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가 바로 지하지휘관이다! 당장 체포해라!”
바벨의 다락방 문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박살 났다.
종이를 받아 든 셀레나 황녀가 기사들에게 진격을 명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눈을 부릅뜬 데미안이 황실 수사관들을 떼거지로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는, 찻잔을 들고 멍하니 서 있던 내가 있었다.
‘아니, 진짜 제발 좀 꺼져 주면 안 될까?’
속으로는 이미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이복형놈은 대체 목숨이 몇 개나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신의 심장이 뿜어내는 독기에 질려 질질 짜던 놈이, 어디서 저런 시퍼런 황실 근위기사단 놈들을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어서 데려왔단 말인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극심한 대인기피증과 불안 장애가 전신을 난타했다. 숨이 턱 막히고 뺨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내 모습은 완전히 달랐을 터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는 내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한쪽 입꼬리만 비죽이 올린 표정은 마치 사냥감을 구경하는 오만한 포식자의 형상이었다. 긴장할수록 목소리가 오만하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이 몹쓸 결함은 오늘도 어김없이 발동했다.
“지하지휘관이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락방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데미안. 네놈이 드디어 미쳐서 헛소리를 정교하게 늘어놓는 재주라도 배운 모양이군.”
“시치미 떼지 마라, 아드리안!”
데미안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등 뒤에 선 황실 근위기사단장, 빌헬름이 묵직한 대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기사단장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마력 압박이 다락방의 유리창들을 잘게 흔들었다.
“아드리안 레온하르트. 황실 수사권의 이름으로 네놈을 현 시간부로 긴급 체포한다. 순순히 오라를 받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기사단의 시퍼런 칼끝이 일제히 나를 향해 쇄도하듯 겨누어졌다. 숨이 막히는 위기 상황. 당장이라도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뇌는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심측의 기록서.’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더니, 기사단장 빌헬름의 머리 위로 투명한 황금빛 글자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붉은 피 같은 글씨들이 영혼을 갉아먹으며 내 눈앞에 박혔다.
동시에 가슴 뼈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대가였다. 목구멍으로 피가 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억지로 그것을 삼켜 내며 겉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척 눈을 가늘게 떴다.
기록서가 보여 준 정보는 실로 경이로웠다.
[빌헬름 드라코: 황실 근위 3기사단장. 데미안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불법 수사를 자행 중. 뇌물의 실체는 ‘크로이츠 상회’의 채권. 그러나 해당 채권은 제조 결함이 있는 리브라 시길 마법 화폐로 발행되어 가치가 폭락하기 일보 직전. 또한, 데미안의 암살자에게 황실 금고에서 ‘비소-9’을 무단 유출해 준 장본인. 갑옷 안쪽 깃에 아직도 독물의 고유 마킹 성분이 미세하게 잔존함.]
모든 인과의 사슬이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맞춰졌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 비웃음 섞인 실소에 빌헬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이 우스운 거지? 반역죄로 처형대 위에 설 놈이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아깝지.”
나는 한 걸음 천천히 내디뎠다. 기사들이 일제히 긴장하며 검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 검끝을 향해 다가갔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고압적이고 나른했다.
“하지만 내 목숨보다 아까운 건, 네놈들의 그 얄팍한 대가리 속 뇌수란다.”
“뭐라?”
“빌헬름 기사단장. 데미안에게 받아 챙긴 그 두둑한 채권 주머니가 꽤나 든든한 모양이지? 크로이츠 상회의 보증이 찍힌 황금빛 리브라 시길 채권 말이다.”
내 입에서 ‘채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빌헬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시아와 함께 설계했던 경제적 파멸의 톱니바퀴를 이 자리에서 완전히 굴릴 때였다.
“안타깝게도 그 채권들은 전부 휴지조각이 되었는데,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한 모양이군. 특정 제조년도 국산 특수 잉크로 인쇄된 리브라 시길은 마력이 증발하면 소멸하는 결함이 있지. 내가 그 소문을 시장에 유포한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지금 네 품에 든 채권은 그저 글자가 흐려진 백지 쪼가리에 불과할 텐데?”
“그, 그것이 무슨……!”
빌헬름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품 안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나는 빌헬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내 몸에서 풍기는 씁쓸한 약초 냄새와 기묘한 위압감에, 대륙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단장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깟 종이돈 몇 장 때문에 황실 비고의 귀중한 물건에 손을 대다니.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빨라야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데미안이 악을 쓰며 끼어들려 했지만, 나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빌헬름의 갑옷 깃을 가리켰다.
“황실 전용 제한 독물, ‘비소-9’. 제국의 법률상 삼족을 멸하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극독이지. 며칠 전 내 방에 들어온 쥐새끼들이 쓰던 물건인데…… 참 이상하지?”
나는 빌헬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놈의 은빛 갑옷 안쪽 깃에, 그 비소-9의 고유 마킹 성분이 아주 선명하게 묻어 있더군. 황실 비고의 관리자 도장이 찍힌 향기가 여기까지 진동을 해.”
“……!”
빌헬름의 턱관절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다락방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대상의 가장 깊은 치부를 정확한 고유 명사와 성분명으로 저격하는 신의 통찰. 빌헬름의 관점에서 이것은 자신들의 모든 범죄 경로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아, 어떻게 알아낸 거지? 분명 극소량만 유출했을 텐데…… 게다가 채권의 결함까지…….”
빌헬름의 다리가 스르륵 풀렸다. 그가 들고 있던 대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그는 이제 내 앞에 서 있는 청년이 단순한 시한부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자는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니다. 제국의 모든 금융 흐름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며, 황실 내부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전부 내려다보는 무시무시한 괴물.
‘심연의 흑막’ 그 자체였다.
“기, 기사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어서 저놈을 베어버리십시오!”
상황 파악을 못한 데미안이 빌헬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빌헬름의 눈에는 이제 데미안이 자신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이…… 이 미친놈이!”
빌헬름이 돌연 뒤를 돌아 데미안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짝-! 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데미안은 바닥을 뒹굴며 피를 토했다.
“나를 속이고 황실의 반역죄에 가담하게 만들다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빌헬름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줄을 갈아타야 했다. 아드리안의 저 무시무시한 눈빛이 자신을 향해 내려앉는 순간, 목숨을 건질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끌고 가라! 이 자는 황실을 모함하고 가문의 권력을 찬탈하려 한 대역죄인이다! 당장 사슬로 묶어라!”
“예, 예!”
부하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철컥거리는 쇠사슬이 순식간에 데미안의 온몸을 옭아맸다.
“아, 아드리안! 이기주의자 놈! 네놈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무사할 것 같으냐!”
데미안은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악에 바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의 절규는 허공으로 무기력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한때 레온하르트 가문의 위세를 믿고 기고만장하던 후계자는, 그렇게 자신이 고용한 사냥개들의 손에 묶여 처참하게 퇴장했다.
다락방 안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모든 과정을 뒤에서 지켜보던 셀레나 황녀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아드리안 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어.’
셀레나는 전율했다. 적들이 들이닥치기 훨씬 이전부터, 리브라 시길 화폐의 결함을 이용해 데미안의 자금줄을 말려 버리고, 황실 기사단의 부패 성분을 정확히 짚어내어 칼자루를 쥔 적들을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지략이 아니었다. 인과율 자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율하는 신의 영역이었다.
“아드리안 님.”
셀레나가 천천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맹목적인 신뢰와 경외심이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의 그 깊고 어두운 혜안에 다시 한번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제국을 위협하던 썩은 가지들을 이토록 완벽하게 쳐내실 줄이야.”
‘아니, 황녀 전하. 제발 무릎 좀 꿇지 마세요. 나 진짜 무서워 죽겠으니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내 얼굴 근육은 여전히 냉혹한 가면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귀찮은 파리 떼를 치웠을 뿐이다.”
그때였다. 내 시선이 창밖 북동쪽 탑 아래의 레일라인에 닿았다.
생각해 보니 아주 기묘한 우연이 하나 더 있었다. 며칠 전, 한방 약탕이 너무 써서 맛이 더럽게 없다며 북동쪽 탑 꼭대기에서 투척했던 그 특수 약탕 찌꺼기. 독특한 마력 인자가 잔존하는 그 쓰레기가 하필이면 마신 소환용 간섭 레일라인의 교차점에 정확히 떨어졌을 줄이야.
그 사소한 낙하물이 마신의 의식 경로를 완벽히 꼬이게 만들었고, 베르무트 일당은 자신들의 완벽한 계획이 누군가에게 완전히 간파당했다고 착각하여 스스로 계획을 전면 수정하느라 허둥지둥 꼬리를 밟혔다.
그 모든 인과의 시작이 그저 내 입맛이 까다로워서 버린 쓰레기 한 봉지였다는 사실을, 이 방 안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전율하는 셀레나를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드디어 다 끝났나? 이제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를 벗어나서 따뜻한 남부 영지에서 온천이나 하며 쉴 수 있는 건가?’
안락한 은퇴 라이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갑자기 바벨의 다락방 천장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와 먼지 구덩이 사이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검붉은 마력이 번뜩였다.
“크하하하하! 아드리안! 네놈이 내 모든 설계를 망쳐 놓았구나!”
무너진 천장 틈새로 내려앉은 것은, 전신이 검붉은 마수의 가죽과 융합되어 괴물로 진화한 최후의 생존 적수, 베르무트 베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광기에 절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네놈만…… 네놈만 없었어도 마신님의 강림은 완벽했을 터!”
“아드리안 님을 보호하라!”
셀레나가 다급하게 검을 뽑아 들고, 카이저가 검풍을 날리며 장벽을 쳤지만, 광신도의 종말론적 마력 폭주는 상상을 초월했다. 베르무트는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불태우며 영웅 교우들의 장벽을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
파아아앙—!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베르무트가 번개 같은 속도로 내 목덜미를 향해 도약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서린 검붉은 살기가 내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엄마야, 나 진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