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진료실의 안막 커튼을 투과하지 못한 밤이 방 안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오직 모니터 세 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광선만이 당신의 건조한 눈동자를 비출 뿐입니다.

20시 14분 05초. 당신의 손가락바닥이 키보드 위를 기민하게 미끄러집니다. 화면에는 거산대학병원 신경외과에서 '단순 병사(病死)'로 처리된 환자 5명의 진짜 의무기록이 떠 있습니다. [등록번호 840211-1******, 환자명 김지훈. 최종 진단명: 지주막하 출혈.] 그러나 당신의 눈은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고 있습니다. 가짜 사망진단서 이면의 원시 로깅 데이터를 파고들자, 신약 'KH-204' 투여 후 48시간 이내에 발생한 '뇌압 폭발성 상승(Herniation)'의 증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뇌압이 조절되지 않아 뇌간이 압박받고, 결국 스스로 호흡할 수 없게 되어 맞이한 비참한 종말. 이는 명백한 임상 의학적 살인입니다. 부작용을 숨기기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체로 쓰고, 침묵 속에서 심정지를 유도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원격 전송창의 진행률은 68%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국 진통제 대신 독약을 주입한 거군, 백현우." 당신의 나지막한 독백 속에 분노보다 슬픔이 먼저 고입니다. 의사란 사람을 살리는 존재여야 합니다. 비록 라이벌인 백현우 교수가 병원의 세계적 권위라는 허울과 재단 이사회의 압박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졌다 하더라도, 인간의 목숨을 통계학적 숫자로 치환한 죄는 결코 씻을 수 없습니다.

20시 14분 48초.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붉은 경고등이 점멸합니다. [경고: 허용 임계치를 초과한 원내 트래픽 감지. 보안 필터 가동.] 백현우의 지시를 받은 정보전산실 오상식 팀장이 마침내 움직인 모양입니다. 오 팀장 역시 천성적인 악인은 아닙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막내딸의 수술비를 병원 재단으로부터 지원받는 조건으로 백현우의 은밀한 지시를 수행하는, 그저 평범하고 비겁한 가장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기계적인 충성심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옵니다.

20시 15분 12초. 파일 전송률은 81%. 전산실의 강제 우회 포트 차단이 시작되며 다운로드 속도가 초당 메가바이트(MB) 단위에서 킬로바이트(KB) 단위로 급락합니다. 이대로 네트워크가 끊기면 5명의 무고한 죽음은 영원히 병원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아래 묻힙니다. 그들의 유가족은 사랑하는 이가 왜 급작스러운 뇌사 상태에 빠졌는지 알지도 못한 채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장으로 굳은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켜잡습니다.

20시 16분 01초. 전송률 92%. 탁, 탁, 탁. 진료실 복도 저편에서 정적을 깨는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전산망 차단과 동시에 물리적으로 당신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백현우가 보낸 보안요원들이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1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20시 16분 30초. 전송률은 97%에서 멈춰 섰고, 화면 가득 '대역폭 제한으로 인한 연결 끊김 예정'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9, 8, 7…… 화면의 푸른 빛이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문밖에서 열쇠 꾸러미가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난폭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완전히 차단되기 직전의 터미널 화면을 바라보며, 당신은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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