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치이익.

정화된 흑철수가 밸브를 타고 바닥으로 쏟아졌다. 사독대의 만독사무가 허공에서 급격히 고형화되어 낙하했다. 원심분리기의 강력한 고속 회전이 만들어낸 압력차가 독무의 강산성 입자들을 원심력으로 외벽에 응결시킨 결과였다.

생존자들의 해독이 완료되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야금성 정문 너머에서 철갑의 구동음이 계곡의 울림을 타고 전해졌다.

당철옥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을 갈무리했다. 그의 뒤편으로 두터운 흑철 갑주를 조여 맨 서른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옥이 사사로이 육성해 온 직속 기동 부대였다. 그들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무혁의 공장 앞에 일사불란하게 무장 도열했다.

"당무진의 잔당들이 가문의 무기고를 약탈하려 움직인다."

철옥의 음성은 차가웠으나 굳건했다.

"그들의 무기 피탈을 막고, 가문의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내 손으로 베어내겠다. 무혁, 네 기계를 앞세워라."

철옥의 어깨 너머로 그의 품속이 보였다. 선대 가주의 진원이 담긴 백색 도화 부적이 미세한 한기를 내뿜으며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쓸 때는 아니었다. 무혁은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좌안을 가늘게 떴다.

우안은 이미 암전되어 암흑뿐이었다. 뇌리를 찌르는 극심한 편두통이 신경망을 전선처럼 자극했다.

[뇌 신경망 과부하율: 91%] [좌안 잔여 시각 동역학 연산 용량: 42%]

"도움은 사양하지 않습니다."

무혁이 기어 레버를 당겼다.

스스로 개조한 공성 휠체어 전차가 무거운 마찰음을 토해냈다. 이 장치는 단순한 의체가 아니었다. 당무진의 본영인 독공 전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야금성 지하에서 비밀리에 주조한 철제 전차였다.

차체 외장은 둔탁한 회흑색을 띠고 있었다. 고밀도 니켈과 콜탄을 최적의 비율로 배합하여 야금한 특수 합금 장갑판이었다. 니켈-콜탄 합금은 강산성 화학 물질과 접촉 시 표면에 극도로 미세한 부동태 피막을 형성한다. 이 피막은 산성 이온의 전기화학적 침투를 완벽히 차단하여 내부 금속의 부식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공학적 방벽이었다. 당가 독공의 기초가 되는 산성 독액 따위는 이 장갑판에 닿는 순간 무해한 물방울처럼 흘러내릴 뿐이었다.

"가겠습니다."

철륜이 거친 기계음을 내며 굴러갔다. 철옥과 그의 기동 부대가 그 뒤를 호위하듯 좌우로 길게 늘어섰다.

계곡을 타고 올라가는 길은 참혹했다. 본영으로 향하는 회랑 곳곳에 핏자국이 낭자했다. 당무진의 강압에 굴복한 정통독공파 무인들과 이에 저항하던 이들이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수백 년간 지켜온 가문의 모습이란 말인가."

철옥의 손끝이 검자루를 쥔 채 가늘게 떨렸다. 동족상잔의 참상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비통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혁이 전차의 압력 밸브를 조절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모든 계(System)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전에 극심한 엔트로피의 증가를 겪습니다. 이것은 가문의 종말이 아닙니다. 비효율적인 구시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수량적 발전 도정상의 폐물 정정일 뿐입니다."

"폐물 정정이라니! 이들이 모두 당가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다!"

철옥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피의 성분은 수분 구십 퍼센트에 철분과 단백질의 화합물일 뿐입니다. 혈연이라는 가상적 가치로 수식의 오차를 덮으려 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가문의 생존 확률을 갉아먹는 불량 부품에 불과합니다."

무혁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기하학과 수치만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철옥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무혁의 극단적인 공학적 편집증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차가운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비참함은 더했다.

이윽고 그들은 당무진이 은거한 가문 최후의 지하 요새, '묵철 회랑'의 입구에 도달했다.

이곳은 사천당가 조상들이 수백 년 동안 침입자를 처단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비밀 지하 복도였다. 어두컴컴한 인공 동굴의 벽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불길한 금속성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심해라."

철옥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이곳은 묵철 회랑이다. 가문의 비전 기관술과 살상 덫들이 가득한 곳이지.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수천 개의 독시와 거석이 쏟아져 내린다. 역대 가주들조차 설계도를 보지 않고는 통과하지 못했다."

철옥의 무인들이 긴장 어린 침을 삼키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혁은 좌안을 크게 떴다.

징징징.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과 함께, 그의 단 하나의 눈에 기이한 시각 정보들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정밀 제어 연산안이 어둠을 뚫고 벽면 내부의 물리적 구조를 분해했다.

벽돌 뒤편에 숨겨진 수백 개의 톱니바퀴. 천장에 매달린 수만 근 무게의 화강암 낙석 장치. 그리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미세한 강철 와이어 릴의 경로가 붉은색 파형으로 선명하게 허공에 그려졌다.

[복합 가중 수동 낙석 장치 감지] [독 시 무차별 사출기 대기 중] [기계적 트리거 위치: 바닥 타일 3번, 7번, 12번 인장 감응식]

"조잡하군요."

무혁이 입가에 냉소적인 호선을 그렸다.

"이것이 수백 년 동안 자랑해 온 가문의 전통적인 수호 장치입니까? 동역학적 효율성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의 연산안은 더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과거 3화에서 제갈세가의 풍수 진기를 분석했을 때 포착했던 특수한 에너지 굴절 파형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교차했다. 제갈세가의 호신패가 뿜어내던 수맥 제어 진기의 파동. 그것은 특정 주파수의 진동을 가해 물리적 구조물의 인장 강도를 순간적으로 무너뜨리는 역학적 공식을 품고 있었다.

무혁은 그 공식을 역으로 계산했다.

"철옥 형님. 저 벽면의 통기구 안쪽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철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미세한 바람이 흘러나오는 구멍일 뿐이다."

"그 안쪽에 이 거대한 기관 장치 전체를 제어하는 중심 톱니 기둥과 수동 와이어 릴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사각지대지요."

무혁은 전차의 보관함에서 자철(磁鐵)로 특수 가공된 동축 봉 하나를 꺼냈다. 자성을 지닌 강철 봉이었다.

"수백 년의 피비린내를 자랑하던 죽음의 회랑이, 겨우 이 쇳덩이 하나로 고철 더미가 되는 과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혁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경맥이 찢어지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마모율이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경맥은 비명을 질렀으나, 무혁은 개의치 않고 자철 봉에 미세한 진동 내공을 주입했다. 제갈세가의 진기 굴절 파형을 접목한 특정 주파수의 진동이었다.

그가 팔을 뻗어 자철 봉을 통기구 틈새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스윽.

자철 봉이 통기구 내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컥!

내부에서 자성에 이끌린 철제 톱니들이 서로 엉겨 붙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무혁이 흘려보낸 특정 주파수의 진동이 와이어 릴 전체로 공명하며 퍼져나갔다.

지이이이잉!

미세하게 떨리던 수백 개의 강철 와이어들이 공명 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동시에 인장력을 상실했다.

툭. 투두둑!

벽면 내부에서 무언가 끊어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듯 이어졌다. 낙석을 지탱하던 고정핀들이 자성의 척력에 밀려 제자리에서 이탈했고, 독시를 장전하고 있던 활시위들이 힘없이 풀려났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찌 된 일이냐?"

철옥이 눈을 넓게 떴다.

"끝났습니다."

무혁이 담담하게 전차를 전진시켰다.

바닥의 인장 감응식 타일을 짓밟으며 철륜이 굴러갔다. 평소라면 천장에서 거석이 떨어지고 벽면에서 수천 발의 독시가 쏟아져 나와 침입자를 다진 고기로 만들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던 함정들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못한 채, 내부에서 스스로 뭉개져 고철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게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철옥의 수하 무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문의 역사책에서 침입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며 경외의 대상이었던 묵철 회랑이, 고작 손가락 굵기의 자석 봉 하나에 허무하게 무력화된 것이다.

"구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설계는 아무리 방대해도 사소한 간섭에 붕괴하기 마련입니다."

무혁의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메아리쳤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지와 비과학의 최후지요."

철옥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혁이 보여준 공학적 지배력은 단순히 무공의 강약을 넘어선, 세계의 법칙 자체를 재정의하는 신의 손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외감과 함께,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들이 신봉해 온 대자연과 무학의 가치가 저 차가운 철륜 아래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들이 회랑의 끝, 당무진의 집무실이자 최후의 격실 앞에 다다랐다.

두터운 묵철 정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무진 장로! 추잡한 도망은 끝났다! 나와서 가문의 심판을 받아라!"

철옥이 내공을 실어 포효했다.

그러나 격실 내부에서는 기이한 침묵만이 흘렀다. 오직 끈적이고 무거운 열기만이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무혁의 연산안이 묵철 정문을 투과하기 시작했다.

[경고: 내부 에너지 수치 비정상적 급증] [생명체 반응 검출: 질량 및 내공 밀도 통상 인간의 3.4배 초과] [이상 열원 감지]

"물러서십시오."

무혁의 좌안이 급격히 수축했다.

"안에서 무언가 비가역적인 변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콰아아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께가 한 자에 달하는 묵철 정문이 안쪽에서 가해진 가공할 충격에 힘없이 찢겨 나갔다. 파괴된 철문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으아아아아아!"

자욱한 먼지와 붉은 증기 속에서 괴물이 포효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당무진이었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가문의 비급 중에서도 부작용이 너무 극심해 봉인되었던 불용의 금단 약물, '마혈수원환(魔血獸元丸)'을 강제로 과용 섭취한 결과였다.

그의 체구는 평소의 세 배 이상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고, 피부는 검붉게 변색되어 핏줄이 밧줄처럼 사납게 꿈틀거렸다. 등 뒤로는 척추뼈가 살을 뚫고 돋아나 기괴한 돌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폭주하는 심마와 제어되지 않는 혈도 내공이 그의 주위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되어 타올랐다.

"당무혁……! 당철옥……! 감히 내 가문을…… 내 자리를 찬탈하려 드는구나!"

삼 배는 커진 당무진의 거대한 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괴폭풍이 일어났다. 광기에 물든 그의 눈동자가 무혁의 철륜 전차를 향해 번뜩였다.

폭발적인 내공의 파동이 지하 동굴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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