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발전기가 자동으로 점등되기 직전, 이층 벽장 모서리의 두꺼운 고무 실링 내부에서 '스스스' 하는 속도 가변적인 모터 회전음이 일어났다. 정밀하게 조율된 기계음이 고요한 어둠을 찢고 내 고막을 두드렸다. 귓바퀴를 통해 들어온 진동이 뇌의 중심부를 깊숙이 찔렀다. 관자놀이가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찌르르하게 조여들며 편두통의 전조가 시작되는 순간, 웅장한 전류의 흐름이 온 집안의 벽체를 타고 복구되었다.
파르르 떨리던 전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보이지 않는 내 눈꺼풀 위로 백색광의 열감이 쏟아졌다. 시각을 잃은 눈동자는 그저 붉고 흐릿한 막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 완성된 소리의 지도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수야, 괜찮아? 다행히 비상 전원이 바로 들어왔네."
도윤의 목소리가 어둠의 끝자락을 물고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는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바닥을 디디는 실내화의 마찰음에서 미세한 흐트러짐이 읽혔다. 정전이라는 돌발 상황이 그의 철저한 통제력에 순간적인 균열을 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겁에 질린 나약한 아내의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어깨를 잘게 떨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불이 꺼져서... 무서웠어요, 여보."
"내가 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 등을 쓸어내리는 도윤의 손길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팍에 귀를 기댄 내 청각은 그의 심장박동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분당 78회. 평소보다 다소 가쁜 호흡. 그의 손바닥이 내 척추를 타고 내려갈 때마다 빳빳한 셔츠 깃이 쓸리는 소리가 유난히 서늘하게 들렸다.
나는 그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속삭이는 다정한 말들을 흘려보내며, 방금 전 벽장 틈새에서 들렸던 그 모터 소리의 잔향을 뇌 속에서 반복 재생했다. 단순한 환풍기 소리가 아니었다. 전력이 복구되자마자 가장 먼저, 마치 심장박동기처럼 가동되던 그 정체불명의 금속 함체. 도윤이 설계한 이 감옥의 핵심 제어 장치가 그 벽장 뒤에 숨어 있음이 틀림없었다.
다음 날 오전, 도윤이 정원의 배수관을 점검하러 나간 짧은 틈을 타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마당에서 알루미늄 사다리를 조립하는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사다리발이 잔디밭을 짓누르는 둔탁한 소리와 도윤의 가쁜 숨소리가 정원의 공기를 타고 내 귀로 배달되었다. 적어도 앞으로 십 분 동안은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섰다.
나는 안방 구석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소리 없이 부드러웠다. 도윤이 평소에 '인테리어를 해친다'며 구석진 장식장 아래에 처박아 두었던 구형 유선 전화를 찾아내야 했다.
양바닥을 낮게 깔고 장식장 밑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먼지와 함께 차가운 플라스틱의 질감이 닿았다. 꼬인 수화기 선의 탄성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고요한 정적 속에서 뚜- 하는 기계음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끊기지 않았다. 도윤은 내가 이 고물 전화를 찾아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이얼 패드의 요철을 더듬었다. 1, 1, 그리고 2.
버튼이 눌릴 때마다 발생하는 특유의 고주파 전자음이 귓가를 때렸다. 신호음이 가늘게 이어지는 동안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 네, 긴급신고 Center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여성의 목소리에 목구멍이 턱 막혔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도윤에게 들릴까 두려워, 나는 수화기를 입술에 바짝 밀착시켰다.
"도와주세요."
목소리가 잘게 갈라져 나갔다.
"여기는 산정로 오백사십 번지 저택입니다. 제 남편이... 저를 가두고 있어요. 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서..."
- 사모님?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잘 안 들립니다. 주소가 어디라고요?
"산정로 오백사십 번지예요. 제발 빨리... 남편이 오기 전에..."
그때, 마당에서 들려오던 사다리의 금속음이 뚝 끊겼다. 잔디를 밟는 도윤의 구두 굽 소리가 저택 입구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벅, 벅, 벅.' 그의 보폭이 넓어지고 있었다. 알아채기 힘든 미세한 진동이 거실 바닥을 타고 안방까지 밀려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딸깍하는 가벼운 마찰음조차 사방을 울리는 경고음처럼 크게 들렸다. 전화를 원래 있던 장식장 밑으로 밀어 넣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호흡을 골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정확히 삼십 초 뒤였다.
"지수야, 방에 있었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아서 들어왔어."
그의 음성은 평온했지만, 미세하게 좁아진 콧구멍으로 드나드는 가쁜 숨소리가 그의 의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람 소리가 커서 창문이 흔들렸나 봐요, 여보. 머리가 조금 아파서 누워 있으려고요."
"그래, 푹 쉬어. 오후에는 손님이 올지도 모르니까."
도윤이 내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바닥은 차가웠다.
그 '손님'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저택의 묵직한 목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둔탁하고 규칙적이었다. 쿵, 쿵, 쿵. 세 번의 타격음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은 정확히 1초. 공무를 수행하는 자 특유의 기계적이고 단호한 노크 소리였다.
도윤이 문을 열자, 현관문이 정원의 찬 공기를 빨아들이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안녕하십니까. 이 근처 지구대에서 근무하는 박진우 순경이라고 합니다. 사옥에서 긴급 신고가 접수되어서 확인차 나왔습니다."
처음 듣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싹싹하고 쾌활한, 전형적인 시골 순경의 목소리 톤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귀를 극도로 기울였다. 귓바퀴가 미세하게 떨리며 저택 내부의 음향 지도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도윤은 문가에 서서 곤혹스럽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순경님. 멀리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실은 제 아내가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정신적인 충격이 큽니다. 시력을 잃고 나서 피해망상 증세가 심해졌어요. 종종 혼자서 헛소리를 하거나 있지도 않은 일로 신고를 하곤 합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대단히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박진우 순경의 목소리에는 깊은 동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발소리는 내 청각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찌적, 찌어억.'
그가 거실의 대리석 바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단순한 가죽 밑창의 마찰음이 아닌 아주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었다. 젖은 진흙이 대리석 표면에 밀착했다가 떨어질 때 발생하는 끈적한 파찰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두 굽 틈새에 낀 미세한 자갈들이 바닥을 긁으며 내는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내 뇌리에 적색경보를 울렸다.
그는 분명 외곽 고속도로를 타고 순찰차로 곧장 달려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구두에서는 마른 아스팔트의 먼지나 가벼운 모래 소리가 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밑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와 냄새는 전혀 달랐다.
축축하게 젖은 점토질 흙의 비린내. 그리고 물기를 가득 머금은 시멘트 바닥을 디딜 때 나는 둔탁한 수분 마찰음.
그것은 이 저택 뒤편,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구릉지의 젖은 흙 구덩이에서만 날 수 있는 독특한 소리였다. 그곳은 며칠 전 도윤이 '위험하니 절대 근처에도 가지 말라'며 경고했던, 잡풀과 축축한 진흙으로 뒤덮인 저택의 사유지 배후 구역이었다.
공직자가 왜 정문 도로가 아닌, 저택 뒤편의 은밀한 구릉지를 밟고 이곳에 도달했을까.
"에이, 사장님. 그래도 법이 그렇지 않습니까."
박진우가 거실 안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가 내 머릿속 3D 청각 지도 위에서 붉은색 파형을 그리며 궤적을 남겼다.
"신고가 일단 접수됐으니, 사모님 본인 확인은 하고 가야 제 목이 안 날아갑니다. 사모님 잠깐 뵙고 직접 몇 말씀만 나누면 바로 가겠습니다.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지수야, 순경님 오셨단다."
도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그의 발바닥이 바닥을 지탱하는 힘의 배분이 달라져 있었다. 공격 자세를 취할 때처럼 뒤꿈치에 힘이 실려 있었다.
박진우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빳빳한 나일론 제복이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들려왔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지구대 박 순경입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남편분이 괴롭히거나 가두어 두었다는 신고를 하셨는데, 혹시 사실인가요?"
그의 질문은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목소리 끝부분에는 미세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유일한 무기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갈고닦은 이 귀뿐이었다.
"순경님."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맹인의 눈빛을 유지한 채, 얼굴 가득 온화하고 무해한 미소를 띄웠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런데... 순찰차에서 내리실 때 많이 급하셨나 봐요."
박진우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정지했다. 허파로 들이쉬던 공기가 기문에서 탁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구두 밑창에서 나는 소리가 참 낯익어서요."
나는 소파 시트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며 말을 이어갔다.
"저희 집 뒤뜰 구릉지에는 점토질 젖은 시멘트 바닥이 있거든요. 비가 온 뒤라 물기가 많고 미세한 자갈들이 많아서, 그곳을 밟으면 구두 굽 사이에서 '찌적' 하는 수분 마찰음이 나요. 순경님이 걸어오실 때마다 그 소리가 거실 바닥을 울리네요. 외곽 고속도로를 타고 오셨다면서, 왜 순찰차를 뒤뜰 구릉지에 세워두고 걸어오셨을까요? 거긴 사유지라 철문이 닫혀 있었을 텐데."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도윤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심장박동이 순식간에 요동치며 옷자락 너머로 둔탁한 맥동을 전해왔다.
박진우 역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바지 주머니 근처에서 가죽 벨트가 비틀리며 마찰음을 냈고, 그의 손등에 흐르는 혈류의 파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쿵, 쿵, 쿵. 그의 손등 펄스가 내 가상의 청각 지도 위에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그게... 하하. 사모님이 귀가 정말 예민하시네."
박진우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다가 저택 뒤편 배수로 쪽에 순찰차를 대는 편이 통행에 방해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시골 길이라 주차가 마땅치 않거든요."
조잡한 변명이었다. 이 저택의 정문 앞마당은 대형 트럭 서너 대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광활했다.
그는 서둘러 가죽 서류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찌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가방 내부의 빈 공간이 울리며 뿜어내는 공진음 속에서, 그가 종이 한 장을 꺼내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릉, 착.'
그 파찰음이 내 귀를 스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경종이 울렸다.
이 소리는 관공서나 경찰서에서 흔히 사용하는 72g 규격의 얇고 푸석푸석한 일반 용지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윤의 서재에서만 사용하는 특유의 묵직하고 매끄러운 중질 종이의 소리였다. 평당 무게가 120g에 달하는 고급 수입지로, 종이 끝을 튕겼을 때 맑고 둔탁한 '탕-' 소리가 나는 독특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이 들고 온 본인 확인 서류가, 남편의 서재에서 나온 종이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진동 주파수를 내뿜고 있었다.
이 자는 경찰의 탈을 쓴 사기꾼이자, 도윤이 매수한 또 하나의 연기자였다. 나를 안심시키고 다시 이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가장 정교한 형태의 덫.
"자, 사모님. 여기 상담 확인서입니다. 별건 아니고, 여기 서명만 하나 해 주시면 제가 깔끔하게 철수하겠습니다. 그러면 남편분도 곤란할 일 없으시고요."
박진우가 서류를 내밀며 펜을 쥐여 주려 했다. 그의 무릎이 굽혀지며 바지 단추가 조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태도는 공적 친절함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내 눈앞에 그려진 그의 3D 지도는 온통 기만과 위선의 붉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서명하기 위해 내밀어진 펜을 받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박진우의 얼굴이 있을 허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순경님, 그 서류 종이가 참 좋네요."
"예?"
"경찰서에서는 이렇게 두껍고 매끄러운 수입 중질 종이를 서식용으로 쓰나 봐요? 저희 남편 서재에 있는 종이랑 소리가 어쩜 이렇게 똑같은지 신기해서요. 혹시 서명하기 전에 이 종이의 출처를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박진우의 손끝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쥐고 있던 볼펜의 내부 스프링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내 귀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아... 이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호흡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맥박수는 이미 통제 범위를 벗어나 가쁘게 뛰고 있었다.
도윤 역시 당황한 나머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실내화 바닥을 쓸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들의 가스라이팅 대본이, 오직 내 감각과 논리적인 추적 앞에 처참하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아하하, 역시 사장님 말씀대로 사모님이... 아주 섬세하시군요."
박진우는 굴욕감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서둘러 서류를 가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 서류 양식을 깜빡해서, 아까 정문에서 사장님께 종이를 한 장 빌려 인쇄한 겁니다.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아무튼, 사모님이 안전하신 걸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굴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박진우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의 구두가 바닥을 디딜 때마다 젖은 진흙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렸다.
도윤이 그의 뒤를 따르며 낮게 속삭였다.
"순경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내의 상태가 오늘따라 유독 예민하군요. 제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예, 사장님. 신경 많이 쓰셔야겠습니다. 그럼..."
두 사내가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끝까지 추적했다.
그때, 현관 근처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박진우가 가죽 가방의 지퍼를 다시 한번 미세하게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고 은밀한 마찰음이었다.
도윤에게 서류 가방 내부를 기울이며, 박진우가 속삭이듯 무언가를 미끄러뜨려 건넸다.
"사장님, 그럼 이건 예정대로..."
'스으윽.'
가죽 가방의 안감과 마찰하며 흘러나온 그것은 작은 유리 용기였다.
그 순간, 내 귀가 그 용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극도로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출렁, 찰랑.
가벼운 물이나 음료수가 아니었다. 고진동의 맑고 둔탁한 파동. 액체의 점도가 무겁고 끈적하게 유리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비타민제나 피로회복제가 아니었다. 내 뇌를 마비시키고 인지 능력을 거세하기 위해 정밀하게 제조된, 고농축 환각 약물 앰플 두 개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불길한 파동이었다.
내 촉각적 청각이 그 앰플의 크기와 용량, 그리고 액체의 불길한 점도를 머릿속 지도 위에 정밀하게 촬영해 냈다.
저것이 나를 가두고 내 기억을 지우는 진짜 무기였구나.
박진우가 떠나고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도윤의 발소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방금 건네받은 주사율 높은 액체 앰플 두 개가 짤랑거리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저택의 공기를 싸늘하게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