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문서의 잠금장치를 해제한 순간, 등 뒤에서 서재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어둠 속에서 권태준이 한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적을 깨뜨리는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서재 안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태준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특유의 짙은 우드 향과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체온이 좁은 틈새를 타고 서우의 귓가를 스쳤다. 서우는 서랍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은 도원 신탁 자금 비밀 문서를 쥔 손끝에 힘을 주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마치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얼음물 같았다.

"거기서 뭐 하지, 부인?"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포식자가 먹잇감의 막다른 길을 확인했을 때 흘려보내는 특유의 음산한 저음이었다.

서우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웅웅거렸지만, 그녀는 가상의 주판알을 튕기며 숫자를 정렬했다. 1, 2, 3. 숫자가 맞춰지자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순식간에 차가운 계산식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첫 번째로, 태준의 단단하게 다물린 턱끝에 시선이 닿았다. 두 번째로,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을 지나 마침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그의 짙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서우는 입꼬리를 유려하게 끌어올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비즈니스 파트너의 서재가 생각보다 허술해서 구경 중이었어요. 보안에 비용을 더 투자하셔야겠는데, 권태준 씨."

서우는 태연하게 잠금장치가 풀린 서랍을 툭 차서 닫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밀문서는 다시 어둠 속으로 매립되었다. 태준은 그녀의 가벼운 움직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동자로 쫓았다. 그의 시선이 서우의 뺨을 거쳐 굳게 닫힌 서랍으로, 그리고 다시 서우의 차분한 눈동자로 돌아왔다.

"허술한 게 아니라, 열어준 거라고 했을 텐데."

태준이 서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가섰다. 그의 넓은 어깨가 서재의 은은한 스탠드 불빛을 가로막자, 순간적으로 서우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진짜 부부가 되어 결합하는 것. 내 제안에 대한 손익 계산서는 청구해 봤나?"

"아쉽게도 제 장부에는 '영혼의 결합' 같은 무형 자산은 취급하지 않아서요. 가치가 모호한 것에는 투자하지 않는 게 제 철칙입니다."

"가치가 모호하다라."

태준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우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서랍장을 짚었다. 서우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는 형국이었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열기가 서우의 차가운 볼을 데웠다.

"그럼 내 몸에서 나오는 이 온기는 어떤가? 이것도 가치가 모호한 무형 자산인가?"

그의 손가락 끝이 서우의 턱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찰나의 접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우의 얼어붙어가던 혈류가 요동치며 뜨거운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서우는 침을 삼키며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기는 일시적인 대여 자산일 뿐이죠. 계약 기간이 끝나면 반환해야 할 소모품에 불과해요. 착각하지 마세요, 권태준 씨. 전 당신의 제국을 원하지만, 당신이라는 리스크까지 떠안을 생각은 없으니까."

서우는 태준의 팔 아래를 기민하게 빠져나가 서재 문을 열었다. 복도의 환한 불빛이 어두운 서재 안으로 들이쳤다. 문가에 선 서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신탁 자금의 열쇠가 무엇이든, 난 내 방식대로 손에 넣을 겁니다. 당신에게 구걸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 태준은 어둠 속에 서서 서우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에는 여전히 그녀의 차가운 살결이 남긴 잔상이 맴돌고 있었다.

'구걸하지 않겠다라.'

태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잔인하게 휘어졌다.

"두고 보지. 네 그 오만한 계산기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

사흘 뒤, 성북동의 한 최고급 갤러리.

도원 가문의 후원으로 개최된 '사교계 자선 바자회'는 대한민국 상위 0.1%의 여주인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이자,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전시장 안은 명품 향수 냄새와 보석의 광채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이면의 공기는 비릿한 암투로 진동하고 있었다.

"어머, 태산 파이낸셜의 한서우 씨 아니신가?"

인조 대리석으로 마감된 갤러리 로비 중앙.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걸친 중년 부인들이 부채를 살랑이며 서우를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 중심에는 도원 가문의 비호를 한 몸에 받으며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서채율이 있었다.

채율은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샤넬 트위드 원피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서우에게 다가왔다.

"서우 언니, 오셨네요? 연락도 없이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태산이 요즘 많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이런 격조 높은 자선 바자회에 기부할 여유가 있으실 줄은 몰랐거든요."

채율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가시는 치명적이었다. 주위의 부인들이 일제히 입을 가리며 쿡쿡 웃어댔다.

서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채율을 응시했다. 첫 번째로, 채율의 가식적으로 휘어진 눈매를 보았다. 두 번째로, 그녀의 목에 걸린 도원 그룹 소유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훑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채율의 머리 위로 '인간 손익 계산안'의 장부를 띄웠다.

[ 대상: 서채율 ] - 보유 자산(명하 아트재단 위작 횡령액): 30,000,000,000원 - 한서우를 향한 호감도: -10,000,000,000원 (적대감 극대화) - 이용 가치: 20,000,000,000원 (약점 노출 상태)

장부가 시각화되는 순간, 서우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이명이 스쳤다. 관자놀이가 지욱지욱 아파왔고,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태산의 재정 상태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서채율 씨가 신경 쓸 영역은 아닌 것 같네요. 본인이 운영하는 명하 아트재단의 세무 회계나 더 꼼꼼히 살피는 게 어때요? 장부에 구멍이 아주 크게 뚫려 있던데."

채율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300억 원 규모의 위작 거래와 횡령 내역을 서우가 알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우의 확신에 찬 눈빛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채율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비스듬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니도 참,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우리 재단은 매년 투명하게 감사를 받고 있답니다. 그것보다…… 오늘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손님이 오셨는데, 언니한테 꼭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채율이 손짓을 하자, 갤러리 한편에서 도원 그룹의 또 다른 적대자, 권도진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서류 가방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한서우, 오랜만이군. 권태준의 그늘 아래 숨어 있으면 안전할 줄 알았나?"

도진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머리 위로도 실시간 장부가 활성화되었다.

[ 대상: 권도진 ] - 보유 자산(도원 실업 차명 비자금 계좌): 50,000,000,000원 🔴 (회수 가능 약점) - 한서우를 향한 호감도: -50,000,000,000원 - 이용 가치: 50,000,000,000원

서우의 눈바람 같은 차가운 눈빛이 도진의 얼굴에 가닿았다. 능력을 중첩해서 사용하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빙결 증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한기가 폐부를 찔렀다. 서우는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꽉 움켜잡으며 체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권도진 씨. 여긴 사교계 부인들의 자선 행사입니다. 격에 맞지 않는 분이 왜 여기 계시죠?"

"격? 하! 격을 논하기에는 네 가문의 죄질이 너무 더러운데 말이야."

도진이 소리치자, 바자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 사람에게 쏠렸다. 클래식 음악마저 멈추고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채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서가 가져온 서류 뭉치가 테이블 위에 털썩 내려앉았다.

"이게 뭔지 다들 보셔야 해요."

채율이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태산 파이낸셜의 전 대표이자 한서우 씨의 부친이신 한 회장님이, 과거 사기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증거 서류예요. 여기 적힌 채무 액수만 해도 수천억 원에 달하죠. 이런 범죄자 가문의 딸이 도원 그룹의 이름을 더럽히며 우리 사교계에 발을 붙이고 있다니, 정말 소름 돋지 않나요?"

채율이 들어 올린 서류에는 태산 파이낸셜의 직인이 찍힌 허위 부채 채무 증서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권도진과 서채율이 서우를 사교계에서 완벽히 고립시키고 매장하기 위해 위조한 정체불명의 허위 문서였다.

주변의 부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정말이야?" "사기꾼 집안이었어? 어쩐지 몰락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도원 가문의 권태준 본부장도 속은 거 아냐? 불쌍해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멸시의 시선들. 칼날 같은 속삭임들이 서우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흘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서우는 달랐다.

그녀는 오히려 차갑게 웃었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비웃음으로 가득 찬 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첫 번째로, 수군거리는 부인들의 탐욕스러운 입술을 보았다. 두 번째로, 승전고를 울린 듯 기세등등한 서채율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녀는 가상의 주판을 강하게 튕겼다.

[ 판독 결과 ] - 주변 인물들의 한서우를 향한 호감도 평균: 0원. - 가치 평가: 무가치(無價値). 대꾸할 가치조차 없음.

"0원짜리들의 수다치고는 제법 시끄럽군요."

서우의 맑고 서늘한 목소리가 갤러리 내부에 찌르듯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채율은 서우의 당당한 태도에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한서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이 증거를 보고도 그런 뻔뻔한 소리가 나와?"

"증거?"

서우가 테이블 위의 위조서류를 손가락 끝으로 툭 쳤다.

"권도진 씨. 그리고 서채율 씨. 위조서류를 만들려면 적어도 태산의 진짜 직인 모양 정도는 확인하고 만드셨어야죠. 10년 전 우리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직인은 모서리에 미세한 균열이 있어서 찍힐 때 오른쪽 상단이 흐리게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 찍힌 직인은 아주 완벽하게 대칭이군요. 위조치고는 아주 조잡한 수준이에요."

"뭐, 뭐라고?"

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서우는 멈추지 않고 도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가 내뿜는 서리가 갤러리 바닥을 얼려버릴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권도진 씨. 남의 가문 부채를 걱정할 시간에, 본인 계좌나 걱정하시는 게 어떨까요?"

서우는 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2화에서 도진을 스캔했을 때 확보해 둔, 권도진이 관리하는 도원 실업의 차명 비자금 계좌 정보였다. 장부 가치 무려 500억 원에 달하는, 권도진의 목줄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

"도원 실업의 스위스 차명 계좌. 계좌 번호 482-XX-XXXX. 명의자는 권도진 씨의 외가 친척인 이만수 씨로 되어 있더군요. 잔고 500억 원. 이 돈이 태산 파이낸셜의 몰락 과정에서 흘러 들어간 도원의 비자금이라는 걸, 지금 당장 국세청과 언론에 송출해 드릴까요?"

"너, 네가 그걸 어떻게……!"

도진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서우를 몰아세우던 부인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도진에게로 향했다. 500억 원의 비자금이라는 단어는 사교계에서도 핵폭탄급 스캔들이었다.

"서채율 씨도 마찬가지예요."

서우가 고개를 돌려 채율을 쏘아보았다.

"명하 아트재단에서 유통된 위작 3점의 감정서 위조 내역.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300억 원의 비자금 세탁 경로. 그것도 이 USB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대형 스크린에 띄워드릴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채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녀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떨어뜨릴 뻔하며 비틀거렸다.

"이, 이건 모함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모함인지 아닌지는 사법기관이 판단하겠죠."

서우는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을 흠집 내려 악을 쓰던 무리들을 단 한마디로 침묵시킨 완벽한 반격이었다. 주위의 부인들은 이제 서우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아윽……!'

서우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며 멈추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500억 원과 300억 원, 대규모의 장부를 동시에 활성화하고 억지로 능력을 유지한 대가였다.

머릿속에서 귀를 찢을 듯한 고주파의 이명이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시야가 흐려지며 갤러리의 화려한 조명들이 일그러진 빛의 파편으로 변해갔다.

급격한 체온 하강이 시작되었다.

단순히 추위를 느끼는 수준이 아니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얼음 송곳이 돋아나 혈관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었다. 서우의 입술이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서우……? 너 얼굴색이 왜 그래?"

채율이 서우의 이상 상태를 눈치채고 한 걸음 다가서려 했다.

"오지 마."

서우는 이빨을 악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을 짚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테이블 유리에 닿은 서우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투명한 서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유리 표면에 하얀 성에가 끼며 얼어붙어 가는 광경이 서우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체온이 위험 수위 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심정지가 올 것이 분명했다.

'권태준…….'

서우는 본능적으로 그를 갈망했다. 그녀의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이, 오직 그 남자의 뜨거운 온기만을 원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는 없었다.

서우의 손가락 끝에 맺힌 서리가 점차 손등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바로 그때, 갤러리의 육중한 입구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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