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暗電)이 시야를 삼켰다.
우안(右安)의 실명은 기정사실이었다. 이제 좌안마저 핏빛 안개 뒤로 가라앉았다. 가시광선은 소멸했다.
하지만 무혁의 뇌리는 더 선명하게 요동쳤다.
[경맥 마모율: 99.2%] [신경망 연산음파 동기화 완료.]
눈은 멀었으나 이성은 정밀했다. 귀로 스미는 공기의 진동이 수치로 치환되었다.
파고 3.2미터. 주파수 420헤르츠.
성채를 짓누르는 거대한 자력의 흐름이 뇌리에 삼차원 입체 화상으로 그려졌다. 제갈휘가 조율하는 황천천뢰포의 종말 유도 파형이었다.
"방전(放電)하라!"
절벽 위에서 제갈휘의 비정한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황천천뢰포의 포신이 갈라졌다. 푸른 아크 방전이 허공을 찢었다. 요새의 주 철골 기둥을 겨냥한 전자기 자성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대로 두면 천공야금성의 기단은 초고열의 플라스마에 녹아내릴 터였다.
무혁이 의체의 유압 실린더를 비틀었다.
끼이익!
강철 베어링이 공차 제로의 한계에서 비명을 질렀다. 척수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부러진 뼈를 긁었다. 무혁은 고통을 숫자로 환산해 지워 버렸다.
"소소야."
목소리는 쇠가 긁히는 듯 건조했다.
"예, 오라버니! 말씀만 하이소!"
"천정 배기 탑으로 간다. 구리 권선 드럼을 열어라."
"구리 전선예? 그 무겁고 두꺼운 것을요?"
"감아야 한다. 배기 탑 전체를 조밀하게 감아올려라. 오차는 0.05밀리미터 이하다."
당소소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무혁의 멀어 버린 눈동자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보았다. 주먹을 꽉 쥔 소소가 가죽 장갑을 꼈다.
철컥, 철컥.
야금성 천정의 거대한 배기 탑으로 구리 전선이 풀려나갔다.
무혁은 연산안의 한계를 시험했다.
번개는 천벌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의 전자기 유도 전류가 일으키는 고도 과부하 고리일 뿐이다.
도체 주변의 자기장이 급격히 변할 때 전류가 유도된다. 황천천뢰포가 뿜어내는 전기 플라스마 역시 거대한 자력선을 따라 흐르는 도도한 전류의 강물이었다. 그렇다면 길을 만들어 주면 그만이었다.
위이이잉!
그때 머리 위에서 거대한 압박감이 쏟아졌다.
제갈휘가 전개한 대규모 중력 법역이었다. 진법의 안구가 요새 상공에서 붉게 빛나며 야금성의 구조물들을 으스러뜨리려 했다. 철판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무혁은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옥패였다. 제갈세가의 풍수 수맥 제어 진기 배출용 호신패였다. 3화에서 입수한 이 전리품의 내부 파형을, 무혁은 연산안으로 이미 정밀 분석해 둔 상태였다.
"인과를 돌려주지."
무혁이 호신패를 무인 동역학 공명 장치의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철컥!
공명 장치가 회전했다. 호신패 내부의 에너지 굴절식 연산 파형이 역위상(Anti-phase)으로 증폭되었다. 고주파의 진동 음파가 허공으로 사출되었다.
파아아앙!
공기를 가르고 나간 역위상 진동이 상공의 중력 진법 안구와 충돌했다.
파동과 파동이 만나 상쇄되는 이치였다. 붉게 타오르던 제갈세가의 중력 법역이 맥없이 흩어졌다. 허공을 채우던 압박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어, 어찌 이런 일이! 내 진법의 안구가 파쇄되다니!"
저 멀리 절벽 위에서 제갈휘의 경악 섞인 신음이 연산음파에 포착되었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크흑……!"
무혁의 옆에서 무거운 신음이 터졌다.
당철옥이었다. 가문의 적통 천재이자 대장로의 압박 속에서도 무혁을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았던 사내였다. 그의 가슴은 사독대의 만독사무에 침식되어 검게 변해 가고 있었다. 무인의 진원마저 사멸해 가던 참이었다.
철옥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혁의 기계 의체에 기대어 왔다.
"무혁아……."
그의 목소리에는 무인의 마지막 기력이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듣고 있다."
"내 하나만 묻자. 네가 세울 이 강철의 가문에…… 인간의 심의(心意)는 남아있을 수 있느냐? 오직 차가운 톱니바퀴와 숫자로만 채워질 가문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명예를 지켜왔단 말이냐."
철옥의 고뇌는 깊었다. 그것은 전통을 지키려는 자가 기계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마지막 연민이었다.
무혁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철옥이 있는 방향을 지시했다.
"당신의 의지는 숫자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뭐라?"
"이 야금성의 중심 지지대에, 당신의 이름을 새긴 철륜의 영구 합금 명비를 세울 것입니다. 야금성의 터빈이 도는 한, 당신의 심의는 가문의 심장과 함께 고동치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계산식입니다."
철옥의 입가에 핏방울 섞인 엷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놈인 줄 알았더니…… 궤변에는 능하구나."
그 순간, 쿠구구구! 하는 괴음이 지하실에서 치솟았다.
당무진 장로가 파괴해 둔 수력 증기 터빈의 냉각 계통이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초고온의 증기가 배관을 녹이고 있었다. 터빈이 폭발하면 천공야금성 전체가 공중분해 될 위기였다.
"터빈이…… 터빈이 터집니다! 온도가 삼천 도를 넘었습니다!"
소소의 비명이 들렸다.
철옥이 흔들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단호한 결의가 스쳤다.
"선대의 유산이, 이 가문의 심장을 살릴 것이다."
철옥이 품 안에서 백색 도화 부적을 꺼냈다. 사천당가 선대 가주가 남긴, 극음(極陰)의 진원이 보존된 비보였다.
그가 부적을 향해 마지막 남은 내력을 불어넣었다.
스우우우!
백색 도화 부적이 푸른 한기를 뿜어내며 열려 있는 터빈의 냉각 밸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르르릉!
빙결의 진기가 터빈 내부의 초고열 증기와 충돌했다. 폭발적인 기화열의 냉각 반응이 일어났다. 터빈을 붉게 달구던 열기가 순식간에 하얗게 식어 내렸다. 압력 계기판의 바늘이 급격히 추락하며 안정 구역으로 복귀했다.
동력 제동 성공이었다.
철옥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에서 검은 독혈이 울컥 쏟아졌지만, 그의 눈빛은 맑았다.
"이제…… 네 차례다, 서자."
무혁은 대답 대신 기계 의체의 조종간을 당겼다.
"소소야, 냉각된 터빈의 압력 밸브를 최대로 개방해라."
"예! 밸브 전개합니다!"
"기계 요새의 터빈 발전량을 이백 퍼센트(200%)로 정적 가속한다."
쿠우우우웅!
지하 수맥의 수압이 터빈을 맹렬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냉각된 터빈은 한계를 넘어 포효했다. 자가 발전기에서 생산된 막대한 전류가 야금성의 구리 배선망을 타고 천정으로 솟구쳤다.
천정 배기 탑에 감긴 구리 권선들이 전류를 받아들이며 거대한 자장을 형성했다.
위이이이잉!
대기 중에 퍼져 있던 전하들이 배기 탑 끝으로 길을 잡았다.
전자기 유도 현상에 의해, 야금성 상공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도 인력 수렴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제갈휘의 황천천뢰포가 뿜어낼 번개를 포획할 완벽한 덫이었다.
무혁의 연산망에 푸른 자력선의 그물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준비는 끝났다."
무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저 멀리 절벽 위에서 제갈휘가 마침내 황천천뢰포의 최종 트리거를 당겼다.
"사천당가의 잡종들아! 천벌을 받아라!"
콰콰콰콰쾅!
하늘이 뒤집혔다.
눈을 멀게 하는 백색의 번개류 다발이 황천천뢰포의 포신에서 일제히 방출되었다. 수십 갈래의 전자기 플라스마가 천공야금성의 중앙 심장부를 향해 가차 없이 직선으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찢는 백색의 뇌정(雷霆)이 강하했다.
찰나의 순간, 야금성 전체가 백색광에 잠겼다. 대기가 타오르는 백색의 열기로 진동했다.
그러나 뇌정은 심장부를 타격하지 못했다. 천정 배기 탑의 구리 권선이 요동쳤다. 거대한 자력의 소용돌이가 허공에 섰다.
[전자기 유도 법칙(Electromagnetic Induction): 도체 주변의 자기장이 급격히 변할 때 강력한 유도 기전력이 발생한다. 무혁이 설계한 거대 코일은 낙뢰의 플라스마를 강제로 구리선 내부로 굴절시켜 구속했다.]
지이이이잉!
구리 탑을 타고 흐르는 전류의 굉음이 고막을 찢었다. 백색의 번개가 구리선을 따라 회전했다. 그것은 거대한 전기의 뱀과 같았다. 전류는 지하의 축전조(蓄電槽)로 쏟아졌다.
"오라버니! 축전조가 버티지 못합니더!"
소소의 비명이 굉음 뚫고 들어왔다. 축전조의 압력 밸브가 비명을 질렀다. 구리 배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야금성 전체가 폭발한다.
무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철륜 의체를 조종간에 밀착했다.
"내 경맥을 도선(導線)으로 삼는다."
"미쳤습니꺼! 그러면 온몸이 태워집니더!"
소소의 손이 무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혁은 그녀의 손을 완강히 뿌리쳤다. 그의 이성은 이미 최적의 경로를 찾았다.
철컥!
의체의 구리 접점이 주 배선반에 박혔다.
우드드득!
무혁의 척추가 뒤로 꺾였다. 입과 코, 심지어 멀어 버린 두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전류가 척수를 타고 뇌신경으로 역류했다.
[경맥 마모율: 99.8%] [경고: 전신 신경망의 영구 파괴 임박.]
이가 부러지도록 악물었으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근육이 강직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오직 연산안만이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올랐다.
무혁은 폭주하는 전류를 한 곳으로 모았다. 천공야금성 전면에 배치된 거대 포신이었다. 그것은 전자기 가속포, '천둥포(天雷砲)'였다.
두 줄의 평행한 구리 궤도(Rail)가 요동쳤다.
[로렌츠 힘(Lorentz Force): 평행한 도선에 전류가 흐를 때 발생하는 강력한 전자기적 추진력이다. 무혁은 포획한 뇌전을 이 궤도에 주입해 포탄을 순간 가속했다.]
키이이이잉!
천둥포의 포신 안에서 청색의 아크가 튀었다. 궤도 사이의 철제 포탄이 가공할 속도로 회전했다. 이미 음속을 초월할 준비를 마쳤다.
절벽 위의 제갈휘는 넋을 잃었다. 자신이 방출한 뇌정이 요새에 흡수되었다. 오히려 성채 전면의 거대한 쇠파이프가 청색 광기를 뿜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저것은 천벌의 힘이거늘!"
제갈휘의 융포가 바람도 없이 펄럭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진법을 전환하라! 당장 토목(土木)의 기운을 끌어올려라!"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다급히 수인을 맺었다. 야금성이 위치한 협곡의 암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낙석들이 요새를 향해 쏟아졌다.
무혁의 청각에 낙석의 파형이 잡혔다. 낙하 속도 초속 45미터. 질량 수십 톤. 이대로 두면 천둥포를 쏘기도 전에 묻힌다.
그러나 무혁의 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되어 발사 레버를 당길 수 없었다.
[시스템 경고: 심정지 단계 진입 5초 전.] [4] [3]
"소소야……."
무혁의 목구멍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났다.
"레버를…… 당겨라."
소소가 발사 레버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요새의 천정이 무너지며 거대한 암석이 소소의 머리 위로 수직 하강했다.
"소소야!"
철옥이 몸을 던졌으나 그의 손은 닿지 않았다. 암전된 무혁의 뇌리에, 소소의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 인과율의 수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소 생존 확률: 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