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 찰랑.
가죽 가방의 어두운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온 음파는 끈적하고 무거웠다. 박진우가 도윤에게 건넨 유리 앰플 속 액체는 맑은 물의 가벼운 출렁임이 아니었다. 점도가 높은 액체가 유리 벽면을 타고 느리게 미끄러지며 내는 둔탁한 감쇠음. 고진동의 미세한 마찰음이 가죽 가방의 안감과 부딪쳐 내 고막에 고스란히 도달했다. 그것은 내 인지 능력을 거세하기 위해 정밀하게 설계된 고농축 약물이었다. 머릿속의 3D 청각 지도가 그 불길한 파동을 붉은색의 일그러진 타원형으로 그려 냈다.
현관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빗장 걸쇠가 맞물리는 쇳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덜컥. 사냥이 끝난 맹수가 우리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였다.
도윤의 발소리가 거실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가죽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누를 때마다 일정한 간격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박, 자박, 자박.
평소보다 아주 미세하게 빨라진 템포. 발바닥 전면에 실리는 힘의 균형이 앞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포식자의 걸음걸이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방금 건네받은 주사율 높은 액체 앰플 두 개가 짤랑거리며 서로 부딪쳤다. 그 가느다란 유리 마찰음이 고요한 저택의 숨막히는 공기를 싸늘하게 갈랐다.
"지수야."
내 이름을 부르는 도윤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음성 밑바닥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횡격막의 진동은 전혀 다른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 많이 피곤했지? 갑자기 경찰이 찾아오고…… 내가 없는 사이에 서재까지 내려갔다 오느라 고생했어. 당신 몸도 성치 않은데,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안해."
도윤이 소파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 천이 쓸리는 스치듯 차가운 소리. 이어서 그의 따뜻한 손길이 내 뺨에 닿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살결을 쓸어내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안면 근육을 철저히 통제했다. 눈동자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초점을 잃은 맹인의 눈으로 그가 있을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니야, 당신 잘못이 아닌걸.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자꾸 헛소리가 들려서 경찰분까지 번거롭게 만들었네. 미안해, 도윤 씨."
목소리의 톤을 평소보다 반 톤 낮추고, 가벼운 비음을 섞어 죄책감에 젖은 아내의 목소리를 연출했다. 내 성대의 진동이 공기를 타고 도윤의 안면에 부딪쳐 반사되는 양상을 귀로 읽었다. 그의 호흡이 일순간 편안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 사고 이후로 당신 뇌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니까.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과도한 이명과 환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흔한 증상이라고."
도윤은 주머니 속에서 앰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톡, 톡. 유리가 대리석 상판에 부딪쳐 내는 맑고 날카로운 소리. 내 머릿속 입체 지도에 두 개의 작은 원기둥 형태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마침 순경님이 좋은 치료제를 가져다주셨어. 병원에서 처방받은 비타민 성분의 특별 진정제야. 수입품이라 구하기 힘든 건데, 당신을 위해서 어렵게 구해주셨대. 내가 따뜻한 물에 타 줄 테니까, 이거 마시고 푹 자자. 그러면 내일은 그 지독한 소리들도 들리지 않을 거야."
그가 사근사근하게 속삭이며 일어섰다. 그의 발소리가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돌아가며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가스레인지의 전자 점화기가 틱, 틱, 틱 불꽃을 튀기다 화르륵 불길을 일으키는 소리가 주방 벽면을 타고 거실까지 굴러왔다.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양손을 무릎 위에 단정히 모았다. 손톱 끝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유약하고 순종적인 인형의 모습을 유지했다.
머릿속에서 빗소리와 함께 과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사고 당시의 굉음. 타이어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내던 잔혹한 스키드 마크 소리. 그리고 부서지는 유릿가루의 비명. 내 기억의 절반은 그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도윤은 매일 아침 건네던 미스트와 알약으로 그 기억의 무덤 위에 두꺼운 콘크리트를 부어 버렸다.
주방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기포의 파열음이 주방의 타일 벽에 부딪쳐 굴절되는 양상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윽고 도윤의 발소리가 다시 거실로 다가왔다. 쟁반 위에 잔이 흔들리며 내는 가벼운 마찰음이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자, 여기 있어. 따뜻할 때 마셔."
도윤이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리석 상판과 도자기 잔이 만나는 묵직한 타격음.
그리고 이어서, 가느다란 유리 앰플의 목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툭. 아주 미세한 유리의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 귀는 놓치지 않았다.
쪼르륵.
액체가 찻잔 안의 따뜻한 물속으로 흘러내려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온 감각을 귀에 집중했다. 공감각 능력이 극대화되면서 관자놀이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소리를 분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액체가 떨어져 찻잔 바닥에 부딪히고 수면 위로 번져나가는 소리. 물속에서 기포가 생성되었다가 터지는 소리의 주파수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물의 점도는 대략 1.0cp(센티포아즈)다. 하지만 지금 이 액체가 섞이면서 잔 속의 용액이 내는 음파는 훨씬 둔탁하고 끈적했다. 기포가 터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느렸다.
'틱…… 틱…… 틱.'
공기 방울이 표면으로 올라와 터질 때 발생하는 기포의 가변 주파수를 분석해 냈다. 점도는 약 1.3cp에 달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타민제가 아니었다. 뇌의 중추신경계를 억제하고 신경 전달을 강제로 마취시키는 고농축 가바(GABA) 조절 물질이 분명했다. 매일 오후 3시마다 저택 안을 채우던 미스트 기기의 하이피치 밸브음과 정확히 일치하는 계열의 성분. 내 두뇌를 가사 상태로 만들어 기억을 왜곡하고 나를 이 침묵의 감옥에 영원히 가두기 위한 독약이었다.
"지수야? 왜 안 마시고 가만히 있어? 식으면 맛없어."
도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의 음성은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조바심이 섞여 있었다. 그의 호흡을 들었다. 짧고 가쁜 숨소리.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복식 호흡이 아니라, 목구멍 근처에서 맴도는 얕은 호흡이었다.
그것은 기쁨의 호흡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덫에 몰아넣고 마지막 숨통을 끊기 직전에 터져 나오는, 승리욕 가득한 인지 독점의 숨소리였다. 온전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내려다볼 때의 그 잔혹한 희열이 그의 호흡 소리 마디마디에 묻어나고 있었다. 속에서 메스꺼운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불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지만,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미안해. 도윤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데…… 내가 멍하니 딴생각을 했네."
"당신은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주는 것만 먹고, 내가 보여주는 세상만 보고, 내 곁에 안전하게 있으면 돼. 그게 당신을 위한 유일한 길이야."
그가 내 손을 감싸 쥐며 찻잔을 쥐여 주었다. 도자기 잔의 뜨거운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당신 사고 났을 때 기억나? 상대 차량 운전자가 당신에게 소송을 걸겠다고 얼마나 날뛰었는지 몰라. 당신이 신호를 위반했다면서 말이야. 내가 그 사람 찾아가서 무릎 꿇고 빌었어. 평생 모은 돈으로 합의금까지 다 대납해 가면서 겨우 당신 무혐의로 빼낸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지금 차가운 감옥에 앉아 있었을 거야."
도윤의 목소리에 자랑스러운 생색과 시혜적인 태도가 가득했다.
거짓말.
내 안의 모든 감각이 그의 말이 날조된 것임을 소리치고 있었다. 사고 차량의 과실 비율이나 소송의 실체 따위는 도윤이 나를 종속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가짜 울타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어야 했다.
"알아, 도윤 씨. 당신 없었으면 난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 고마워, 정말로……."
나는 잔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도윤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신발 가죽이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 몸을 내 앞으로 기울이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내가 이 독약을 들이키는 순간을 1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심산이었다.
어설프게 마시는 척하며 잔을 내려놓는 짓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인 그는 잔에 남은 용액의 양을 눈으로 확인하고, 내 목구멍이 넘어가는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감시할 터였다.
머릿속의 공감각 지도가 저택의 아주 미세한 지형지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내 입술과 찻잔 가장자리의 접촉각. 찻잔 바닥과 내 턱선 사이의 기하학적 거리.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두꺼운 니트 카디건의 넓은 소맷자락과 그 안에 숨겨진 고밀도 손수건의 위치.
나는 찻잔을 입술에 대고 천천히 기울였다.
동시에 턱을 미세하게 들어 올리며, 잔의 아랫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겼다.
'톡.'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진동이 수면에 전달되면서, 찻잔 내부의 액체가 가장자리를 타고 한쪽으로 쏠리는 경사각 음향을 유도했다. 물줄기가 잔의 테두리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미세한 마찰음이 내 귀에 도달했다.
나는 입술을 살짝 벌려 마시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액체는 내 입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도의 신체 통제력을 발휘하여 턱밑의 각도를 3도 가량 조절했다. 입술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린 끈적한 약물은 내 턱선을 따라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찻잔의 외벽과 내 턱 밑에 받쳐 쥔 두꺼운 니트 소맷자락 안쪽의 특수 방수 천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스으읍, 쪼르륵.
액체가 방수 천 표면의 미세한 기공 속으로 흡수되며 내는 소리는, 마치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흘러 내려가는 소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주파수를 만들어냈다.
"꿀꺽."
나는 일부러 목구멍의 후두개를 크게 움직여 침을 삼키는 둔탁한 타격음을 냈다.
도윤의 호흡이 일순간 크게 흐트러졌다. 만족감과 안도감이 섞인 한숨이 그의 코끝을 통해 흘러나왔다.
"하아…… 잘했어, 지수야. 착하지."
나는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잔 바닥에 남아 있는 극소량의 액체가 흔들리는 가벼운 소리가 대리석 테이블 위에 울렸다. 도윤은 잔의 남은 용량과 내 목의 움직임을 완벽히 관찰했음이 분명했다. 그의 가쁜 숨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평온한 템포를 되찾았다.
"이제 좀 어때? 벌써 졸음이 오지 않아? 약효가 아주 빠른 치료제거든."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몽환적인 톤으로 변했다. 가스라이팅의 대본에 따른 그의 연출이었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했다.
"응…… 도윤 씨 말대로…… 갑자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나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몸의 중심을 잃은 듯 옆으로 기울였다.
스르륵.
소파의 가죽 쿠션이 내 몸무게를 받아내며 깊게 눌리는 소리가 났다. 내 머리가 소파 모퉁이에 툭 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양손은 힘을 풀고 바닥을 향해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숨소리를 일부러 거칠고 일정하게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든 약물 중독자의 상태를 완벽하게 모사했다.
도윤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가 내 얼굴 위로 몸을 굽혔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 끝이 내 이마를 쓸어 넘기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지수야. 그렇게 곤히 자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내 품 안에서 평생 안전하게……."
그의 낮은 혼잣말이 거실의 어스름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이 남자는 완벽하게 속았다. 자신이 구축한 독의 제국 안에서 내가 영원히 그의 인형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내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예리하게 깨어 있었다. 내 안의 초청각적 공감각은 도윤의 일거수일투족을 3D 지도로 실시간 렌더링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실 안창가 모퉁이, 도윤이 늘 다정하게 쓰다듬던 앤티크 장식장 뒤편에서 미세한 고주파의 진동이 시작되었다.
잉이이이이잉-.
그것은 매주 정기적으로 발설되던, 나를 까닭 없는 불안감과 어지러움으로 몰아넣던 저주파 소음의 진동이었다. 도윤이 설계한 인지 왜곡의 장치. 평소에는 내 고막이 겨우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미미한 세기였던 그 소리가, 약을 마시고 쓰러진 내 상태를 확인한 직후부터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동의 주파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공기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압축되며 거실 안의 기압이 변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데시벨 수치가 치솟았다.
60dB, 80dB, 100dB……!
마침내 특수 음향 필터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파 수치는 평소 대비 무려 3배에 달하는 120dB를 기록하며, 거실 안의 모든 공기를 사정없이 내지르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고막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뇌하수체와 전두엽을 직접 흔드는 듯한 잔혹한 공진 주파수였다. 이 정도의 세기라면 정상적인 사람도 몇 분 만에 극심한 구토감과 공간 지각 상실을 일으킬 수준이었다. 도윤은 내가 약물에 취해 잠든 사이, 이 고출력의 저주파로 내 뇌세포의 기억 장치를 완전히 파괴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관자놀이가 쪼개질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과거 사고 당시의 이명과 환각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비명을 지를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도윤의 차가운 시선이 여전히 내 감긴 눈꺼풀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