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잉크가 한 철도 지나지 않아 기화한다는 것을, 귀하의 부친이 아신다면 어떨지."
그 한마디가 바벨의 다락방에 떨어지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엘리시아 크로이츠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대륙 최대 상회의 후계자답게 오만하고 싸늘한 미소를 유지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종이 가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호위 기사들이 서늘한 살기를 뿜으며 검자루를 쥐었으나, 정작 엘리시아 본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대륙의 경제를 지배하는 마법 화폐 '리브라 시길'의 치명적인 제조 결함을. 그리고 그 비밀이 세상에 폭로되는 순간, 크로이츠 가문이 쌓아 올린 황금의 제국이 단 하루 만에 모래성처럼 주저앉으리라는 사실을.
'와, 진짜 통하네.'
속으로는 십 년 감수했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극심한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는 내 심장을 터뜨릴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하자 내 안면 근육은 아예 감각을 잃고 차갑게 굳어 버렸다. 덕분에 겉보기에는 세상 모든 진리를 통찰하고 비웃는 심연의 지배자처럼 보일 터였다.
게다가 방금 전, 크로이츠 상회의 약점을 파고들기 위해 내 영혼의 서책인 '심측의 기록서'를 아주 미세하게 개방한 대가는 뼈아팠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혈이 짓겨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수명이 실시간으로 갉아 먹히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금 나는 말 그대로 죽기 직전이었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이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횡사할 판국이었다.
"……그걸, 어떻게."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얇게 갈라졌다. 그녀는 억지로 평정심을 가장하려 애쓰며 내 눈을 마주 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피 묻은 실크 손수건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붉게 물든 비단이 양가죽 문서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질문의 번지수가 틀렸군, 엘리시아 영애."
내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잔인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긴장 때문에 목구멍이 좁아져 억지로 짜낸 목소리였는데, 상대의 귀에는 그저 오만방자한 확신범의 선언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내가 이 사실을 언제, 누구에게 전할지가 중요합니까?"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엘리시아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검을 반쯤 뽑아 들었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다락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무례하다. 검을 거둬라."
엘리시아가 다급하게 기사를 제지했다. 그녀의 이마에 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치마폭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복잡한 계산기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황금의 원탁마저 뒤에서 조율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레온하르트 가문의 버려진 서자.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요양이나 하는 병약한 쓰레기인 줄 알았더니, 가문의 가장 은밀한 심장부에 비수를 들이밀고 있는 괴물.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사소한 위조 직인 따위는 미끼로 던져 두고 크로이츠 상회 전체의 숨통을 쥐기 위해 판을 짠 거대한 흑막이었다.
사실은 그냥 오늘 내일 하는 시한부 환자일 뿐인데.
'아, 진짜 가슴 찢어지게 아프네. 숨을 못 쉬겠다.'
폐포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시 한번 뜨거운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거래고 뭐고 간에 내가 먼저 객사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억눌렀다.
지금 필요한 건 당장 내 다 죽어가는 혈맥을 인공호흡 해 줄 극상의 영약이었다.
나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협탁을 가리켰다.
내 의도는 단순했다. '나 진짜 아프니까 거기 있는 약탕기 좀 주든가, 아니면 내가 누울 수 있게 비켜라'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시선은 협탁이 아니라, 그 아래에 놓여 있던 빈 상자로 향했다.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대가가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유추해 낸 모양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엘리시아가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탁 풀렸다.
"당신 같은 분이 고작 수만 골드의 푼돈에 움직일 리가 없지요. 애초에 당신이 원한 것은 우리 상회가 보유한 '진짜 가치'였던 겁니다."
'아니, 난 그냥 누워서 쉬고 싶다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내 굳어 버린 얼굴은 여전히 오만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품 안에서 극도로 정교하게 세공된 은제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표면에는 성황청의 신성한 문양이 정밀하게 음각되어 있었고, 그 틈새로 은은한 금빛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황청에서 오직 크로이츠 상회의 독점권을 보장하기 위해 극비리에 하사한 대사제의 성수(聖水)입니다. 죽어가는 자의 혼백마저 붙잡아 둔다는 기적의 영약이지요."
그녀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투명한 유리병을 내밀었다. 병 안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신비로운 은빛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이것으로…… 거래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아드리안 공자. 우리 상회의 비밀을 덮어 주시는 대가로, 공자의 그 불편한 육신을 치유할 기적을 드리지요."
내 눈앞에 푸르스름한 이능의 텍스트가 떠올랐다.
[아이템: 성황의 성수 (최상급)] [효과: 손상된 기혈을 정화하고 생명력을 대폭 회복함.] [잔여 수명 변동 예측: 복용 시 수명 +30일]
수명 30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장 저 병을 빼앗아 머리에 들이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넙죽 받았다간 공든 탑이 무너진다. 대륙 최고의 장사꾼인 엘리시아 크로이츠를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탐색전은 끝나고 나는 다시 먹잇감으로 전락할 터였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유리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장 심드렁하고 가당치 않다는 듯한 콧방귀를 뀌었다.
"성수라……."
나는 턱을 괴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극심한 빈혈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내 눈빛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고 차갑게 번득였다.
"황실의 개들이나 마시는 찌꺼기 물을 내게 가져오다니. 크로이츠 상회의 안목도 땅에 떨어졌군."
"이, 이것은 평범한 성수가 아닙니다! 대사제가 직접 축복을 내린……!"
"그 축복의 유효 기간이 고작 한 달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내 날카로운 지적에 엘리시아가 숨을 들이켰다.
사실은 심측의 기록서가 알려 준 정보였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성황청 내부의 극비 사실마저 꿰뚫고 있는 전지(全知)의 존재로 느껴졌으리라.
"한 철이면 기화하는 기적의 잉크를 만드는 자들이니, 그 유통 기한조차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낚아챘다.
"하지만…… 귀하의 성의를 보아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주도록 하지. 침묵의 무게는 가볍지 않으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기적의 성수 마개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는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온몸의 혈관을 불태우는 듯한 강렬한 자극을 선사했다. 꼬이고 막혀 있던 기혈이 쩡쩡 금이 가며 뚫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매 순간 나를 괴롭히던 폐부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전신에 활력이 도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시스템: 성황의 성수를 복용하셨습니다.] [혈맥의 저주가 일시적으로 억제됩니다.] [남은 수명: 34일 12시간]
살았다!
겨우 나흘밖에 남지 않았던 시한부 인생이 한 달하고도 나흘로 늘어났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가 치워진 느낌에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저 지루한 유희를 끝마친 귀족의 우아한 한숨처럼 연출했다.
엘리시아는 내가 성수를 그 자리에서 '원샷'하는 모습을 보며 전율하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력의 과포화로 인해 기절하거나 고통에 몸부림쳐야 정상인 고농도의 성수였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운 음료수처럼 마셔 버리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내 무력을 완전히 오판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사람은…… 육체가 약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정도의 마력 폭풍쯤은 우습게 받아내는 괴물 같은 그릇을 지녔을 뿐.'
그녀의 눈빛에 서린 경외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제국 제일의 사기꾼이자 계산기라 불리는 여자 조차 내 정보 우위와 철저한 연출 앞에서는 한 마리 순한 양에 불과했다.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아드리안 공자."
엘리시아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태도는 이제 동등한 거래 상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존망을 쥔 절대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신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크로이츠 상회는 공자의 침묵에 상응하는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연안의 지부를 통해 기별을 주십시오."
"현명한 선택이군."
나는 피 묻은 양가죽 문서를 그녀의 앞으로 밀어 던졌다.
"이 조잡한 종이 쪼가리는 가져가도록 해라. 내 방에 이런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으니."
엘리시아는 황급히 위조 장부를 품에 안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되찾은 듯한 안도의 표정이었다.
그녀가 방을 나서기 위해 뒤를 돌아서려 할 때, 나는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엘리시아의 어깨가 다시 한번 굳었다.
"북동쪽 탑 아래에 쓸데없는 쥐새끼들이 얼씬거리지 않도록 단속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내 요양을 방해하는 소음은 아주 불쾌하니까."
이것은 단순히 며칠 전, 내가 달이고 남은 한방 약탕 찌꺼기를 맛이 없어서 쓰레기통도 아닌 탑 창밖으로 투척했던 일(2화의 기행)을 염두에 둔 경고였다. 하필 그 한약재 냄새가 지독했던 터라 주변에 쥐새끼들이 꼬이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해석은 내 예상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동쪽 탑 아래. 그곳은 마신 숭배의 우두머리이자 아카데미의 또 다른 천재, 베르무트가 은밀하게 마신의 소환 경로를 구축하고 있던 간섭 레일라인의 교차점이었다.
'이미 마신 숭배자들의 움직임까지 전부 파악하고 계셨던 건가? 크로이츠 상회를 압박하는 동시에, 아카데미 지하의 거대한 음모마저 장기판의 말처럼 들여다보고 계시다니……!'
엘리시아는 전율을 느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깊으신 뜻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할 뿐입니다. 공자의 경고를 베르무트 경에게도 '우회적으로' 전달하도록 하지요."
'어? 베르무트가 왜 여기서 나와?'
내 속마음과는 달리, 내 입은 그저 차가운 침묵으로 무언의 긍정을 보낼 뿐이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긍정이자 부정이니까.
엘리시아는 깃털펜을 들어 준비해 온 진짜 계약서에 서명했다. 크로이츠 상회의 영구적인 협조와 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사실상의 자발적 복종 계약서였다.
그녀는 계약서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직전, 아주 나지막하고 은밀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밤, 학회 지하의 태엽 소리가 멈출 것입니다."
문이 닫혔다.
바벨의 다락방에는 오직 나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나는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뺨을 감싸 쥐었다.
"……아니, 잠깐만."
태엽 소리가 왜 멈추는데? 그게 왜 멈추는 건데?!
나 그냥 조용히 온천 영지나 얻어서 은퇴하고 싶을 뿐인데, 대체 오늘 밤 아카데미 지하에서 무슨 대재앙이 터지려는 걸까.
등 뒤로 오싹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