 팔아치웠다고? 내가 지난달에 산 그림도 설마……?"

"세상에, 유령 법인 계좌 이름이 권도진 비서잖아!"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거대한 해일이 되어 서채율을 덮쳤다. 채율은 머리를 한 대 얻맞은 듯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미디어 월의 푸른 빛이 잔인하게 흘러내렸다.

"아니야... 이거 다 조작된 거야! 한서우가 날 모함하려고 해킹한 거라고요!"

채율이 절규하듯 소리쳤지만, 이미 사교계 인물들의 싸늘한 시선은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돈과 권력의 생리는 잔혹했다. 한 번 냄새가 난 고기는 즉시 버려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서우의 상태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윽……!'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서우는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80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장부 정보를 동시에 활성화하고 제어한 대가는 참혹했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점멸했다. 귓가의 이명은 이제 머릿속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주파 소음으로 변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서리는 이미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피부가 얼어붙어 하얀 결정이 맺히는 모습이 드레스 소매 틈으로 어렴풋이 보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얼어붙는 것처럼 기침이 터져 나오려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어.'

서우는 비틀거렸다. 다리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바닥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갤러리의 육중한 유리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빛 금속의 마찰음이 복도를 울렸다.

철컥.

단정하고 묵직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검은색 수트를 칼같이 차려입은 사내들이 전시장 내부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의 표식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권태준.

그는 평소의 오만한 미소를 지워버린 채, 극도로 가라앉은 눈빛으로 장내를 쓸어내렸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머스크 향과 베르가모트의 서늘한 체취가 차가운 갤러리의 공기를 단숨에 장악했다.

"소란스럽군."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그의 시선은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단 한 번 훑은 뒤, 곧바로 한서우에게로 고정되었다.

서우의 창백한 얼굴과 비정상적으로 떨리는 몸을 발견한 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언뜻 스친 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까. 태준은 시선을 돌려 제 형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서채율을 차갑게 응시했다.

"서채율 씨."

수사관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가며 품에서 체포영장을 꺼내 들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사기, 위작 유통 혐의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이거 놓으세요!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권도진 대표님께 연락해! 당장!"

채율이 발악하며 수사관들의 손치검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은색 수갑은 차갑고 단단하게 그녀의 자유를 구속했다. 찰칵, 하는 쇠붙이 소리가 갤러리 내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도진 형님이라면 지금 검찰청에서 소환 조사를 받는 중일 텐데."

태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의 입꼬리에 비열하면서도 우아한 호선이 그려졌다.

"도원 실업의 500억 차명 비자금 계좌가 방금 터졌거든. 네가 열심히 세탁해 준 그 계좌 말이야. 형님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너 같은 말단 하수인 따위는 가장 먼저 잘라내겠지."

"권태준……! 너, 너희 부부가 날 짠 거야! 날 죽이려고……!"

서채율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다. 그녀가 흘린 눈물과 마스카라가 범벅이 된 얼굴은 더 이상 화려한 사교계의 꽃이 아니었다. 그저 추악한 범죄자에 불과했다.

주변의 시선들이 이제 태준과 서우를 향해 쏟아졌다. 승리자의 오만함을 기대하는 대중의 눈초리였다.

하지만 서우는 더 이상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

긴장이 풀린 순간, 온몸을 지배하던 극단의 냉기가 심장을 향해 덮쳐왔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마비가 허벅지를 지나 척추를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숨이 턱 막혔다.

서우의 몸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한서우!"

태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명을 뚫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닥에 닿기 직전, 단단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팔이 서우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얼어붙은 얇은 드레스 자락을 뚫고 피부로 스며들었다. 태준의 넓은 품이 서우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짙은 체취와 심장 박동이 서우의 귓가에 다이렉트로 내리꽂혔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진짜……."

태준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과 집착이 서려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과 사교계 인물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을 향해 폭포수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광원 속에서, 태준은 서우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팍에 묻어 가리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터질 듯한 열기가 서우의 차가운 뺨을 타고 흐르며 얼어붙은 혈류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우의 마비된 이성은 여전히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이 온기는... 얼마짜리 거래지?'

태준은 그녀를 품에 더 단단히 밀착시키며, 귀를 찌르는 플래시 세례 속을 뚫고 거침없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서우의 귓가에 닿을 듯이 낮게 속삭였다.

"내 허락 없이 쓰러지지 마, 한서우. 네 장부에 내 가치는 아직 계산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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