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백호연무장(白虎演武場).

사천당가의 심장부는 침묵에 잠겼다.

전통의 석조 벽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단상 위에는 당무진이 군림하고 있었다. 가문의 주류 평의회를 이끄는 수장. 그의 눈빛은 도려낸 빙판처럼 차가웠다. 좌우로 배석한 열두 명의 장로들 역시 침묵했다. 그들의 시선은 연무장 중앙으로 쏠렸다.

서자 당무혁.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폐철더미에서 조립한 기형적 철륜 의체.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거친 소음이 대리석 바닥을 긁었다.

끼이익.

바퀴가 구를 때마다 쇠비린내가 진하게 풍겼다.

군중 틈에 선 야금사 당소소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무혁의 무모한 도전을 지켜보는 그녀의 미간에 깊은 그늘이 졌다.

당무진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의 곁에 서 있던 검은 음영이 움직였다. 사천당가의 어둠을 담당하는 최정예 자객, 고영이었다.

"가문의 법도는 지엄하다."

당무진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무겁게 울렸다.

"서자 무혁은 괴이한 철물로 가문의 영예를 더럽혔다.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의 명줄을 거두리라."

그가 고영에게 은밀한 전음(傳音)을 보냈다.

- 즉사시켜라. 한 치의 흔적도 남기지 마라.

고영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소리도 없었다. 바람조차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스어억.

고영의 손끝에서 칠흑의 단검 두 자루가 뻗어 나왔다. 무중력 단검술(無重力 單劍術). 신체의 무게를 기로 상쇄하여 마찰을 극단으로 줄이는 살수 무공이다.

그의 신형이 무혁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무혁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정밀 제어 연산안이 개안되었다.

[대상: 고영.] [이동 속도: 초속 14.2미터.] [고도각: 45도.] [예상 타격 지점: 제3 흉추 및 견정혈.]

머릿속에 붉은색 궤적 선이 실시간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고영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기의 흐름을 지운 살수의 궤적은 연산의 한계를 시험했다.

스각!

단검의 칼끝이 무혁의 어깨를 스쳤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칼날에 실린 독문 내력이 무혁의 경맥으로 침투했다.

"컥……!"

무혁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점혈 구획이 차단당하고 있었다. 기맥에 들이닥친 음독이 휠체어 제어 장치로 연결된 기의 통로를 막아섰다.

기계 장치의 실린더가 웅웅거리며 정지하기 시작했다. 압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바퀴가 멈추고, 의체의 서보밸브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덜덜 떨렸다.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고영의 목소리가 무혁의 귓가에서 차갑게 울렸다.

그의 단검이 무혁의 심장을 향해 직선으로 쇄도했다.

기동력은 상실되었다. 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극단의 위기.

무혁의 이가 맞부딪쳤다. 턱끝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차가운 철륜에 떨어졌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휠체어 우측 하단에 위치한 비밀 레버를 움켜쥐었다.

1화에서 장전했던 극압 '선천 코어'.

그것은 가속 제어를 위해 의체 깊숙이 내장한 불안정한 동력원이었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대자연의 기를 고압으로 압축해 둔 구체. 제어하지 못하면 폭발하여 시전자의 육체를 찢어발기는 양날의 검.

"임계점 돌파."

무혁이 레버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고압 밸브가 100% 개방되었다.

콰아아앙!

의체 내부에서 터질 듯한 연소음이 일어났다.

정밀 제어 연산안이 한계를 넘어 폭주하기 시작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신경통이 두개골을 후려쳤다. 안구가 뒤집히며 핏줄이 터졌다.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와 기계의 강제 동조화.

연산안을 매개로 무혁의 의식과 쇠붙이가 하나로 묶였다.

머릿속에 가득 찬 숫자들이 붉게 타올랐다. 의체 내부의 금속 베어링이 고속 회전하며 비명을 질렀다. 경맥이 마모되다 못해 찢어지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뼈가 갈리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무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냉혹했다. 오직 수학적 계산식만이 그의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선천 코어 압력 계수: 120%.] [출력 동기화율: 98.7%.] [에너지 도파관 개방.]

이것은 현대 유압 공학의 '수격 작용(Water Hammer Effect)'과 일맥상통한다. 밀폐된 관로에서 유체의 흐름을 급격히 차단할 때 발생하는 살인적인 충격파. 무혁은 자신의 기맥을 밸브 삼아, 코어의 극압 에너지를 한 점으로 집중시켰다.

"파쇄(破碎)."

무혁의 입술이 열렸다.

그의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두두두둥!

철륜 의체 배기구에서 푸른 백색의 기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고압 압력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퍼어억!

고영의 무중력 단검이 압력파와 충돌했다.

단검이 먼저 뒤틀렸다. 쇠붙이가 견디지 못하고 잘게 조각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 이것은……?!"

고영의 은형 안광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가 펼쳐둔 내공 방막(防膜)이 거대한 압력의 파도에 직면했다. 짓눌리는 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평당 수십 톤의 무게가 전신을 압박하는 감각.

콰아아앙!

압력파가 고영의 흉경을 그대로 관통했다.

그의 독침 주머니가 터졌고, 가슴을 보호하던 경락 방막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났다.

"커헉!"

고영의 신형이 연무장 바닥을 쓸며 수십 보를 굴렀다.

붉은 혈무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고영은 대리석 바닥에 처박힌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사천당가 최정예 자객의 완벽한 패배였다.

연무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장로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소소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기계의 힘이 무인의 극의를 부숴버린 광경. 그것은 상식을 초월한 기적이었다.

당무진의 안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손가락이 의자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무혁은 피물든 얼굴로 당무진을 응시했다.

"끝났다."

무혁이 승리를 선언하려던 순간이었다.

쩌적.

불길한 파열음이 그의 몸 안에서 일어났다.

선천 코어의 과부하된 에너지가 역류했다. 일체형 동조화의 대가였다.

"아으윽……!"

무혁의 우측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가동부의 동조 반사 작용으로 인해 경맥이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피부가 붉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툭툭 터져 나갔다.

치이이익!

고열의 혈류가 살을 찢고 밖으로 산산조각 튀기 시작했다.

무혁의 시야가 급격히 암전되었다. 고통의 나락 속에서, 그의 신형이 휠체어 위로 쓰러지듯 꺾였다.

치이이익!

고열의 피가 비산하며 뜨거운 증기를 뿜어냈다.

철륜 의체의 구동축에 닿은 혈류가 붉은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윽……!"

무혁의 전신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우측 팔의 피부가 종이처럼 찢겨 나가며 백색의 뼈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재료의 한계 변형률(Strain Limit)을 초과한 금속이 응력 집중으로 파괴되듯, 그의 경맥 역시 고압의 기를 견디지 못하고 파열된 것이다. 인체의 유기적 조직이 급격한 물리적 상전이를 버텨내지 못한 결과였다.

눈앞이 빠르게 암전되었다.

연산안의 가동률이 급락하며 시야에 노이즈가 가득 찼다.

[경고: 우완 경맥 파손율 78%.] [경고: 중추신경계 과부하. 시각 인지 능력 상실 단계 진입.]

머릿속을 울리는 기계음 같은 경고가 이명을 타고 흘러들었다.

무혁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어금니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비명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무용한 행위다. 잇몸 사이로 고인 비린 피를 삼키며, 그는 왼손으로 의체의 고정 레버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쿵!

쇠바퀴 측면에서 뻗어 나온 강철 송곳이 대리석 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지대를 확보하지 않으면 척수가 무너진 육체는 바닥으로 고꾸라질 터였다.

"이, 이 무슨 괴력인가……."

배석했던 장로 중 하나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고영은 바닥에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뼈는 함몰되어 있었고, 그가 자랑하던 칠흑의 단검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철 조각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평의회 연무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당무진의 발걸음 소리였다.

벅. 벅.

단상에서 내려오는 그의 신형에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발이 닿는 대리석 바닥이 검푸른 독기로 인해 부식되며 치익 소리를 냈다.

"사술(邪術)이다."

당무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연무장을 때렸다.

"가문의 정통 독공과 무학을 따르지 않고, 외도의 요사스러운 철물로 살수를 해쳤다. 이는 평의회를 기만하고 가문의 기강을 무너뜨린 반역이다!"

궤변이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자의 궤변은 곧 법도가 된다.

당무진의 오른손에 시커먼 독기(毒氣)가 응집되었다. 당가 최고의 독공 중 하나인 만독상천장(萬毒傷天掌)의 기류였다. 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혁의 정수리를 날려버릴 기세로 쇄도했다.

무혁의 연산안은 이미 꺼져 가고 있었다.

어두워진 시야 너머로 다가오는 거대한 에너지의 질량만이 붉은 윤곽으로 흐릿하게 포착될 뿐이었다.

[대응 불가. 회피 확률 0%.]

죽음의 방정식이 머릿속에 완성되는 찰나였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도화색 보검이 당무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쿠우웅!

검기와 독무가 충돌하며 폭발적인 충격파가 일어났다.

당무진의 신형이 반 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철옥아! 네가 감히 나를 가로막는 것이냐!"

검을 비스듬히 쥐고 앞을 막아선 자는 당철옥이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철옥은 무혁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고지식한 신념이 움직인 결과였다.

"숙부님. 가문의 평의회 대련은 지엄한 규칙 아래 이루어집니다."

철옥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서자 무혁은 공식적인 대결마를 꺾었습니다. 살수를 썼든 철물을 썼든, 비무의 승자는 가문의 율법에 따라 그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가의 무덕(武德)입니다."

"무덕이라고 했느냐!"

당무진이 포효했다.

"저놈이 들고나온 괴물 같은 장치를 보아라! 저것이 가문을 망치지 않을 것 같더냐!"

"그것 또한 가문의 힘입니다."

철옥이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만일 이 규칙을 깨뜨리신다면, 평의회의 권위는 오늘부로 바닥에 떨어질 것입니다. 장로님들께서도 이를 보고 계십니다."

좌우에 배석한 장로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공식적인 대련에서 승리한 자를 가주 대리 격인 당무진이 사적으로 처단하는 것은 가문의 기틀을 흔드는 일이었다.

당무진의 눈밑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는 철옥의 검세와 장로들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이대로 강행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좋다."

당무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독기가 거두어졌다.

"목숨만은 살려두마. 그러나 가문의 율법은 공평해야 하는 법."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서자 무혁이 사용한 저 철물은 가문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물로 규정한다. 즉시 압수하여 용해로에 처넣어라."

"……!"

군중 속에 있던 당소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의체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혁에게 다시 기어 다니는 벌레로 돌아가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당무진이 쐐기를 박았다.

"가문의 허락 없이 위험 병기를 연성한 죄를 물어, 서자 무혁을 지하 뇌옥인 철뢰(鐵牢)에 감금한다. 기간은 가주님이 폐관 수련에서 나오실 때까지다."

철뢰.

그곳은 사천당가 본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삭풍과 차가운 지하수가 몰아치는 죽음의 감옥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무인조차 관절이 굳어 폐인이 되어 나오는 곳이었다.

"끌고 가라!"

당무진의 명령과 함께 철갑을 두른 집행 무사들이 무혁을 향해 다가왔다.

바스락.

무혁의 의체에서 톱니바퀴들이 억지로 뜯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반신의 감각은 여전히 없었다. 우측 팔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렀고, 시야는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비참한 패배자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무혁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비틀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뇌세포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 철뢰…….'

그가 남몰래 수집했던 가문의 지리 정보가 머릿속에서 입체 도면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철뢰는 본가의 가장 깊은 계곡 지하에 위치해 있다. 그곳은 거대한 수맥이 통과하는 길목이자, 엄청난 낙차의 수압이 발생하는 천혜의 동력원이다.

무혁이 구상하던 거대한 기지, '천공야금성'의 심장부로 삼기에 가장 완벽한 위치였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보내 주는군.'

집행 무사들의 거친 손길이 무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지하의 어둠 속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닥에 버려진 철륜 의체의 잔해 속에서, 완전히 식지 않은 선천 코어가 기이한 고주파 진동을 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것은 단순한 기계의 소음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맥박처럼, 지하 수맥의 공명과 맞물려 연무장 전체를 미세하게 흔드는 불길한 진동이었다.

당무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 소리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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