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9시 42분. 인적 없는 신경외과 교수 연구실의 공기는 수술실의 무균 에어샤워처럼 차갑고 건조합니다.
당신이 백현우의 책상 위에 내려놓은 것은 백색 폴더입니다. 그 안에는 신약 '뉴로타겟-X'의 임상 2상 약동학(Pharmacokinetics) 원시 데이터가 담겨 있습니다. 약물이 체내에 흡수되고 대사되어 배설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지표는, 환자들의 뇌척수액 내 약물 농도가 안전 한계치를 무려 180% 초과했음을 똑똑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부작용이 아닙니다. 중추신경계의 비가역적인 괴사를 유발하는 치명적인 독성 반응의 증거입니다.
오후 9시 43분. 백현우는 서류를 슬쩍 훑어볼 뿐, 예상했던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왼쪽 눈꼬리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는 간극은 단 0.3초에 불과했습니다. 미세한 해부학적 징후를 놓치지 않는 당신의 눈에, 그의 태연함이 오히려 기이하게 비칩니다.
"자네가 이 수치들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알겠네."
백현우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댑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아닌, 지독하리만치 현실적인 피로가 묻어납니다.
"하지만 의학은 때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행해지는 선택의 연속이야. 이 임상시험이 중단되면 우리 병원이 유치하려던 300억 규모의 국책 뇌과학 연구소 설립이 무산되네. 그렇게 되면 당장 다음 달부터 국가지원을 받지 못해 수술을 포기해야 할 저소득층 난치성 뇌종양 환자들은 어쩌지? 소수를 위한 정의가 다수의 생명을 앗아간다면, 자네는 그것을 의사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나?"
악역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논리는 비겁하지만, 대학병원이라는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잔인한 딜레마를 담고 있어 묵직하게 와닿습니다. 그 역시 한때는 환자의 생명만을 생각하던 촉망받는 소아 신경외과의였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어버린 선배의 일그러진 초상이 눈앞에 서 있습니다.
오후 9시 45분. 백현우가 서랍에서 고급스러운 가죽 폴더를 하나 더 꺼내 당신의 앞으로 밀어 놓습니다.
"내년 하반기, 자네를 거산대학병원 신경외과 차기 과장으로 추천하는 내부 결의서네. 그리고 이건… 자네가 늘 갈망하던 존스 홉킨스 신경외과 임상 정교수 추천서지. 메이요 클리닉의 세계적인 뇌종양 석좌교수진과 공동 연구를 진행할 기회도 포함되어 있네."
봉투 새로 언뜻 보이는 영문 추천서에는 병원장과 재단 이사장의 친필 서명이 선명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했던 의사로서의 정점,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완벽한 연구 환경으로 가는 직행티켓입니다.
그것을 손에 넣는다면 더 우수한 환경에서 수천 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이 병실에 누워 있는 몇 명의 임상시험 대상자들의 희생을 눈감아준다면 말입니다.
심장 박동을 나타내는 모니터의 규칙적인 신호음처럼, 당신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제안서를 바라보는 당신의 검지 끝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당신의 시선이 백현우의 차가운 눈동자와 책상 위의 양 갈래 서류 사이에서 멈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