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환도(九環刀)의 쇳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아홉 개의 쇠고리가 맞부딪치며 내는 파찰음은 황천길을 재촉하는 상여 소리와 같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서슬 퍼런 칼날. 그러나 설우향의 신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전을 갉아먹는 심마의 화염 속에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친 극한의 한기가 찰나의 순간 그의 뇌리를 관통했다.

의원 목연화가 건네주었던 빙로단(氷露丹)의 정수. 품 안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 꽃 같은 영기가 혈도를 타고 흐르며 날뛰던 심마의 불길을 한풀 꺾어 놓았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다시금 명징한 정광이 서렸다.

"어리석은 짓을."

우향이 입술을 깨물며 신형을 뒤로 꺾었다. 간발의 차이로 구환도가 바닥을 찍으며 굉음을 토해냈다. 사당 바닥의 두꺼운 청석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어둠이 일렁였다. 사당을 둘러싼 담장 위로, 그리고 기와지붕의 능선을 따라 검은 도포를 입은 무인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천명회방주 은광태의 최측근 척살 호법들과 정예 척살대들 축 백여 명이었다. 그들의 살기가 사당 앞마당의 밤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두 명의 가문 후계를 완전히 포섭하여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듯, 그들은 겹겹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크하하!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귀면 호법이 뒤틀린 안면 근육을 실룩이며 다시 검을 치켜세웠다. 붉은 혈광결계의 장막은 이미 하늘을 가로막고, 대지에서는 끊임없이 핏빛 음기가 뿜어져 나와 기혈을 뒤흔들고 있었다.

우향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가주 설천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철혈검(鐵血劍)의 기운을 무리하게 끌어올린 탓에,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문을 지키겠다는 그 고결한 집념이 되레 마기의 먹잇감이 되어 그를 옥죄는 형국이었다.

우향은 천교의 검 끝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나락천의 그 깊고 어두운 심연을 딛고 기어 올라왔던 날, 가문의 경계목에 새겨져 있던 흔적. 뒤틀린 흑철의 흉터와 상식적이지 않은 기형적인 검흔. 그때는 그저 마교의 침투 흔적이라 여겨 손끝으로 만져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천교의 검에서 뿜어지는 기운과 그 파괴적인 궤적을 보니 비로소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그 경계목의 흉터는…… 천교, 네놈이 남긴 흔적이었군.'

가문을 집어삼키려는 마교의 검은 손길에 맞서기 위해, 가문의 천재라 불리던 사촌 형은 스스로 뒤틀린 철혈검법을 밤마다 몰래 연마했던 것이다. 무리한 내공 과부하로 온몸의 혈도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홀로 가문의 멸문을 막으려 몸부림쳤던 흔적. 비장하고도 처절한 수호의 증거가 바로 그 나무에 새겨져 있었다.

"천교."

우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일어서라. 설가의 검은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 말에 천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서자라 멸시하던 우향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너 같은 서자 놈에게…… 동정을 받을 만큼 내가 약해지진 않았다."

천교가 이빨을 악물며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의 손에 쥔 검이 차갑게 공명했다. 비록 은광태의 결계가 그들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뼈저린 투지는 붉은 장막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척살대들이 좁혀왔다. 그들의 수는 백여 명을 넘어, 사당 외곽의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증원되어 오백여 명에 육박하는 대군세로 불어나고 있었다. 횃불의 불빛이 그들의 귀면 가면을 기괴하게 비추었다.

"등을 맡겨라."

우향이 천교의 등 뒤로 다가서며 차갑게 내뱉었다.

"내 평생 남에게 등을 보인 적은 없다."

천교가 쏘아붙였으나, 그의 신형은 자연스럽게 우향의 뒤를 받쳤다.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던 두 사촌 형제가, 가문이 공멸할 위기 앞에서 마침내 하나의 검이 되려 하고 있었다.

"백호검식(白虎劍式)."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가문 시조의 비검 명칭이 흘러나왔다.

우향의 검선인결(劍仙因結)에서 비롯된 백색의 무한한 내공과, 천교가 목숨을 깎아내며 발휘한 철혈의 검기가 허공에서 융합되었다. 웅장한 호랑이의 포효가 사당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르르릉!

빛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붉은 혈광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순백의 광휘가 두 사람의 검 끝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가문의 시조가 남긴 백호검식이 두 천재의 공조를 통해 전무후무한 위력으로 재현된 것이다.

"크아악!"

"이, 이게 무슨 내력인가!"

사방을 포위하고 덮쳐오던 척살대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광휘의 검풍이 닿는 곳마다 쇠사슬이 끊어지고 가면에 금이 가며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결계의 일부분이 그 압도적인 광명에 밀려 투명하게 일렁였다.

그러나 귀면 호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결계의 중심에서 수많은 부하들의 피를 흡수하며 기세를 더욱 올리고 있었다.

"잔재주를 부려봐야 결계를 깨뜨리지 못한다! 도주로는 없다!"

귀면 호법이 구환도를 크게 휘두르며 우향의 흉부를 겨누고 짓쳐 들어왔다. 그의 칼끝에는 마교의 사악한 흑색 진기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향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마의 고통이 다시금 단전을 찔러왔으나,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었다.

'검선인결, 개방.'

우향은 내면의 족쇄를 완전히 풀어헤쳤다. 단전에서 일어난 무제한의 선천진기가 폭포수처럼 그의 기경팔맥을 채웠다. 혈관이 터질 듯한 팽창감과 함께, 뇌리에는 그가 베어 넘겼던 자들의 원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원한이든 업보든, 나중에 기꺼이 받아주마. 지금은 이놈을 벤다!'

우향의 신형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신이(神異)한 속도였다. 귀면 호법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기도 전에, 우향은 이미 그의 가슴팍에 도달해 있었다.

스읏.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극도의 고요 속에서, 우향의 검 끝이 귀면 호법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했다. 검선인결의 무제한 내공이 일점에 응축되어 터진 기적적인 일격이었다.

"어…… 어찌……."

귀면 호법의 입에서 한 줌의 검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의 구환도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쇠붙이 소리를 냈다. 결계의 거대한 붉은 장막이 급격히 흔들리며 도주로가 열렸다. 가문을 덮치던 오백 명의 대적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눈으로 우향을 바라보았다. 단 한 격에 수장인 호법의 심장을 꿰뚫어 버린 그 압도적인 무력 앞에, 그 어떤 척살대도 감히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스르륵.

귀면 호법의 신형이 무너지며 품속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옥색의 물건.

우향은 지체 없이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손바닥에 닿는 차갑고 기이한 감촉. 그것은 기괴하게 쪼개진 파편이었다. 언뜻 평범한 잔의 조각처럼 보였으나, 그 표면에는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음산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천명회방주 은광태가 가문의 룡맥을 찬탈하기 위해 준비한 핵심 비기, '수라흡혼잔(修羅吸魂盞)'의 파편이었다.

우향은 직감적으로 이 파편이 은광태의 음모를 분쇄할 결정적인 열쇠임을 깨달았다. 그는 파편을 소매 안 깊숙이 밀어 넣으며 가슴에 숨겼다.

"우향……."

낮은 신음과 함께 천교가 비틀거리며 우향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안색은 이미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리하게 철혈검의 마공을 전개한 대가가 그의 오장육부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다.

천교는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붉게 물든 옥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백협 설가의 가주를 상징하는 신표, 설호검인(薛虎劍印)이었다. 그러나 그 옥패는 이미 정교하게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천교가 그 반쪽짜리 패를 우향의 거친 손바닥 위에 얹어 놓았다.

"이것은…… 가주의 신표다."

천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으나,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가문의 자존심이 서려 있었다.

"가문은 결코 저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멸강의 신표는 반분할 것이니…… 살아라. 살아서, 설가를 다시 세워라."

서자라 부르며 멸시하고 밀어내려 했던 사촌 형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묵직하고 따뜻한 진심이 전해졌다. 그것은 가문을 수호하겠다는 비장한 의지의 인계(引繼)이자, 우향을 진정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묵묵한 신뢰의 표시였다.

우향은 반쪽짜리 옥패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옥의 감촉이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귀면 호법의 육신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뒤집히며, 입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커흑…… 하하하! 늦었다…… 이미 늦었단 말이다!"

그의 죽어가는 영혼이 마지막 원한을 짜내어 사당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피비린내 나는 미련과 원한이 우향의 단전을 향해 검은 실처럼 날아들어 꽂히기 시작했다. 검선인결의 혹독한 인과적 대가가 우향의 영혼을 갉아먹는 환청이 이명처럼 울렸다.

"방주님께서는…… 구천의 피를 부르는 진정한 피의 제단을 이미 가동하셨다! 너희 가문의 모든 인명은 사흘 뒤, 붉은 죽음의 비 제물이 되리라! 크하하하핫!"

광기 어린 유언과 함께 귀면 호법의 머리가 툭 꺾였다.

그와 동시에 사당을 에워싸고 있던 오백여 명의 적들이 일제히 어둠 속으로 신형을 감추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사당 마당에는 오직 피비린내와 차가운 바람만이 감돌 뿐이었다.

"사흘 뒤……."

우향은 반쪽짜리 설호검인을 손에 쥔 채, 붉게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슴속에 숨긴 수라흡혼잔의 파편이 불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가문의 명운을 건 마지막 사투의 시간이 사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으윽……!"

짧은 신음이 우향의 목구멍을 찢고 새어 나왔다.

검은 실들이 그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방금 베어 넘긴 귀면 호법의 원혼이, 그리고 그와 함께 사라져 간 수백 척살대들의 음산한 미련이 우향의 단전을 향해 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검선인결의 무제한 내공을 인출한 대가는 참혹했다. 기경팔맥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살갗 아래로 검붉은 반점이 돋아났다. 심장을 쇠사슬로 묶어 쥐어짜는 듯한 극통에 우향의 무릎이 꺾였다.

"우향!"

천교가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그 역시 밀려드는 마기에 내장이 뒤틀려 붉은 피를 한 웅큼 토해냈다. 두 사촌 형제가 사당의 차가운 청석 바닥 위로 동시에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그때, 사당 입구의 자욱한 피안개를 헤치고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의복이 흙먼지와 핏물로 더럽혀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여인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목연화였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가느다란 은침들이 쥐어져 있었고,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깊은 우려가 가득했다.

"우향 씨!"

연화는 주저 없이 우향의 곁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우향의 맥을 짚었다. 맥박은 이미 미친 듯이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야수와 같았다. 단전의 선천진기가 마교의 혈광결계 잔해와 공명하며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맥이…… 맥이 이토록 뒤틀리다니. 방금 제 기운으로 억눌렀던 심마가 역류하고 있어요."

연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서둘러 우향의 백회혈과 대추혈에 은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침 끝을 타고 검붉은 독혈이 뿜어져 나왔으나, 우향의 전신을 뒤흔드는 고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채 칠흑 같은 암흑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우향의 손이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쥐었다. 살성(殺性)에 잠식된 그의 검 끝이 눈앞의 연화를 향해 서서히 겨누어졌다.

"피해라…… 내 몸에서 떨어져……!"

우향이 이를 악물며 경고했으나, 연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우향의 차가운 검날을 제 어깨로 받아내며, 품 안에서 은밀히 보관해 두었던 푸른빛의 영단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나락천 침전의 극한지에서 겨우 채취해 낸 '빙로단의 정수'였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당신은 이미 심마에 먹혀 괴물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이 정수 한 알을 쓴다 해도 일시적인 방책일 뿐이에요. 은광태의 마기가 사당 지하의 용맥을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 당신의 심마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전신의 혈도가 터질 것입니다."

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빙로단의 정수를 다시 소중히 품에 넣으며, 우향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직은 이 영물을 온전히 흡수할 만큼 우향의 도심(道心)이 정화되지 않았기에, 지금 사용하면 오히려 약효가 독이 될 터였다.

그때, 바닥을 기던 천교가 우향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톱이 우향의 옷자락을 찢으며 피를 흘렸다.

"우향…… 아직 끝이 아니다. 은광태 그자가 사당을 노린 진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천교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사당의 음산한 정적을 깨뜨렸다.

"사흘 전 서거하셨다던…… 우리 아버님의 시신이 사당 지하 밀실에 없다. 은광태 그자가…… 아버님의 육신을 거두어 마교의 괴뢰로 만들었다. 사흘 뒤, 그 괴뢰의 피로 용맥의 제단을 완성하려 하는 것이다."

우향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가주 설무강의 시신이 사라졌고, 그가 마교의 괴뢰가 되어 사흘 뒤 제단에 바쳐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진실.

동시에, 사당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대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룡맥의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흘 뒤의 파멸을 예고하듯, 가문의 영맥이 검붉은 빛으로 요동치며 사당 바닥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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