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물이 다세대 주택의 외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지저분한 복도에 고인 습기를 흔들었다. 하강인은 외투 깃을 올렸다.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끝이 차가운 철제 문고리에 닿았다. 디지털 도어록은 이미 반쯤 부서진 채 매달려 있었다. 강인은 문을 살짝 밀었다.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안쪽은 어두웠다.

방 안에는 곰팡이 냄새와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강인은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창밖 가로등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주황색 불빛만으로도 시야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 바닥에는 흩어진 일회용 배달 용기들과 옷가지들이 뒹굴었다. 강인은 걸음을 멈췄다. 발끝에 채인 플라스틱 볼펜 세 자루가 보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것들을 주웠다. 책상 모서리에 볼펜 세 자루를 나란히 놓았다. 간격은 정확히 1센티미터였다. 강인은 볼펜들의 끝을 손가락으로 톡, 톡, 톡 세 번 두드려 완벽한 평행을 맞췄다. 호흡이 그제야 차분해졌다.

침대는 방 구석에 있었다. 이불은 바닥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 위에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인 상태였다. 강인은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사망 시간은 대략 세 시간 전으로 추정되었다. 시반은 시체의 하퇴부에 고여 있었고, 각막은 이미 불투명한 막이 덮이기 시작했다. 강인은 시체의 목을 관찰했다. 피부 표면에 깊게 파인 자국이 선명했다. 나일론 끈이 살점을 파고들어 가죽처럼 딱딱해진 안면 울혈을 만들었다. 점상 출혈이 양쪽 안구 결막에 가득했다.형태학적 전형적인 경부 압박 질식사였다.

나일론 끈의 끝부분에 하얀 종이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강인은 핀셋을 꺼내 종이를 집어 올렸다. 가로세로 각각 5센티미터 크기였다. 타자기로 찍어낸 검은색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백색 서재 제1조: 관찰자는 대상의 호흡을 지배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강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은 자신이 12년 전 경찰대 강의에서 배포했던 비공개 논문 '연쇄살인마의 심리적 지배성'의 첫 단락을 비튼 문장이었다. 범인은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는 듯이 시체의 목에 낙인을 찍어놓은 것이다.

머리 뒤쪽에서 둔탁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뇌종양 세포들이 신경을 갉아먹는 감각이었다. 관자놀이가 찢어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강인은 신음 소리를 삼키며 시체의 목에 남은 나일론 끈을 장갑 낀 손으로 움켜쥐었다.

접촉하는 순간, 시야가 뒤틀렸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사라졌다. 방 안의 모든 사물이 격자 형태의 3D 입체 선으로 변환되었다. 벽면과 바닥, 시체의 윤곽이 청색의 디지털 수치들로 채워졌다. 강인의 뇌 속에서 잠자고 있던 '범죄 흔적 기말 장부'가 강제로 가동된 결과였다.

시야 한구석에 붉은색 타이머가 나타났다.

[10:00]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역류했다.

강인의 폐에서 산소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산소 포화도 수치가 허공에 표시되었다.

[98%... 85%... 62%... 40%...]

목구멍이 뜨거웠다. 기도가 조여들며 발생하는 마찰열이 목뼈 안쪽에서부터 타올랐다. 세포가 산소를 잃고 괴사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포화 수치가 강인의 뇌세포에 다이렉트로 주입되었다. 강인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입을 벌려 숨을 쉬려 했으나 허공의 산소는 허파에 닿지 않았다. 피해자의 마지막 10분이 그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허윽..."

목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앞의 수치들이 어지럽게 회전했다.

[기도 내부 온도: 섭씨 41.5도] [경추 가압 수치: 28뉴턴(N)]

그 수치를 보는 순간, 강인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28뉴턴의 압력. 그리고 검지와 중지가 경추 3번과 4번 사이를 누르는 기괴한 압점의 위치. 이 감각은 낯설지 않았다. 강인은 뇌 속 장부의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15년 전의 기록이 눈앞에 떠올랐다. 청량리 미제사건. 붉은 기와집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던 한세희의 시체.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져 있던 손가락 압흔의 물리적 가압 벡터가 현재 피해자의 경추 손상 수치와 완벽히 겹쳐졌다. 그래프가 일치하는 순간, 두 사건을 잇는 붉은색 연결선이 뇌 속 허공에 그어졌다.

그놈이다. 15년 전 세희를 죽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그 살인마의 손길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강인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시뮬레이션 내부의 가상 공간을 응시했다. 피해자의 뒤에 서 있는 범인의 잔상이 보였다. 검은 실루엣이었지만, 그가 움직이는 모든 궤적이 정량 데이터로 장부에 수집되었다.

[범인 보폭: 73cm] [걸음걸이 템포: 분당 85보] [골반 경사각에 따른 예상 신장: 180.2cm]

범인은 피해자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시계추처럼 정확한 템포로 방 안을 걸어 다녔다. 지극히 냉정하고 통제된 움직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타자기로 친 쪽지를 꺼내 피해자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잔여 시간: 01:12]

강인은 범인이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순간의 공기 흐름을 포착했다. 바람의 속도와 방향, 그리고 피해자가 마지막 비명을 지를 때 방 안의 가구들에 반사되어 나간 음파의 궤적이 계산식으로 환산되었다.

[피해자 최종 비명 주파수: 150데시벨(dB)] [음파 반사 각도: 45도, 베란다 방향으로 집중 배출]

그것은 범인이 도주 기로를 확보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둔 시점과 일치했다. 강인은 뇌 속 장부에 모든 수치를 기록했다.

"거기 누구야!"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강한 불빛들이 들이닥쳤다. 시뮬레이션이 깨졌다. 시야가 다시 현실의 주황색 불빛으로 돌아왔다. 강인은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렸다.

손전등 불빛을 비춘 것은 광역수사대 은영채 형사였다. 그녀 뒤로 무장한 형사 세 명이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강인 교수님?"

은영채가 손전등을 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쾌감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퇴임하신 분이 현장 훼손죄로 체포되고 싶으십니까?"

옆에 있던 젊은 형사가 강인의 멱살을 잡으려 다가왔다.

"이 늙은이가 제정신이 아니구만. 수사 방해로 당장 서에 처넣어."

강인은 다가오는 형사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의 먼지 궤적과 베란다 창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경찰들의 수사 수준이 여전히 바닥이군."

강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차가운 금속성 음성이었다.

"뭐라고?"

젊은 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은영채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설명해 보시죠. 법의학적 소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강인은 책상 위에 정렬해 둔 볼펜 세 자루를 가리켰다.

"피해자의 사망 시간은 세 시간 전이다. 범인은 문으로 탈출하지 않았다. 현관 도어록의 파손 상태는 침입 흔적이지 탈출 흔적이 아니다. 범인은 신장 180센티미터, 몸무게 74킬로그램 내외의 남성이다."

형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은영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짐작만으로 수사판을 흔들지 마십시오."

강인은 베란다 창틀을 가리켰다.

"피해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지른 비명은 150데시벨에 달했다. 그 음파의 주파수가 이 방 안의 폐쇄 구조에서 어떻게 반사되었는지 보이나?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던 3초 동안, 음파의 대부분은 외부로 배출되었다. 창틀에 쌓인 미세한 먼지의 이탈 궤적이 북서쪽을 향하고 있지."

그는 은영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범인은 베란다 배수관을 타고 내려갔다. 그 배수관 아래는 북서쪽 골목으로 이어지는 지하 보일러실 입구다. 현재 외부 기온은 섭씨 12도, 하지만 그 지하 보일러실의 습도는 82퍼센트에 달하지. 범인이 흘린 미세한 땀과 체온이 그 습한 공기 속에 아직 잔류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경력을 그쪽으로 배치하지 않으면, 너희는 오늘 밤도 허탕을 치게 된다."

은영채는 할 말을 잃은 듯 강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장 북서쪽 보일러실로 수색조 보내!"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형사들이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은영채는 강인을 한 번 더 쏘아본 뒤, 무전기를 들고 복도로 나섰다.

순간, 강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음 같은 이명이 울렸다.

"아아윽..."

강인은 책상을 붙잡았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었다. '기말 장부'를 가동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었다. 우측 뇌엽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지워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기억의 소멸이었다.

강인의 머릿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빛바랜 것처럼 흐려졌다. 15년 전, 한세희의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그녀가 학사모를 쓰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며 환하게 웃던 모습. 그녀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강인 씨!'

그 맑고 따뜻했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로 변하더니, 이내 완전한 무음으로 화했다. 목소리의 세세한 톤도, 억양도 이제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머릿속 장부에는 증거가 기록되었지만, 그의 영혼에서는 세희의 가장 소중한 조각 하나가 영원히 사라졌다. 강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비릿하게 감돌았다.

그때였다.

열려 있는 현관문 너머, 어두운 복도 끝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무겁고 일정한 템포의 가죽 구두 굽 소리였다. 형사들의 다급한 발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 나쁠 정도로 차분한 리듬이었다. 분당 정확히 85보의 속도였다.

강인의 몸이 굳었다. 범인이 돌아왔다.

강인은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손가락 끝이 주머니 속의 소형 메스를 만졌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지문 위로 퍼졌다.

또각.

발소리가 문앞에서 멈췄다. 문틈 사이로 긴 그림자가 비쳤다. 강인은 호흡을 멈추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손잡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젖은 가죽 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사내는 문지방에 서서 껌을 씹었다. 턱관절이 움직이는 모양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전직 형사 마광두였다.

"냄새 한 번 고약하네."

광두는 방 안을 둘러보지 않고 강인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탁했지만 예리했다.

"야, 대가리 터지기 전에 빨리 불어라. 나 퇴직금 받아서 유흥비 써야 돼."

광두가 강인의 젖은 이마를 보며 혀를 찼다. 강인은 메스를 쥐었던 손을 풀었다.

"방금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나."

강인의 질문은 짧았다. 광두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어떤 미친놈이 우산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더군. 키는 한 180쯤 되어 보였어."

광두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싸인 물건을 꺼냈다. 손수건 표면에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그놈이 비상구 문고리에 걸어두고 간 거다. 네 이름이 적혀 있더군."

광두가 손수건을 펼쳤다. 그 안에는 붉은색 잉크로 쓴 메모지와 작은 구리 열쇠가 들어 있었다.

강인은 열쇠를 응시했다.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들이 세로로 긁혀 있었다. 메모지에는 간결한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십계명은 무너졌다. 다음 방의 열쇠를 받아라.]

머릿속 이명이 다시 강해졌다. 강인은 열쇠를 집어 들려다 손을 멈췄다. 기억의 결손으로 인한 현기증이 뇌간을 흔들었다. 세희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차가운 공허만 맴돌았다.

"너 지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병원부터 가라."

광두가 강인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강인은 밀려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이 열쇠는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다크웹 코드의 물리적 복제본이다."

강인은 열쇠의 홈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그놈은 내가 이 열쇠를 가지고 청량리로 오기를 바라고 있다. 15년 전처럼 말이지."

광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불을 붙이지 않고 다시 넣었다.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 미끼를 물겠다는 건가."

광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강인은 책상 위의 볼펜 세 자루를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정렬했다.

"물어야 낚시가 시작된다."

강인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광두는 한숨을 쉬며 가죽 코트 깃을 세웠다.

"좋다. 네 관짝 뚜껑 닫아줄 때까지만 동행해 주지. 대신 내 몫의 수당은 확실히 챙겨라."

두 사람은 방을 나섰다. 은영채가 이끄는 수색조의 경고음이 건물 아래쪽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그때, 강인의 시선이 복도 끝 창문에 머물렀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로 기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유리창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스마트폰 플래시를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었다. 범인은 아직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강인은 주머니 속 열쇠를 꽉 쥐었다. 열쇠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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