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푸른 불꽃이 사나운 짐승처럼 일렁이며 무너진 천장 사이로 들이친 붉은 달빛을 집어삼켰어요. 대공 저의 연회장은 단숨에 지옥의 입구로 변해 버렸지요. 바닥의 균열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습한 마기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얼려 버릴 듯이 차가웠답니다.

“하하하! 모두 이 괴수의 먹이가 되어라! 요정의 피든 황제의 목이든, 전부 짓밟아 주마!”

바실리우스 대공은 입가에 시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광기 어린 웃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의 손끝에 쥐어진 검은 마석이 기괴한 파동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지요.

그 순간, 대지 전체가 거대한 고동을 치듯 크게 요동쳤답니다.

둥, 두둥!

쿠르릉거리는 굉음과 함께 연회장 중앙의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그 틈새에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형체가 솟구쳐 올랐어요. 그것은 제국의 금기된 고대 비술로 벼려진 파괴의 석마수(石魔獸)였답니다. 수백 년 묵은 단단한 암석과 피비린내 나는 마력이 뒤엉켜 만들어진 괴물은, 온몸에 돋아난 가시 덩굴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포효했어요.

크아아아아아콘!

공기를 찢는 듯한 울부짖음 한 번에 튼튼한 석조 기둥들이 힘없이 부서져 내렸지요.

“황녀 전하를 호위하라! 방어선을 구축해라!”

황실의 정예인 금빛 갈기 기사단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들고 벨루아의 유모차 앞을 가로막았어요. 하지만 석마수가 거대한 바위 앞발을 가볍게 내리치자, 단단한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낙엽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답니다. 콰직, 하는 고약한 소리와 함께 바닥의 대리석이 진흙처럼 으깨졌어요.

사일러스의 밀빛 눈동자가 짙은 절망으로 물들었어요. 그의 하얗게 질린 손가락 사이로 마력을 탐지하는 붉은빛의 마도구 부품이 힘없이 떨어져 굴러갔지요.

“이건…… 단순한 마수가 아닙니다. 이 거대한 지각 변동을 막을 수 있는 마법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폐하, 어서 대피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카엘렌 황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의 차가운 금안은 오직 요람 속의 작은 아기, 벨루아만을 향해 있었지요. 그의 손이 검자루를 꽉 움켜쥐며 핏줄이 불거졌어요.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내 은신처가, 내 게으르고 완벽한 낙원이 날아가 버리잖아!’

요람 속에서 폭신하고 부드러운 살구색 실크 이불을 꼭 쥐고 있던 벨루아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어요. 오늘 입은 드레스는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보드라운 최고급 양모로 짜여, 아기 피부를 기분 좋게 감싸 안아 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이었단 말이에요. 이런 호사스러운 평화를 저 흉측한 돌덩이 괴물에게 짓밟힐 수는 없었어요.

벨루아는 통통하고 하얀 뺨을 실룩거리며, 머릿속으로 차갑게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장부를 열어, 애버리스.’

지잉.

벨루아의 맑은 보랏빛 눈동자 너머로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황금빛 가계부가 스르륵 펼쳐졌어요. 등가교환의 결산 마도서, 애버리스가 탐욕스러운 침묵을 깨고 숫자를 나열하기 시작했지요.

[보유 가치 및 대가 산정 중…….] [현재 가용 자원 목록:] 1. 황실 특제 아티팩트 ‘태양의 눈물’ (고순도 마력원) - 가치: 극대 2. 사일러스의 마력 이상 감지 마도구 부품 (붉은 마석 코어) - 가치: 중 3. 시녀 메리의 마법 통신기기 (배후 통교 신호 활성화 상태) - 가치: 소

벨루아의 시선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일러스의 붉은 마도구 부품과, 저 멀리 구석에서 덜덜 떨며 품을 움켜쥐고 있는 메리에게 닿았어요. 메리의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깜빡이는 붉은 빛은 대공과 실시간으로 연결된 비밀 통신 신호였지요.

‘좋아, 싹 다 긁어모아서 대가로 지불한다. 그리고 가치 판정 기준을 바꾼다!’

벨루아는 조그만 솜방망이 같은 손을 뻗어 허공가락을 꼼지락거렸어요. 아장아장 기어가는 아기의 무해한 몸짓이었지만, 그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은 보이지 않는 실이 되어 제물들을 엮기 시작했답니다.

[결산 승인: 마도구 부품 및 통신 신호의 가치를 수수료로 소모합니다.] [추가 대가 지불: 연회장 내 전체 목조 가구 및 석재 성분의 잔존 가치를 100% 소멸 처리.]

대공 저의 연회장에는 제국 전역에서 공수해 온 값비싼 자작나무 탁자와 대리석 기둥들이 가득했어요. 벨루아는 회계의 초필살기인 ‘감가상각 소거 기법’을 발동시켰답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비싼 물건이라도, 장부상에서 가치를 0으로 처리해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법이니까요!

“아부우, 뺘아!”

벨루아가 우렁차게 옹알이를 내뱉으며 손을 쫙 펼쳤어요.

그 순간, 사일러스의 붉은 마도구 부품이 화르륵 타오르며 붉은 먼지로 산화했고, 메리의 품속에 있던 통신기기가 팟! 소리를 내며 완전히 타버렸지요. 대공과의 검은 연결 고리가 영원히 끊어지는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석마수가 쿵, 쿵, 소리를 내며 벨루아의 요람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던 바로 그때였어요. 녀석의 거대한 발목을 이루고 있던 거무스름한 대리석들이 갑자기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지요.

“어……? 마수의 마력 반응이…… 사라지고 있어?”

사일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어요.

벨루아의 장부상에서 가치가 ‘0’이 되어 버린 석마수의 다리는, 더 이상 마력을 유지할 수 있는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답니다. 가치가 고갈된 돌덩이는 그저 길가의 흔한 모래흙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바스스스스…….

거대한 석마수의 발끝에서부터 거품이 일듯 하얀 모래바람이 피어올랐어요. 녀석이 울부짖으며 앞발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르기도 전에 거대한 팔뚝이 통째로 고운 모래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지요.

“이, 이게 무슨……! 내 마수가! 내 위대한 병기가 어째서!”

바실리우스 대공은 눈을 부릅뜨고 핏대를 세웠어요.

하지만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답니다. 연회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화려한 장식품들과 대공이 자랑하던 호화로운 대리석 벽면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부서져 내리며, 오직 은빛의 고운 모래가 되어 바닥을 부드럽게 덮어 나갔어요. 사나운 살육 무기였던 석마수는, 단 몇 초 만에 아이들이 모래놀이를 하다가 뭉개버린 모래성처럼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지요.

스르륵, 사아아아…….

연회장 바닥에 가득 쌓인 모래들이 달빛을 받아 은빛 은하수처럼 아름답게 반짝였어요. 그 어떤 파괴의 흔적도, 독기의 냄새도 남지 않은 완벽한 정화였답니다.

“아하하…… 아하하하하!”

바실리우스 대공은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어요. 제국을 뒤흔들 유일한 무기라 믿었던 비장의 카드가, 고작 아기의 손짓 한 번에 감가상각 100%짜리 모래 먼지가 되어 버렸으니 실성할 만도 했지요.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벨루아의 가슴속이 갑자기 차갑게 식어 내려앉았어요.

‘윽…… 온다.’

[경고: 대형 기적 시전에 따른 연체 이자 청구.] [일시적 대가 청구: 시전자의 감정(기쁨, 안도, 애정)을 3시간 동안 저당 잡습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무기질적인 시스템의 목소리와 함께, 벨루아의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따스한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마치 영혼의 안감을 가차 없이 뜯어내 버린 것처럼, 가슴속이 텅 비고 차가운 얼음장처럼 변해 버렸지요.

벨루아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아기다운 생기와 영리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어요.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그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은, 오직 신비롭고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였답니다.

털썩.

벨루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아무런 표정 없이 허공을 응시했어요. 울지도, 웃지도 않는 그 모습은 마치 신전의 깊은 요람에 안치된 고결하고 차가운 요정 석상 같았지요.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카엘렌 황제였어요.

그는 사방에 휘날리는 은빛 모래 먼지 사이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딸의 눈동자를 마주했답니다. 카엘렌의 금빛 눈동자가 경외감과 알 수 없는 전율로 가득 찼어요.

‘이것이……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진짜 요정의 모습인가.’

카엘렌은 벨루아가 자신을 향해 짓던 그 사랑스러운 미소마저도, 제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성한 힘을 소모한 대가로 잃어버렸다고 굳게 오해해 버렸어요. 그의 심장이 분노와 집착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지요. 내 소중한 자산이자, 내 완벽한 요정이 저 비열한 반역자 무리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의 이성을 난도질했답니다.

사일러스 역시 숨을 죽인 채 벨루아를 바라보았어요.

“설마…… 대가가 이것이었습니까? 마력을 강제 조율하는 대가로, 자신의 마음을 바쳐 정화를 이루어내다니…….”

사일러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어요. 벨루아가 일으킨 기적의 이면에 이런 잔인한 제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이 오해했던 조그만 황녀에 대한 미안함과 깊은 경외감에 휩싸여 고개를 숙였어요.

바닥에 쌓인 은빛 모래 위로,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바실리우스 대공이 비참하게 기어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의 화려했던 대공의 예복은 이미 찢어지고 모래 먼지로 더러워져 형편없는 누더기가 되어 있었지요.

“살려…… 살려다오…….”

대공은 헐떡이며 벨루아가 탄 유모차를 향해 기어갔어요. 그의 떨리는 손끝이 벨루아의 살구색 드레스 자락, 그 보드라운 발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답니다.

“위대한 요정이시여…… 제발 이 비천한 목숨을…….”

그 비참한 애걸이 벨루아의 귓가에 닿았지만, 감정을 빼앗긴 벨루아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동정심도, 조롱의 빛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만이 연회장을 지배했지요.

서어억-.

그 순간, 대공의 더러운 손이 벨루아의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서늘하고 예리한 검날이 허공을 갈라 대공의 목줄기 바로 앞을 단단히 겨누었어요.

카엘렌 황제의 차가운 그림자가 대공의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답니다. 금빛 사자의 눈동자에는 오직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의지만이 번뜩이고 있었지요.

“더러운 손으로 감히 내 아이를 만지려 들지 마라, 바실리우스.”

낮게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가 연회장의 얼어붙은 공기를 찢고 울려 퍼졌어요. 칼끝이 대공의 목피부를 뚫고 붉은 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린 바로 그 찰나였답니다.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손을 뻗는 것이냐.”

카엘렌의 목소리는 분노로 타오르기보다,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어요. 매서운 바람보다 더 시린 그의 금빛 눈동자가 대공의 숨통을 단단히 옭아맸지요.

목가죽을 파고드는 예리한 검날에 바실리우스 대공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답니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비참한 비명이 아닌, 광기 어린 실소였어요.

“하, 하하…… 늦었다. 이미 늦었어, 카엘렌. 네놈은 나를 죽여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대공이 피를 토하며 바닥의 은빛 모래를 움켜쥐었어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려 모래를 붉게 적셨지요. 그와 동시에, 벨루아의 아기 옷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황실의 비보, ‘태양의 눈물’ 펜던트가 심상치 않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답니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광선이 연회장의 무너진 천장으로 치솟았어요. 그것은 방금 전 마수의 폭주를 억누르던 따스한 정화의 빛이 아니었답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듯 어둡고 붉은 불꽃이 펜던트의 부드러운 타원형 보석 표면을 따라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지요.

‘어……? 뜨거워.’

벨루아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어요.

정화 아티팩트의 온도가 순식간에 치솟으며, 복숭아 향이 나던 고운 양모 드레스의 깃이 까맣게 말라 들어가기 시작했답니다. 아기의 여린 살결에 닿은 열기는 당장이라도 살을 태워 버릴 듯이 뜨거웠어요.

하지만 마도서의 대가로 감정을 저당 잡힌 벨루아의 얼굴에는 그 어떤 고통도, 두려움도 떠오르지 않았지요. 그저 맑고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로 허공에 뜬 붉은 불꽃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어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고요한 그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오히려 더 미어지게 만들었답니다.

“전하! 아티팩트의 마력 핵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사일러스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벨루아의 유모차를 향해 발을 내디뎠어요. 그러나 펜던트 주변으로 형성된 강력한 붉은 마력의 장막이 그의 접근을 사정없이 밀쳐냈지요. 쿠웅, 하는 둔탁한 파동과 함께 사일러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답니다.

카엘렌의 안색이 그 어느 때보다 하얗게 질려갔어요.

“벨루아……!”

그는 검을 내팽개치고 오직 제 딸을 향해 손을 뻗었지요. 그의 커다란 손이 붉은 장막을 뚫고 벨루아의 목덜미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잡았어요. 치이익, 하는 고약한 소리와 함께 황제의 강인한 손바닥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답니다. 살이 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카엘렌은 이빨을 악물 뿐 결코 손을 놓지 않았어요.

하지만 황실의 핏줄만이 다룰 수 있다는 ‘태양의 눈물’은 주인의 손길을 거부하듯 더욱 사납게 붉은 전류를 뿜어댔지요.

“하하하! 그 정화의 보석은 본래 마기를 흡수해 가두는 제어 장치다!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수백 년 묵은 심연의 마기가 통째로 그 작은 보석 안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이제 어떻게 되겠느냐!”

바실리우스 대공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미친 듯이 웃어댔어요.

“그 보석이 터지는 순간, 네가 그토록 아끼던 요정인지 인형인지 하는 저 계집은 물론이고, 이 황궁의 절반이 통째로 날아갈 것이다! 아우렐리아의 대가 여기서 끊기는구나!”

대공의 저주 어린 외침이 무너진 벽면 사이로 거세게 몰아치는 밤바람을 타고 흩어졌어요.

사일러스의 이성적인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지만, 도저히 이 강력한 폭주를 막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지요. 보석의 마력 순도가 너무나도 높았기에, 강제로 파괴하려 했다가는 그 즉시 초대형 폭발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 완벽하고 게으른 낙원이 코앞인데!’

벨루아는 차갑게 식어버린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황금빛 가계부를 강제로 펼쳤어요.

지잉-!

[경고: 초고밀도 마력 폭주 감지.] [현재 자산으로 해당 아티팩트의 폭주를 강제 억제할 수 없습니다.] [강제 억제 시스템 가동 조건: 시전자의 가장 소중한 ‘기억’ 혹은 ‘영혼의 일부’를 등가의 제물로 청구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붉은색 경고 창이 벨루아의 보랏빛 눈동자에 어른거렸어요.

기억이라니. 전생의 배신 가득했던 기억을 지우는 것쯤이야 아무런 타격도 없었지만, ‘영혼의 일부’를 지불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지요. 그것은 어쩌면 평생 동안 타인의 호의를 믿지 못하는 결함보다 더 끔찍한, 진짜 감정을 영영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답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어요. 당장 이 보석이 터지면 등 따습고 배부른 평화고 뭐고 다 같이 먼지가 될 판이었으니까요.

‘지불한다. 내 영혼의…….’

벨루아가 속으로 결산 버튼을 누르려던 바로 그 찰나였어요.

“비켜라, 사일러스.”

카엘렌의 나직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어요.

그의 손바닥은 이미 피와 그을음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금빛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지요. 그는 품속에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또 다른 아티팩트, 거무스름한 빛을 뿜는 ‘검은 사자의 심장’을 꺼내 들었어요.

“폐하! 설마 황가의 금단의 공명을 쓰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폐하의 생명력을 매개로 작동하는……!”

사일러스가 경악하며 소리쳤지만, 카엘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검은 보석을 벨루아의 붉은 펜던트에 그대로 맞대었어요. 황제의 심장과 요정의 눈물이 맞닿는 순간, 연회장 전체를 뒤흔들던 붉은 광선이 일순간 정지했지요.

그리고 대공 저의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묘하고 거대한 진동이 다시금 시작되었답니다. 그것은 고대의 봉인이 풀리는 소리가 아닌,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거대한 마법진 전체가 뒤틀리며 황제를 향해 역류하는 소리였어요.

바실리우스 대공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어요. 대공의 뱀 같은 눈동자가 공포로 크게 벌어졌지요.

“이, 이 진동은…… 설마 제도의 결계를 역행시키는 것인가? 미쳤군! 카엘렌, 네놈이 제국 전체를 무너뜨릴 셈이냐!”

그 순간, 벨루아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던 황금빛 가계부의 숫자들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시스템 오류: 제3자의 강제 개입 발생.] [황실 혈통의 생명력이 제물로 감지되었습니다.] [계산되지 않은 초과 자산 유입으로 인해, 마도서 ‘애버리스’의 결산 법칙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어……?’

벨루아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어요.

카엘렌 황제가 제 목숨을 깎아가며 자신을 구하려 들다니, 철저한 손익계산서로 가득 찬 벨루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버 페이(Overpay)였지요.

하지만 마도서의 경고음은 멈추지 않았고, 펜던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빛은 이제 벨루아와 카엘렌을 동시에 감싸 안으며 기괴한 고치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답니다.

과연 이 통제 불능의 공명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폭군 아빠의 희생일까요? 아니면 제국 전체의 파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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