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파 직후, 승리 선언을 움켜쥐는 순간 가동부 동조 반사로 무혁의 우측 팔 경맥이 붉게 터지며 고열의 혈류가 밖으로 산산조각 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피가 닿은 대리석 바닥에서 가죽이 타는 듯한 악취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출혈이 아니었다. 인체의 기(氣)와 기계의 동력을 억지로 동기화한 대가였다. 경맥을 타고 흐르던 내공이 배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역류하여 모세혈관을 통째로 찢어발긴 결과였다.
"크윽……!"
무혁의 이빨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망막 너머로 붉은 수치들이 폭주하듯 명멸했다.
[경고: 초고압 실린더 내 잔류 압력 320psi 돌파.] [경고: 선천 코어 열폭주(Thermal Runaway) 진입.] [신경망 과부하율 94%. 시각 동조율 저하.]
뇌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안구 앞이 순식간에 암전되며 사물의 윤곽이 뭉개졌다. 이대로 두면 휠체어 하부에 장착된 선천 코어가 고열로 폭발해 전신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 압사 혹은 폭사의 위기가 코앞까지 닥쳤다.
무혁은 떨리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굳어가는 손가락을 기하학적인 궤적으로 꺾었다. 사천당가의 기밀 수화가 아니었다. 오직 야금방의 당소소와 자신만이 공유하는 정밀 수치 제어용 수화(手話)였다.
'우측 보조 밸브. 반 바퀴 개방. 즉시.'
연무장 구석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당소소가 무혁의 손짓을 포착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무혁을 향해 돌진했다.
"비켜라! 이 바보가 죽게 생겼단 말이다!"
소소가 집행 무사들의 제지를 뚫고 무혁의 휠체어 뒤편으로 슬라이딩하듯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소형 스패너가 의체 하부의 동합금 밸브를 정확히 타격했다.
깡!
차갑고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밸브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180도 회전했다.
콰아아아아!
의체의 배기구에서 섭씨 백 도가 넘는 고압 증기가 뿜어지며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백색의 증기 장막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급격히 내려앉으며 폭발 직전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무혁은 가까스로 휠체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찢어진 우측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가 차가운 쇳덩이를 적셨다.
"이 무슨 추태냐!"
증기 속에서 당무진의 서슬 퍼런 갈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독기가 넘실거렸다.
"가문의 공적인 연무장에서 사특한 마도(魔道)의 철물을 휘둘러 적통의 무사를 상하게 하고, 이제는 화약과 증기로 가문을 폭파하려 드는구나! 서자 무혁의 죄는 삼족을 멸해도 부족함이 없다!"
당무진이 신형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멈추십시오, 숙부님."
무겁고 묵직한 목소리가 연무장의 공기를 가르며 끼어들었다.
당철옥이었다. 그가 무혁과 당무진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의 등 뒤에 매여 있는 대형 철검이 은은한 검기를 뿜어내며 당무진의 독압을 상쇄시켰다.
"철옥아, 네가 감히 이 서자 놈을 비호하겠다는 말이냐?"
당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호가 아닙니다. 가문의 법도를 논하는 것입니다."
당철옥의 음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고인 수증기와 탄화된 철가루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당가의 무학은 형(形)에 갇히지 않습니다. 암기란 본디 기(氣)를 실어 적을 살상하는 도구. 무혁이 보여준 철물은 가문의 기(氣) 운용 법칙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암기를 연성해 낸 것에 불과합니다. 공학(工學) 또한 당가의 철학이자 무학의 일종입니다."
"궤변이다! 저것은 뼈대를 깎아 만든 잡술일 뿐이다!"
"결투는 정당했습니다. 가문의 무사 고영은 패배했고, 서자 무혁은 자신의 무를 증명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무혁을 죄인으로 단죄하신다면, 사천당가의 결투 율법은 장식에 불과함을 천하에 자인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당철옥의 곧은 성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무혁의 기계 기술이 가문의 전통적인 무덕을 해칠까 우려하면서도, 무인으로서의 공정함과 가문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검을 방패로 삼았다.
장내의 장로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통 천재인 당철옥의 발언은 무게가 달랐다.
"흠…… 철옥이의 말이 일리가 있소."
"비록 서자이나, 저 정도의 화력을 내는 암기 장치를 스스로 고안했다면 그것 역시 당가의 자산이라 볼 수 있지 않겠소?"
장로들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당무진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평의회의 여론이 돌아섰음을 직감한 것이다.
"좋다."
당무진이 짓씹듯 뱉어냈다.
"결투의 승리는 인정하마. 허나, 가문의 허락 없이 위험한 폭발물을 다룬 죄까지 사할 수는 없다. 율법에 따라 이번 승리에 대한 포상과 동시에, 그 책임을 묻겠다."
당무진이 무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서자 무혁에게 가문 외곽의 영지 한 곳의 소유권을 하사하되, 본가의 기술과 자금을 일절 지원받지 못하는 조건으로 유배한다. 무혁, 네놈이 선택해라. 어디로 가겠느냐?"
가문 평의회 서기가 몇 군데의 영지 목록을 읊조렸다. 가문 동쪽의 풍요로운 농경지나 남쪽의 평범한 장원들이었다. 사실상의 추방이었으나,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무혁은 피가 흐르는 우측 어깨를 지혈대로 강하게 동여맸다. 고통으로 인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지만, 그의 연산안은 멈추지 않았다.
[뇌세포 연산 기능 복구율 78%. 가문 지리 데이터베이스 대조 중.] [최적의 동력원 후보지 탐색.]
무혁의 입술이 차갑게 열렸다.
"검은 철 계곡(黑鐵谷)을 주십시오."
장내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무어라? 흑철곡이라고?"
당무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로들도 황당하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흑철곡은 사천당가 영지의 가장 북쪽, 깊은 협곡에 위치한 버려진 쓰레기장이었다. 날카로운 철광석 노두와 독성 광물 폐수가 흘러넘쳐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였다. 매년 가문에서 나오는 야금 폐기물과 불량 철물이 그곳에 버려졌기에, 인근 영지민조차 침을 뱉으며 기피하는 가문의 암덩어리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귀신도 살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다. 정말 그 쓰레기장을 원한다는 말이냐?"
당무진이 비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무혁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곳이 독소 가득한 쓰레기장으로 보이겠지만, 무혁의 연산안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흑철곡은 본가 지하의 거대한 수맥이 급격한 낙차를 이루며 지표면으로 쏟아지는 출구였다. 엄청난 유량과 낙차. 그것은 현대 공학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에 가까운 수압 동력원'을 의미했다. 게다가 사방에 널린 야금 폐기물과 고탄성 폐철들은 기초적인 부품을 주조하기에 최상의 원자재였다.
'그곳이야말로 천공야금성(天空冶金城)의 심장부가 될 것이다.'
"어리석은 놈. 네놈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좋다! 평의회의 이름으로 흑철곡의 영유권을 서자 무혁에게 넘긴다. 당장 본가에서 떠나거라!"
당무진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판결을 내렸다. 당철옥은 무혁의 선택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는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검을 거두었다.
* * *
사흘 뒤. 사천당가 북방, 검은 철 계곡.
쏴아아아아!
협곡 사이로 쏟아지는 거대한 하천의 물줄기가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방은 검붉은 철광석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유황 냄새가 섞여 인도(人道)를 거부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치이익.
무혁이 탄 임시 수리 휠체어가 증기를 내뿜으며 계곡의 수밀 하천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찢어진 경맥의 통증은 여전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혁아…… 진짜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야? 여긴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동행한 당소소가 코를 찌르는 유황 가스에 기침을 하며 투덜댔다. 그녀의 등 뒤에는 야금용 도구들이 가득 든 괴나리봇짐이 얹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무혁이 휠체어의 스팀 밸브를 수동으로 개방했다. 휠체어 바퀴에 장착된 동합금 기어들이 맞물려 돌며 둔탁한 회전음을 냈다.
"가장 완벽한 동력과 원자재가 널려 있다."
계곡 주변에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하층 영지민들과 야금 노예 수십 명이 초라한 가마를 피워놓고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본가에서 쫓겨난 하반신 마비의 서자가 영주랍시고 나타나자, 불신과 체념이 가득한 눈빛으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무혁은 그들 앞으로 휠체어를 몰아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자의 비굴함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오직 공장을 지배하는 최고 설계자의 오만함과 확신만이 가득했다.
"듣거라."
무혁의 건조한 목소리가 계곡의 물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오늘부로 이 계곡의 지배자는 나다. 너희가 지금까지 알던 폐기물 구덩이는 사라진다. 이곳은 천하에서 가장 정밀한 철과 증기의 요새, 천공야금성(天空冶金城)이 될 것이다."
영지민들이 웅성거렸다. 미친놈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무혁의 손끝이 허공을 가르며 구체적인 수치를 지시하자, 그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가마를 지키는 야금노들. 가마의 온도를 섭씨 천이백 도까지 올려라. 송풍구의 각도를 15도 위로 꺾고, 석탄 배합비를 삼 대 일로 조정해라. 탄소 함유량을 조절해야 한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시대로 해라. 오차가 0.01밀리미터라도 발생하면 오늘 저녁은 없다."
무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와 수학적 정밀함에 압도된 영지민들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로 방치되어 있던 고탄성 합금 폐 자재들이 분류되고, 수밀 하천의 물줄기를 막을 목재 제방의 위치가 잡히기 시작했다.
격상의 전조였다. 가문의 가장 천대받던 쓰레기장이, 무혁의 지휘 아래 거대한 대량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첫 삽이 떠지는 순간이었다.
무혁은 휠체어 바퀴를 굴려 하천 중앙의 암반으로 향했다.
"소소. 동력 전달용 구리 배선과 수력 터빈의 기초 프레임을 준비해라. 오늘 안으로 1단계 기초 배선 작업을 끝낸다."
"어, 어어! 알았어!"
소소가 무혁의 카리스마에 홀린 듯 망치를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주변 기류 파형의 비정상적 왜곡 감지.] [풍수 수맥 제어 진기의 간섭 발생. 주파수 대역 분석 중…….]
무혁의 연산안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졌다. 사방의 기류 측정 망이 강한 에너지 장벽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었다.
우드드득! 쿠구구구!
계곡 변각 지점에 서 있던 수백 년 된 거대한 침엽수들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소리 없이 베어져 나갔다. 단순한 벌목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가공할 에너지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사방의 수풀 내부에서 고주파의 금속성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무인의 내공이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기(氣)를 굴절시키고 증폭시키는, 제갈세가 특유의 기하학적 법역(法域)의 진동이었다. 푸른빛의 전자기 장막 무기가 계곡 사방을 포위하듯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