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물의 표식을 알아본 셀레나 황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황궁의 반역자가…… 이곳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녀는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천천히 내 발치 아래로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드높은 자존심이자 황실의 핏줄인 그녀가, 먼지가 뽀얗게 앉은 다락방 바닥에 기꺼이 이마를 조아리는 광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등 뒤에 도란도란 모여 있던 황실 기사들 역시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감히 황녀의 행동을 제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니, 황녀 전하? 거기서 왜 무릎을 꿇으시는 겁니까?'
내 속마음은 이미 비명을 지르다 못해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의 시너지 효과는 참으로 끔찍했다. 뇌 속의 뉴런들이 미친 듯이 경고등을 울려대자, 내 얼굴 근육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턱 끝이 굳어지고, 동공은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았다. 밀려오는 긴장감 때문에 목구멍이 좁아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내 의도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오만하고 냉소적인 저음이었다.
"황실의 썩은 뿌리가 여기까지 뻗쳤는데, 내 방 안의 먼지만 털어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을 꿇은 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의 뜻은 아주 단순했다. '당신네 황실 내부의 권력 암투로 탄생한 살수가 내 방까지 쳐들어와 귀찮게 굴었으니, 제발 당신들 집안 싸움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내 눈앞에서 꺼져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축객령이었다. 제발 나를 이 귀찮은 음모론에서 제외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셀레나의 귀에는 이 말이 전혀 다르게 번역되어 꽂힌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가, 이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는지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썩은 가지는, 기둥째로 도려내야 마당하겠지요."
그녀가 내 말을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경외를 넘어선 맹목적인 확신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아드리안 레온하르트라는 인물이 그린 거대한 제국 정화의 청사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드리안 공자는 이미 황실 내부에 암약하는 반역 세력의 실체와, 그들이 레온하르트 가문의 데미안과 결탁하여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전부 꿰뚫어 보고 계시는 거다. 그리고 내게 직접 칼자루를 쥐여주며, 황실의 썩은 뿌리를 도려낼 명분과 기회를 제공하신 것이 틀림없어!'
셀레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핏기가 배어 나올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공자의 깊은 뜻을…… 이제야 어리석은 제가 온전히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비록 무릎을 꿇었던 처지였으나, 일어선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열적이고 매서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비소-9의 출처를 역추적하여, 황실 내부에서 이 독물을 유출한 배후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지옥으로 보내버리겠습니다. 그것이 공자께서 제게 보여주신 '길'이자, 제국이 나아가야 할 정화의 시작이겠지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제발 빨리 꺼져주기만 한다면 지옥으로 보내든 천국으로 보내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셀레나는 내 짤막한 대답을 깊은 신뢰의 증표로 받아들인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공자의 혜안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가시지요."
그녀가 몸을 돌려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벽에 박혀 있던 단도를 조심스럽게 수거한 기사들이 썰물처럼 다락방을 빠져나갔다. 카이저 역시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스승님, 저도 황녀 전하의 뒤를 보좌하여 썩은 무리들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라며 우렁차게 소리치고는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고, 마침내 다락방에 적막이 찾아왔다.
"허어어어……."
나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가슴 안쪽에서 기혈이 뒤틀리며 웅얼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쿨럭! 록……!"
입가를 훔치자 붉은 선혈이 묻어났다. 시한부의 몸뚱어리는 참으로 정직하게도 조금만 무리를 하면 즉각 반동을 보내왔다. 나는 머리맡에 놓인 약탕기를 더듬거려 찾았다. 쓰디쓴 한방 약초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지금은 이 지독한 쓴맛만이 내 생명을 유지해 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
같은 시각. 벨하르트 아카데미의 지하 깊은 곳.
마법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밀실 속에서, 학구적이고 온화한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베르무트 베인이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정교하게 설계된 마법 진과, 그 중심에 놓인 유리 실린더가 있었다. 실린더 내부에는 검붉은 점액질과 함께 기묘하게 일렁이는 초록색 마력 잔재가 담겨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베르무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실린더 표면을 건드릴 때마다, 푸른색 마력 불꽃이 튀며 기분 나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가 들고 있는 물질은, 며칠 전 아카데미 북동쪽 탑 꼭대기에서 아래쪽 레일라인으로 툭 던져진 '쓰레기 약탕 찌꺼기'였다.
그저 맛이 너무 써서, 그리고 방 안을 어지럽히는 쓰레기를 처분하기 위해 아드리안이 창밖으로 무심히 던져버렸던 바로 그 한방 약탕 찌꺼기 말이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연일 리가 없어. 완벽한 계산이다. 이 마력 인자의 배열을 봐라……."
베르무트는 광기에 젖은 눈으로 실린더의 성분 분석표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이끄는 마신 숭배 파벌은 아카데미 지하에 봉인된 마신의 심장을 깨우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정교한 강림 술식 레일라인을 구축해 왔다. 그 레일라인의 교차점이자 가장 취약한 급소가 바로 북동쪽 탑 아래의 지하 균열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정확한 좌표 위에 '독특한 마력 인자가 잔존하는 특수 약탕 찌꺼기'가 정확히 투척된 것이다.
"단순히 레일라인을 방해한 수준이 아니야. 이 약탕에 잔존하는 기묘한 한방 성분들은…… 마신의 강림 술식이 뿜어내는 음의 마나를 완벽하게 상쇄하고, 오히려 술식의 나침반을 정반대로 비틀어버리는 안티-마나 촉매 역할을 하고 있어!"
베르무트는 이마를 책상에 쾅 박았다. 거친 숨소리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100%다. 우리의 술식이 돌아가는 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카운터치기 위해 일부러 '쓰레기 찌꺼기'의 형태를 빌려 던져놓은 거야.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그 괴물은 이미 우리의 정체뿐만 아니라, 지하에 숨겨둔 최종 계획의 경로까지 전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비웃고 있었던 거라고!"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드리안이 지닌 '심측의 기록서'의 위력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으나, 베르무트는 이미 아드리안을 세계의 인과를 조율하는 초월적 흑막으로 격상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들이 수십 년간 극비리에 준비한 소환 경로를,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약탕 찌꺼기 하나로 마비시킬 수 있단 말인가?
"베르무트 님! 큰일났습니다!"
그때, 밀실의 철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검은 로브를 쓴 수하가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더 크게 소란 피우지 마라!"
"황성 내부에서…… 셀레나 황녀가 움직였습니다! 황실 비고의 극독인 '비소-9'가 유출되었다는 명분으로, 황실 직속 기사단이 아카데미 인근과 황성 내부의 우리 조력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뭐라고?!"
베르무트의 동공이 충격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비소-9. 그것은 레온하르트 가문의 데미안이 아드리안을 암살하기 위해 보낸 자객이 소지했던 독물이었다. 베르무트 역시 그 독물의 존재와 유출 경로를 간접적으로 돕고 있었기에, 황녀의 이번 군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직감했다.
"아드리안의 선제공격이다……."
베르무트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노린 자객의 독물을 빌미로 황녀를 움직여, 황실 내부에 숨겨둔 우리의 발톱들을 단숨에 잘라내려는 거야. 약탕 찌꺼기로 우리의 지하 술식을 묶어두고, 지상에서는 황녀의 칼을 빌려 목을 조여온다……."
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고 잔혹한 계획인가.
아드리안 레온하르트는 바벨의 다락방에 가만히 앉아 피를 토하면서도, 손가락 하나만 까딱여 마신 숭배자들의 숨통을 끊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카데미 지하에 있는 우리 본거지까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 괴물이 직접 움직이기 전에…… 먼저 흔적을 지워야 해."
베르무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수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즉시 지하기지의 모든 장비와 연구 자료를 챙겨 철수한다. 야간을 틈타 흔적도 없이 사라져라. 아드리안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황성 정화에 쏠려 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하, 하지만 마신의 심장은 어찌합니까? 소환 의식이 코앞인데……."
"바보 같은 소리! 그 괴물이 쳐놓은 덫에 걸려 전멸하는 것보다 후퇴하는 게 먼저다! 심장은 봉인해 두고, 일단 몸을 피해 다음 기회를 노린다! 당장 움직여라!"
"예, 알겠습니다!"
수하가 급히 물러나자, 베르무트는 실린더 속 초록색 약탕 찌꺼기를 바라보며 이가 갈리는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이번엔 너의 완벽한 지략에 무릎을 꿇지만, 다음에도 과연 그 오만한 여유를 유지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그는 스스로가 대단한 지략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고 믿으며,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
다음 날 밤. 바벨의 다락방.
"콜록, 으으…… 약이 왜 이렇게 줄어들지 않지."
나는 침대에 기대어 놋쇠 그릇에 담긴 까만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새로 달인 한방 약이었지만, 여전히 혀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한 맛이었다. 어제 방 밖으로 대충 던져버렸던 약탕 찌꺼기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듯해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때, 다락방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단정한 은발을 늘어뜨린 채, 안경 너머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크로이츠 상회의 후계자이자, 내 금융 장부의 비밀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철저한 계산기, 엘리시아 크로이츠였다.
그녀는 내 발치로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밤늦게 실례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엘리시아. 이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낯선 사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긴장감이 치솟아,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오만하고 경멸적인 톤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런 내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깊은 존경심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자님의 그 놀라운 통찰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시치미를 떼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시아는 품속에서 정교하게 작성된 정보 보고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아카데미 지하 깊은 곳에서 암약하던 정체불명의 마법 세력…… 그들이 어제 야간을 틈타 자신들의 흔적을 완벽히 지우고 지하 기지에서 황급히 철수했습니다. 마법 도구와 귀중한 연구 자료들까지 전부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도망쳤더군요."
'어? 걔네가 왜 도망가?'
내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카데미 지하에 마법 세력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그들이 왜 갑자기 야간 도주를 감행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