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가 찢어지며 흘러내린 선혈이 뺨을 타고 턱 끝으로 툭툭 떨어졌다.
뇌장을 통째로 헤집는 듯한 극통. 천명회방주 은광태가 가동한 마교의 독문 심마가 설우향의 상단전을 가차 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사당 가득 휘몰아치는 핏빛 마기가 점차 짙어질수록,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조차 원혼들의 기괴한 곡소리로 변모하여 고막을 찔렀다.
우향의 품속, 은광태의 이름이 음각된 수라흡혼잔의 파편이 살을 뚫을 듯한 고열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마치 주인의 강림에 공명하듯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파편은 우향의 가슴팍을 검게 그을려 가고 있었다.
“하하하! 자, 단란한 가족상봉이구나.”
은광태의 오만한 광소가 사당의 들보를 흔들었다. 그 거대한 그림자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인형. 사흘 전 서거했다던 설가의 가주, 설무강의 육신이 무색선에 묶여 흔들거렸다.
“살려…… 다오…… 우향아…… 천교야…….”
가주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혼백이 찢겨 나가는 단말마였다. 그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는 소가주 설천교의 눈동자가 핏발로 가득 찼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고자 했던 사촌 형의 손끝이 격렬하게 떨렸다.
우향의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비의 육신을 베어 그 원한을 검선인결의 지독한 업보로 고스란히 삼킬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마교의 손에 가문과 함께 침몰할 것인가. 잔혹한 인과의 덫이 그의 목을 죄어왔다. 단전에서 역류한 탁한 피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시야가 흐려지고, 무릎이 꺾이기 직전이었다.
바스락.
그 찰나의 순간, 옥을 굴리는 듯한 맑은 발소리와 함께 은은한 약향(藥香)이 코끝을 스쳤다.
“우향 소협, 정신을 붙잡으셔야 합니다!”
목연화였다. 그녀의 가녀린 손길이 흔들리는 우향의 어깨를 단단히 지탱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흔들리지 않는 의원으로서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연화는 주저 없이 소매 안쪽 깊숙이 비장해 두었던 작은 옥함을 꺼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사당의 피비린내를 단숨에 지워버릴 만큼 극도로 차갑고 순수한 한기가 백색의 안개가 되어 피어올랐다. 나락천의 얼어붙은 침전에서 백 년에 한 번 맺힌다는 극한의 정수, 빙로단의 정수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우향의 가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얼음 정수를 그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삼키세요. 당신의 도심(道心)을 믿습니다.”
구강을 타고 흘러든 빙로단의 정수는 얼어붙은 폭포가 되어 우향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지독하게 뜨겁던 상단전의 마기가 그 서늘한 기운과 충돌하는 순간, 우향의 귓가에 뇌성벽력 같은 파열음이 울렸다.
치익!
영혼의 밑바닥까지 태워버릴 것 같던 심마의 고열이 급격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얼음산의 정기가 전신의 뒤틀린 혈도를 타고 흐르며, 폭주하던 내공의 흐름을 강제로 억누르고 차갑게 정돈했다.
그 차가운 어둠 속에서 우향은 연화의 온기를 느꼈다.
서자라는 굴레 속에서 태어나 평생을 타인에 대한 불신과 경계로 무장해 왔던 삶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여인의 깊은 믿음이, 그의 얼어붙은 심연을 두드리고 있었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이 이토록 따뜻한 일이었던가.’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옥죄고 있던 고독의 쇠사슬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이라는 해묵은 결함이 걷히고, 그 자리에 연화의 헌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숭고한 승인이 들어앉았다.
마음이 열리자, 검선인결의 진정한 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향을 괴롭혔던 것은 벨 때마다 쌓여가던 적들의 원망과 억울함이었다. 그것을 피해야 할 저주이자 부작용으로 여겼기에 심마가 되어 그를 옥죄었던 것이다.
‘왜 피하려 했는가.’
우향은 눈을 감았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단전에는 그가 베어 넘겼던 자들의 붉은 인과의 실타래가 얽혀 있었다. 그들의 비명, 그들의 미련, 그들의 피 맺힌 한.
‘가져오라.’
우향이 내면을 향해 웅장하게 선포했다.
“너희의 원망과 억울함, 그 모든 은원의 빚더미를 내 온전히 나의 외채(外債)로 공인하겠다. 내가 절대독존의 힘으로 너희의 원한을 청산하고 구원할 것이니, 내 검 끝에서 한을 풀고 안식하라.”
피하지 않고 짊어지겠다는 위엄 어린 도심의 서원.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우향의 영혼을 갉아먹던 붉은 심마의 불꽃이 푸르고 맑은 마인의 정기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원망의 채무를 스스로 짊어지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채무는 역설적으로 그를 보좌하는 거대한 진기의 원천으로 대반전되었다.
쿠구구구!
단전이 팽창하며 대지가 진동했다. 붕괴 직전이던 도심이 고요하고 투명한 영안(靈眼)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우향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동자는 일체의 탁기가 사라진 채, 밤하늘의 차가운 북극성처럼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인의 정기가 도가의 비전인 빙로단의 한기와 융합하여 무결한 선천진기로 화했다. 전신의 모공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푸른 성광(聖光)이 사당의 어둠을 대낮처럼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호의 무림 십대 고수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절대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극의의 경지였다.
그 순간, 우향의 시선이 사당 바닥에 낭자한 핏자국과 그 옆에 서 있는 설천교에게 닿았다.
천교의 검, 그리고 그의 손목에 새겨진 기형적인 흉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우향의 머릿속에 섬전 같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락천의 절망적인 심연을 도끼 한 자루로 기어 나오던 날, 가문의 경계목에 칠해져 있던 뒤틀린 흑철 흔적과 기형적인 검흔을 만졌던 기억.
‘그 흔적…… 바로 형의 것이었군.’
설가의 정통 무공인 설호검법이 아닌, 부작용이 극심한 마교의 비기 철혈검법의 흔적. 천교는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밤마다 남몰래 내공의 과부하를 견뎌가며 피를 토하고 마공을 연마해 왔던 것이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영혼을 어둠에 팔아넘긴 사촌 형의 처절한 서약이 그 흉터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우향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단순한 악당인 줄 알았던 라이벌의 진실을 마주한 순간, 비장한 동질감이 고개를 들었다.
“설천교.”
우향의 건조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사당을 울렸다.
“가문을 지키고자 했던 형의 무게를 비웃지 않겠다. 하지만 이제 이 짐은 혼자 짊어질 것이 아니다.”
은광태의 얼굴에서 오만한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속도로 심마를 극복하고, 오히려 전설적인 성광의 기세를 뿜어내는 서자 놈의 변화에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우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쥐었다.
스승인 백발검선이 남긴 검선암벽의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인과를 벨 수 없다면, 그 인과를 품고 천하를 베어라.
샤아아악!
우향이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검 끝에서 솟구친 푸른 성광의 검기가 사당 바닥을 가르며 은광태가 쳐놓았던 혈광의 결계를 단숨에 지워버렸다.
“어리석은 마인(魔人)들이여.”
우향의 영안이 은광태와 그 뒤에 선 괴뢰 설무강을 꿰뚫었다.
“내 아비의 육신을 욕보인 죄, 그리고 이 땅에 피의 제단을 세우려 한 죄. 그 모든 인과의 대가를 지금 이곳에서 청산하겠다.”
우향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스으윽.
신형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푸른빛의 잔상만이 길게 늘어섰다. 은광태는 비명을 지르며 수라핵의 힘을 끌어올려 방어벽을 구축하려 했으나, 우향의 검은 이미 그의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스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은광태의 어깨를 덮고 있던 핏빛 마기가 허무하게 갈라졌다. 은광태가 황급히 뒤로 신형을 날리며 가주의 괴뢰를 앞으로 밀어 넣었다.
“막아라! 이놈을 찢어버려라!”
괴뢰가 된 설무강이 기괴하게 관절을 꺾으며 우향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색의 마기가 우향의 안면을 노려왔다. 아비의 육신이 뿜어내는 살기 속에서도 우향의 영안은 고요했다.
스승이 남긴 가르침대로, 벨 것은 오직 아비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마교의 무색선뿐이었다.
우향의 검이 허공에 정교한 궤적을 그리며 번뜩였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서리처럼 차가운 검선인결의 진기가 무색선을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칭! 칭! 칭! 칭!
보이지 않던 검은 실들이 허공에서 차례로 끊어져 나갔다. 마교의 사악한 제어가 풀리는 순간, 설무강의 육신이 떨림을 멈추고 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 서려 있던 칠흑 같은 마기가 걷히고, 비로소 평온한 안식이 찾아온 듯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우…… 향아…… 고맙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듯한 아비의 마지막 목소리가 우향의 귓가를 스쳤다. 영혼의 빚이 정화되어 우향의 단전으로 스며드는 온화한 기운이 느껴졌다. 업보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은광태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패였던 가주의 괴뢰가 단숨에 무력화되자 이빨을 갈았다. 그는 남아있는 수라핵의 마기를 폭발시키며 사당 뒤편의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대사당의 제단이 완성되는 순간, 네놈들은 모두 제물이 될 것이다!”
은광태의 신형이 사당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우향은 쓰러진 사촌 형 설천교를 바라보았다. 천교는 피를 토하면서도 우향의 푸른 영안을 보며 허탈한 듯, 그러나 안도하는 듯한 복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은 가문을 지켰다. 이제는 내가 끝마치겠다.”
우향은 검을 털어내며 대사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연화가 그의 뒤를 지키며 침착하게 침통을 고쳐 쥐었다.
대사당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지하 통로. 우향의 영안이 어둠을 뚫고 전방을 주시했다.
터벅, 터벅.
그의 발걸음이 돌계단을 딛고 내려갈수록, 사방에서 불길한 혈광이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로의 끝, 거대한 석문이 열려 있는 대사당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우향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은광태가 남겨둔 마지막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마공의 괴뢰로 변해버린 설가의 정예 무인들과 천명회방의 마인들이 산처럼 난립하여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붉은 광기로 번들거렸고,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그 무덤 같은 인의 장막 너머로, 핏빛으로 끓어오르는 대사당의 제단이 기괴한 고동 소리를 내며 우향을 유혹하듯 손짓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