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가 격실을 가득 메웠다.

핏빛 증기 너머로 비틀린 골격이 솟구쳤다. 당무진이었다. 마혈수원환의 금단 약력이 그의 골수를 불태우고 있었다. 통상적인 인체의 세 배에 달하는 거구가 육중한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지하 회랑의 바닥 돌판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폭주하는 내공의 기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혁의 좌안(左眼)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안은 이미 빛을 잃은 암전의 나락이었다. 오직 왼쪽 눈동자만이 붉게 깜빡이며 허공의 수치를 계산해 냈다.

[대상: 당무진] [내공 밀도: 통상 대비 342% 급증] [근력 수치: 측정 불가 (인계점 돌파)] [경고: 우안의 신경 마비로 인한 연산 속도 40% 저하]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경맥 마모율은 이미 89%를 넘어선 상태였다. 기형 철륜 의체에 억지로 기를 동기화할 때마다 척추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뇌척수액을 타고 올라왔다.

"당무혁……! 기어 다니는 개새끼가 감히 내 자리를!"

당무진이 포효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가문의 비전 병기인 독선전(毒腺剪)이었다. 묵철로 주조된 거대한 가위 모양의 기기였다. 그 끝에서 녹색의 독액이 끓어오르며 낙숫물처럼 떨어졌다.

스어어억!

당무진이 대지를 박찼다. 거구가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회랑을 메웠다.

무혁은 의체의 구동 레버를 당겼다. 베어링 공차가 제로에 수렴한 기어축이 비명을 질렀다. 철혈부식산의 유입으로 의체의 기동력은 3할 이하로 급감해 있었다. 피할 수 없었다.

"방어 장벽 전개."

무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철갑 마차의 전면에 부착된 수밀 장벽이 톱니바퀴의 맞물림 소리와 함께 솟아올랐다. 세 겹의 압착 강판으로 제작된 방어벽이었다.

콰아아앙!

당무진의 독선전이 장벽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두께만 서 촌에 달하는 묵철 장벽이 종잇장처럼 움푹 밀려 들어갔다. 가공할 충격파가 연결 기계를 타고 무혁의 척수로 고스란히 역류했다.

"윽……!"

무혁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척수 신경망의 파괴 경고등이 뇌리 속에서 붉게 점멸했다.

"공학이라 하였느냐? 쇠붙이 장난감으로 무인의 기를 막아서겠다는 오만함의 대가다!"

당무진이 독선전을 고쳐 잡았다. 그의 등 뒤에서 솟아난 기괴한 뼈 돌기들이 붉은 기류를 흡수하며 더욱 비대해졌다. 두 번째 타격이 가해진다면 수밀 장벽은 완전히 파열될 것이 자명했다.

"물러서라, 무혁!"

당철옥이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연검이 청색의 검기를 뿜어냈다.

철옥이 가문의 가전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무거운 책임감과 적통의 자부심이 그의 검 끝에 서려 있었다.

"당무진 장로! 광증을 멈추시오! 가문의 정통은 이런 추잡한 힘에 있지 않소!"

"닥쳐라! 서자 놈의 앞잡이가 된 자가 정통을 논하느냐!"

당무진이 독선전을 휘둘렀다.

붉은 내공 파동과 청색 검기가 어둠 속에서 충돌했다.

콰콰쾅!

대량 기폭 기의 파열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회랑의 석주들이 무너지며 먼지구름이 일었다.

"커헉!"

당철옥이 비틀거렸다. 그의 구강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이미 경막을 상실한 그의 신체는 폭주하는 마혈수원환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다. 학질에 걸린 것처럼 그의 온몸이 잘게 떨렸다.

"철옥 형님!"

멀리서 야금 도구를 정비하던 당소소가 비명을 질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철옥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흔들리는 지하 수로의 수압계였다. 천공야금성의 중앙 터빈이 폭주하는 내공의 여파로 임계 압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쉭! 쉭!

증기 파이프가 터져 나가며 백색의 고온 증기가 분출되었다. 이대로라면 성채 전체가 유압 폭발로 소멸할 위기였다.

철옥은 품속으로 손을 뻗었다. 땀과 피로 젖은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딱딱한 종이의 질감이었다. 사천당가 선대 가주가 남긴 진원 보존용 백색 도화 부적이었다.

가문의 대의와 무덕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간직해 온 가보였다. 철옥의 눈에 고뇌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무혁…… 이것을 써라!"

철옥이 백색 도화 부적을 터빈의 열배출 격납 밸브를 향해 던졌다.

"가문의 혼은 쇠붙이에 죽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마음에 깃들 뿐이다!"

부적이 포물선을 그리며 불타오르는 기어 장치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화아아악!

백색 도화 부적이 연소하는 순간,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선대 가주의 극양(極陽) 진원이 해방되었다. 그것은 폭주하던 고열의 증기를 일시에 동결시키는 역학적 완충재 역할을 수행했다.

[시스템 메시지: 격납 절연재 주입 완료] [중앙 증기 터빈 압력 안 정화: 12,000-PSI에서 10,000-PSI로 급강하 및 고정] [가속 제어 장치 정상 작동]

성채 내부를 뒤흔들던 진동이 가라앉았다. 수력 터빈이 균일하고 묵직한 회전음을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혁의 좌안이 번뜩였다.

이전에 제갈세가의 제갈휘가 전개했던 풍수 수맥 제어 진기의 잔해가 뇌리 속 계산식과 맞물렸다. 제갈휘의 호신패에서 방출되던 에너지 굴절식 연산 파형이 무혁의 연산안에 실시간으로 복원되었다.

[호신패 파형 역공학 완료] [수맥 기류의 분자 간 결합력 극대화 주파수 변환 감지]

"이것이 역학의 이치입니다."

무혁이 차갑게 독백했다.

그는 가압 튜브선의 밸브를 개방했다. 성채 중앙 증기 발전 터빈에서 생성된 순 폭류 에너지가 굵은 고압 호스를 타고 무혁의 기형 의체 우측 프레임으로 송전되었다.

쿠르릉!

의체의 우측 실린더가 팽창했다.

무혁은 의체 프레임에 장착된 특화 초유압 노즐포를 전개했다. 노즐의 구경은 단 0.1mm. 그 뒤편의 약실에는 당소소가 정제한 초박 미세 규사(모래 알갱이)가 장전되어 있었다.

현대 공학에서 말하는 '연마제 혼입 초고압 워터젯(Abrasive Waterjet)'의 원리였다.

물은 압축되지 않는 유체다. 10,000-PSI의 초고압으로 가압된 물줄기가 미세한 구멍을 통과할 때, 물 분자의 운동 에너지는 음속의 세 배에 달하는 초음속의 속도로 변환된다. 여기에 미세한 모래 알갱이가 섞이면, 그 절단력은 다이아몬드마저 두 동강 내는 절대적인 물리적 칼날이 된다.

아무리 강맹한 내공을 둘렀다 한들, 분자 결합 자체를 갈아버리는 물리적 마찰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죽어라, 서자 놈아!"

당무진이 독선전을 치켜들며 도약했다. 그의 붉은 독강기가 공간을 왜곡시켰다. 어떤 도검도 뚫을 수 없다는 독금강(毒金剛)의 신체였다.

무혁이 격발 레버를 당겼다.

피익!

소리조차 가냘팠다.

화약의 폭발음도, 강맹한 내공의 파열음도 없었다. 오직 공기를 찢는 예리한 고주파의 마찰음만이 회랑에 울려 퍼졌다.

백색의 미세한 실선 하나가 대기를 갈랐다.

그것은 빛보다 차가운 물의 칼날이었다.

슥.

당무진의 거구가 허공에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것이…… 무슨……."

철컥.

당무진이 쥐고 있던 가문의 보도 독선전이 정중앙에서 정교하게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면은 마치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투콰아아앙!

당무진의 무쇠 같던 두 다리와 양팔이 분수 같은 피를 뿜으며 신체로부터 이탈했다.

초수압 분사 칼날은 그의 뼈와 근육, 그리고 그가 둘렀던 독강기마저 단 0.01초 만에 분자 단위로 갈아버렸다.

"아아아악!"

사지가 절단된 당무진의 거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폭주하던 마혈수원환의 기운이 절단면을 통해 급격히 빠져나갔다. 그의 몸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원래의 왜소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닥을 적신 것은 독액이 아닌, 붉고 평범한 인간의 피였다.

적막이 찾아왔다.

당철옥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강호의 그 어떤 초고수도 뚫을 수 없다던 독금강의 신체를, 단 한 줄기의 물줄기가 종이 가르듯 베어 넘겼다.

그것은 무공의 패배가 아니었다.

자연의 법칙을 이성으로 통제한 공학의 완벽한 지배였다.

무혁이 철륜을 굴려 쓰러진 당무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좌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연산의 결과물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장로님. 당신이 버린 기술이 당신의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당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공포를 넘어선, 미지의 학문에 대한 경외와 절망이었다. 이내 노인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가문을 찬탈하려던 정통 독공파의 수장이 허망하게 종말을 고한 순간이었다.

"해…… 해낸 건가요?"

소소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물었다.

철옥 역시 연검을 거두며 긴 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오랜 암투가 마침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무혁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의 좌안이 급격하게 천장을 향해 치켜 올려졌다.

위이이잉!

의체의 감지기에 이상 진동이 포착되었다.

[경고: 고주파 전자기 진동 감지] [수량: 100 이상] [밀도: 위험 수준 초과]

쿠르릉! 쿠쿠쿠쿵!

갑자기 지하 회랑의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강암 잔해들이 떨어져 내리며 성채의 지붕 틈새로 눈부신 서광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혁 일행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무너진 천장 틈새, 절벽 골짜기의 정상에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청색의 제갈세가 깃발.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검은 바탕에 붉은 혈문이 새겨진 거대한 기치.

철혈맹(鐵血盟).

"사천당가의 역도 무리들은 들어라!"

골짜기 전체를 뒤흔드는 웅장한 전음이 사방에서 내리꽂혔다.

"가문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마교의 사술을 부려 강호의 질서를 흐린 죄, 철혈맹의 이름으로 토벌하겠다!"

절벽 위를 가득 메운 무인의 수는 어림잡아 만 여 명에 달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제갈세가의 가주와 철혈맹의 장로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으로, 수백 대의 거대한 철제 포들이 포신을 지하 요새를 향해 내밀고 있었다.

지강을 모아 번개를 쏘아 올린다는 제갈세가의 비전 병기, 전자기 폭격포(電磁氣 爆擊砲)들이었다. 포구 끝에서 푸른 뇌전의 스파크가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만 명의 대군과 수백 대의 폭격포가 천공야금성을 포위한 채 격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위험: 탈출 경로 전무] [생존 확률: 3.2%]

무혁의 외눈에 비친 붉은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푸른 뇌전의 스파크가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지난 결전에서 패퇴했던 제갈휘가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으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당무혁. 네놈이 천지의 이치를 거스르고 가당치 않은 기교로 가문을 더럽혔다."

제갈휘의 목소리가 절벽을 타고 공명했다.

"철혈맹의 대의명분 아래, 이 이단(異端)의 성채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겠다!"

백여 대의 전자기 폭격포가 일제히 포신을 낮추었다.

그것은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극의의 진법 병기였다. 포신 내부의 구리 코일에 극성의 진기를 흘려보내 강한 자계를 형성하고, 그 순간 발생하는 전자기력을 통해 금속 탄자를 광속에 가깝게 가속하여 사출하는 원리였다. 화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지강(地罡)의 내공을 순수한 물리적 파괴력으로 치환하는 신 병기였다.

[경고: 전자기 에너지 밀도 한계점 돌파] [피격 시 천공야금성 완파 확률 99.8%] [좌안의 시각 인지 능력 저하 시작]

무혁의 왼쪽 눈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극통이 두개골을 쪼개는 듯했다. 경맥 마모율은 이미 91%를 돌파했다.

"무혁아……."

피를 토하며 쓰러진 당철옥이 이를 악물고 무혁의 의체 바퀴를 잡았다.

"피해야 한다. 저것은 일개 무인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옥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가문의 전통을 지키려던 자존심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오직 눈앞의 기형적인 천재를 살려야 한다는 집념만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피할 곳은 없습니다."

무혁의 음성은 여전히 건조했다.

그의 머릿속 연산 장치는 이미 최악의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만 명의 포위망과 백여 문의 초고속 뇌포, 하반신이 마비된 육체와 마모율 91%의 경맥. 그 어떤 공식으로도 생존의 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혁의 입꼬리가 기형적으로 비틀렸다.

그의 극단적인 공학적 편집증이 뇌리를 지배했다. 계산할 수 없는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 변수 자체를 공식에 강제로 이식하면 그만이었다.

"소소."

"응? 무혁아, 나 여기 있어!"

당소소가 울먹이며 무혁의 곁으로 달려왔다.

"중앙 터빈의 역위상 제동 장치를 최대 출력으로 개방해라."

"하지만 그랬다간 터빈이 열팽창으로 녹아내릴 거야!"

"상관없다. 3분이면 충분하다."

무혁이 자신의 기형 의체 우측 프레임에 연결된 송전 케이블을 거머쥐었다.

그는 이 케이블을 자신의 가슴, 즉 기가 모이는 단중혈(膻中穴)에 직접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천공야금성 전체의 유압 동력과 기의 흐름을 자신의 뇌신경망과 직접 동기화하려는 광기 어린 시도였다.

기(氣)라는 초자연적 에너지를 공학적 연산 회로에 직접 통전시키는 순간, 그의 경맥은 완전히 걸레짝이 될 터였다. 어쩌면 좌안마저 영구히 실명하여 암전의 세계에 갇힐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혁에게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차가 존재한다면 몸을 부수어서라도 영점(零點)을 맞춘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철학이었다.

"미쳤어……! 당무혁, 진짜 죽으려고 작정한 거냐!"

당철옥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설계도에 타협은 없습니다."

무혁이 케이블의 접촉 단자를 자신의 가슴 깊숙이 박아 넣었다.

지지직!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함께, 푸른 뇌전의 불꽃이 무혁의 온몸을 휘감았다.

[시스템 메시지: 전체 동력원과의 강제 동기화 개시] [경맥 마모율: 95% 돌파] [좌안 시력 소실 위험 경고]

"우우우웅!"

천공야금성의 심장부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채 전체의 기계 장치들이 무혁의 신경망과 하나로 연결되는 감각이 찾아왔다.

동시에, 절벽 위의 제갈휘가 검을 내리쳤다.

"발포하라!"

쿠르릉!

백여 문의 전자기 폭격포가 일제히 백색의 뇌광을 토해냈다. 하늘이 갈라지고, 대지가 무너져 내리는 파멸의 광선이 천공야금성을 향해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파멸의 빛을 마주하며, 무혁은 흐려져 가는 좌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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