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쐐애액!

어둠을 가르는 파공음이 초막의 고요를 난폭하게 찢어발겼다. 산산조각 난 나무 파편들이 비사(飛沙)처럼 어지러이 흩날리는 와중, 세 자루의 백련검(百鍊劍)이 보름달의 서늘한 잔광을 머금고 짓쳐 들어왔다. 그 끝은 정확히 설우향의 미간과 목연화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죽어라, 가문의 망령 놈!"

살기 어린 외침이 좁은 초막 안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우향의 눈동자는 한 가닥 흔들림조차 없었다. 피하기는커녕 외려 반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태고의 빙하가 깨어지듯 차가운 진기가 용솟음쳤다. 검선인결(劍仙因結). 전설적인 거룡이 비상하듯,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파가 전신의 혈도를 타고 일시에 폭발했다.

우향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가볍게 들어 허공을 가로질렀을 뿐이다.

쿠구구궁!

무형의 파동이 초막 내부의 공기 벽을 통째로 짓눌렀다. 들이치던 세 명의 척살 밀정들은 자신들이 휘두른 신형 야찰검(夜札劍)이 허공에서 거대한 강철 벽에 부딪힌 듯 뚝 멈춰 서는 것을 느꼈다. 아니, 단순히 멈춘 것이 아니었다.

콰르릉!

"이, 이게 무슨……!"

밀정의 우두머리가 경악 어린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들이 자랑하던 백련정강의 검날들이 과자 부러지듯 조각조각 부러져 나갔다. 검선의 무공이 뿜어낸 무형의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밀정들의 어깨와 허벅지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맨손의 기파만으로 최신예 병장기를 찌그러뜨려 처단하는 일격.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무력의 현신이었다.

"설가의 사냥개치고는 이빨이 너무 무디군."

우향의 차가운 음성이 낙엽처럼 내려앉았다. 그의 신형이 스러지듯 사라지더니, 이내 세 명의 밀정 등 뒤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스슥.

손끝에 맺힌 백색의 기운이 한 자루의 보검보다 날카롭게 허공을 그었다.

서걱!

세 개의 목줄기가 일시에 끊어지며 분수 같은 선혈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신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경악과 공포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순간, 우향의 가슴을 짓누르는 거대한 납덩이 같은 통증이 시작되었다.

"포, 큭……!"

우향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핏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검선인결의 영광 뒤에 숨겨진 피할 수 없는 징벌이 시작된 것이다. 베어 넘긴 적들의 원한과 미련,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느낀 처절한 공포가 그의 영혼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눈앞이 붉게 번지며 환각이 펼쳐졌다.

- 살려주십시오, 은 장로님! 제 가솔들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 닥쳐라! 설우향 그년의 자식을 죽이지 못하면, 네놈들의 목을 사당 밑에 묻어버릴 것이다!

환청 속에서 울부짖는 밀정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은 장로, 은광태의 교활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 마귀처럼 일그러지며 비웃고 있었다. 그들이 품은 죽음의 공포와 배신 장로에 대한 억울한 원망이 고스란히 우향의 단전을 짓눌렀다.

기혈이 뒤틀리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마(心魔)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쌓이는 이 영적인 외채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온몸의 혈도가 터져 죽으리라. 우향은 억지로 내공을 억누르며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진흙벽을 깊게 파고들었다.

"공자님!"

목연화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삼켰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비린내와 널브러진 시신들은 평범한 의원인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시신이 아닌,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붉은 눈물을 흘리듯 핏발이 선 우향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광포한 살기와 함께, 짐승처럼 울부짖는 깊은 외로움과 고통이 뒤엉켜 있었다. 타인을 결코 믿지 못해 스스로를 철창 속에 가둬 둔 사내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스슥.

연화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고운 손길이 우향의 가늘게 떨리는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따스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하지만 온화한 진기가 우향의 차가운 심마의 불길을 조금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놓아라. 더러운 피가 묻는다."

우향은 거칠게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연화는 외려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눈을 피하지 마세요, 설 공자님. 지금 공자님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저들의 피가 아니라, 공자님의 마음속에 도사린 고통이에요. 제 손을 잡으세요. 의원으로서, 이 독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우향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맑고 투명한 그 눈빛 속에는 어떤 기만도, 멸시도 없었다. 평생을 천대와 배신 속에서 살아온 우향에게, 이토록 순수한 호의는 낯설다 못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녀의 손길이 닿자 날뛰던 심마의 파도가 한풀 꺾이는 것을 느꼈다.

우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의 환각을 정리했다. 방금 쓰러뜨린 밀정들의 영혼이 남긴 마지막 잔상은 명확했다.

'은광태…….'

가문의 장로인 은광태가 천명회방의 마교 세력과 결탁하여 설가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가주 설무강의 갑작스러운 서거 역시 그의 음모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최종 목적지는 가문의 시조들을 모신 사당 지하의 '설호룡맥'이었다.

"은 장로, 그 늙은 여우가 결국 이빨을 드러냈군."

우향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가문을 지키겠다는 갈망과 독존의 투지가 다시금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더 이상 이곳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문의 사당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모든 은원(恩怨)과 인과를 끊어내야만 했다.

"목 의원, 가야겠소."

우향은 손을 풀며 연화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소. 여기서 멀리 떠나시오."

"아니요, 가지 않겠어요."

연화가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공자님의 몸 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아요. 의원인 제가 곁에서 기혈을 잡아주지 않으면, 사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심마에 먹혀 괴물이 될 것입니다. 저를 데려가세요."

우향은 잠시 그녀의 눈을 쏘아보았으나, 이내 말없이 몸을 돌려 초막 밖으로 나섰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동행을 허락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사당 가도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

사당으로 향하는 가도는 고요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로 적막했다. 보름달은 구름에 가려 제 빛을 잃었고, 가도 양옆으로 늘어선 대나무 숲만이 서늘한 바람에 몸을 흔들며 부스럭거릴 뿐이었다.

사당의 장엄한 기와지붕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우향은 걸음을 멈추었다.

"……!"

전방의 어둠 속에서, 대지를 얼려버릴 듯한 극독의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너머로, 한 사내의 흑색 장포가 바람에 펄럭였다.

설천교.

백협 설가의 소가주이자, 가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자처한 대천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함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천교의 시선이 우향의 얼굴에 닿자,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돌아왔구나, 서자 놈."

천교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 차가웠다.

"가문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이때, 마도의 냄새를 풍기며 사당을 더럽히려는 것이냐."

챙그랑!

천교가 허리춤의 보검을 투척하듯 무섭게 뽑아들었다. 푸른 검광이 어둠을 가르고 우향의 코앞에 박혔다. 천교의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살기가 사방의 대나무를 일시에 베어내기 시작했다.

지면을 꿰뚫은 청강검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비장한 명음을 토해냈다. 대나무 숲을 흔들던 밤바람마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숨을 죽였다.

우향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박혀 있는 검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얼음과 숯불이 한자리에 섞일 수 없듯, 두 사내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이미 일촉즉발의 파멸을 품고 있었다.

"마도의 냄새라고 했나."

우향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교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괴물이라도 되겠다고 부르짖던 사내가, 이제는 눈마저 멀어버린 모양이군. 천교 형님."

"닥쳐라!"

천교의 안광이 거칠게 이글거렸다. 그의 창백한 안색 위로 핏줄이 기형적으로 불거져 나왔다. 우향은 천교가 쥐고 있는 검자루와 그의 손목을 주시했다. 가문 경계목에서 보았던 그 기괴한 흔적, 뒤틀린 흑철의 기운이 천교의 손등 위로 검붉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철혈검법(鐵血劍法).

마교의 극독에 가까운 비기를 익히기 위해, 천교는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신의 내공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혈도를 갉아먹는 고통을, 저 오만한 천재는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오직 가문의 파멸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서자 주제에 가문의 대통을 논하고, 이제는 사당의 영맥마저 넘보는구나. 네놈이 나락천의 심연에서 무엇을 주워왔든, 이곳은 백협 설가의 성역이다. 가문의 핏줄을 더럽힌 역도 놈들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천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기파가 주위의 대나무들을 서리발처럼 얼려버렸다. 그것은 가문의 비기인 설호검법의 극의가 아니었다. 마공의 힘을 빌려 억지로 끌어올린, 파멸적인 철혈의 투기였다.

우향의 가슴속에서 검선인결의 내공이 다시금 요동쳤다. 방금 전 밀정들을 베어 넘기며 쌓인 원혼들의 흐느낌이 머릿속을 짓눌렀지만, 우향은 이를 악물고 심마의 고통을 억눌렀다.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부딪쳐 깨부수리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그의 깊은 불신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독존(獨尊)의 투지로 화했다.

"가문을 지키겠다는 고결한 신념이 고작 마도에 영혼을 파는 것이었나. 가련하군."

우향의 신형이 앞으로 스러지듯 나아갔다.

"보여주지. 백협 설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쿠우우웅!

두 사내의 발끝이 지면을 박차는 순간,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천교의 청강검이 허공을 가르며 붉은 궤적을 그렸다.

초식명, 철혈참천(鐵血斬天).

하늘을 베어 넘길 듯한 붉은 검막이 우향의 머리 위로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에 맞서는 우향의 손끝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백색의 기운이 맺혔다. 검선의 무한한 진기가 손가락 끝에서 한 자루의 신검이 되어 화했다.

지독하게 짧고 굵은 격돌이었다.

쾅! 콰콰쾅!

홍백의 기파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사방의 대나무 숲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렸다. 폭풍 같은 여파 속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챙! 챙! 서걱!

단 세 번의 합. 그러나 그 짧은 찰나에 오고 간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극도의 살초였다. 천교의 검날이 우향의 어깨 가죽을 스치며 피를 뿌렸고, 우향의 무형검기는 천교의 장포 자락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큭……!"

천교가 거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억지로 마공을 끌어다 쓴 대가로 내상과 과부하가 동시에 그를 덮친 것이다.

하지만 천교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각오한 무인의 비장함이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교가 다시 검을 치켜세우려던 그 순간이었다.

공오오옹-.

사당 방향에서 기괴하고도 음산한 울림이 대지를 흔들었다.

우향과 천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사당의 정문으로 향했다. 장엄해야 할 사당의 지붕 위로, 검붉은 혈광(血光)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뱀처럼 뒤엉키며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이, 이 기운은……!"

천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것은 그가 익힌 마공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순수한 악(惡) 그 자체의 발현이었다. 천명회방의 방주 은광태가 마침내 사당 지하의 설호룡맥을 장악하고 피의 결계를 활성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사당의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을 타고,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가도 전체에 메아리쳤다.

- 흐흐흐…… 어리석은 설가의 자식들아. 서로의 목을 겨누며 피를 흘려라. 너희의 그 고결한 피가 모두 이 사당의 제물이 될 터이니.

"은광태……!"

천교가 이빨을 뿌득 갈며 사당을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리하게 끌어다 쓴 철혈검법의 반동이 그의 온몸의 혈도를 폐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피가 그의 입술을 적셨다.

우향 역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베어 넘긴 적들의 원업이 기혈을 뒤흔들며 심마의 불길을 지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광기가 뇌리를 잠식해 들어왔다.

스윽.

그때, 목연화가 다시 우향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맑고 따뜻한 진기가 우향의 차가운 심마를 억누르며 이성을 붙잡아 주었다.

"설 공자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사당 안의 기운이 폭주하고 있어요. 이대로 두면 가문의 영맥뿐만 아니라 가솔 전체가 피의 제물이 될 거예요."

우향은 연화의 온기를 느끼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얼어붙었던 눈동자에 다시금 서늘한 광채가 돌아왔다.

그는 검선인결의 힘을 억누른 채, 무릎을 꿇고 신음하는 천교를 내려다보았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온 사촌 형. 그리고 가문을 완벽히 재건하여 독존하려는 서자. 두 사람의 운명이 사당 안에서 기다리는 거대한 음모와 마주하고 있었다.

우향이 천천히 사당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사당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 안의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는 기형적인 형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피에 굶주린 마교의 괴수들이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뒤에서 지켜보기나 해라. 천교 형님."

우향이 검선인결의 백색 기운을 다시금 손끝에 모으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당 내부 깊숙한 곳에서 전수가 끊겼던 설가 가주의 비명 섞인 음성이 흘러나와 우향의 귀를 때렸다. 사흘 전 서거했다던 가주 설무강의 목소리였다.

"우향아…… 살려다오……!"

죽은 가주의 목소리가 어째서 사당 안에서 들려오는가.

우향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대치와 의혹, 그리고 눈앞에 다가온 피의 결계 속에서, 우향은 마침내 사당의 문턱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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