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떼시지요, 전하.”
루카스 벨몬트가 흔들어 보인 서류에는 서릿발 같은 황실 사법부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킬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세레나를 품에 안은 그의 팔에 스르륵 힘이 들어갔으나, 루카스의 등 뒤로 도열한 상단 호위대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루카스 벨몬트……! 감히 황실의 일에 일개 상단이 끼어들겠다는 말이냐?” “일이라니요. 저는 정당하게 제 비즈니스 파트너의 신변을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에버하르트 가문의 기소권보다 이 영지 독점 계약서가 법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 없을 텐데요.”
루카스의 입꼬리가 얄밉게 말려 올라갔다.
골이 깨질 듯한 고열 속에서 세레나는 간신히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가는 와중에도 ‘남부 에르제 영지 독점권’이라는 여덟 글자가 뇌리에 박혔다.
‘내…… 내 은퇴 자금…….’
그것만큼은 빼앗길 수 없었다. 세레나는 킬리안의 멱살을 꽉 쥐려 했으나, 땀에 젖은 손가락은 힘없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보유 자산이 한계를 초과하여 우주를 뚫고 상승합니다!] [운명 보정력의 2차 페널티가 즉시 소환됩니다! 체온이 41도에 도달하며, 급성 마력 폭주로 인한 실신 상태 이상이 추가됩니다!]
“커헉……!”
목구멍을 타고 울컥 쏟아진 핏방울이 킬리안의 은빛 예복을 붉게 적셨다. 세레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 미친 황태자 새끼가 기어이 나를 죽이는구나. 호감도 부채를 줄이려고 욕을 해달랬더니, 거기다 대고 평생 속죄하겠다며 호감도를 15만 골드나 더 얹어 주다니. 이건 명백한 이자 폭탄이자 불법 고금리 사채였다.
“세레나! 눈을 떠다오, 세레나!”
울부짖는 킬리안의 비명 소리를 마지막으로, 세레나의 의식은 암전 속으로 완전히 추락했다.
***
사흘 뒤. 벨몬트 상단이 자랑하는 최고급 마차 안.
덜커덩거리는 마차의 진동과 함께 시큼하면서도 쌉싸름한 약초 향이 코끝을 찔렀다. 세레나는 신음하며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영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단정한 안경 너머로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눈빛을 빛내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세레나가 깨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은색 침이 꽂힌 작은 환약을 입가에 내밀었다.
“상단 비고에서 갓 꺼내온 엘프의 정화 환약입니다. 한 알당 5천 골드가 넘는 신형 마력 환약이니, 뱉지 말고 삼키십시오. 영애의 몸값을 생각하면 이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으니까요.” “……꿀꺽.”
세레나는 영혼 없는 눈빛으로 환약을 받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시원한 마력이 퍼지며 머리를 짓누르던 열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살 것 같았다.
정신이 맑아지자마자 세레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반투명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호감도 회계 장부 - 제1금융권 세레나 지점] - 현재 보유 총자산: 485,000G (과부하 상태!) - 현재 적용 중인 페널티: [급성 마력 폭주 - 일시적 완화 상태 (잔여 시간 23:59:59)] - 특이 사항: 황실 봉인 가보 비정상 마력 흡수(복선 4) 감지 중.
“……응?”
세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장부 시스템 하단에 붉은 글씨로 번쩍이는 경고창이 새로 추가되어 있었다.
[알림: 황실 가보 ‘태양의 눈물’이 보유자의 감정 자산 요동에 공명하여 주변의 과적된 마력을 급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석 결과: 해당 보석은 ‘기가플롭스 통화 연산 장치’와 동조가 가능합니다. 가보를 소지할 경우, 보유 중인 감정 부채(자산)를 시스템 페널티 없이 ‘무해한 안전 자금’으로 강제 정화 및 세탁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세레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를 태워 버릴 것 같던 이 빌어먹을 고열 페널티를, 황실 가보인 ‘태양의 눈물’만 있으면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그 미친 호감도 자산을 아무런 부작용 없이 현금으로 세탁할 수 있는 탈세 통로가 열린다는 소리였다.
그 가보가 지금 누구 손에 있더라?
“세레나……!”
마차의 한구석,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은발의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의 고고한 황태자, 킬리안 드 루미나스였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황태자로서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예복은 구겨져 있었고 턱가에는 까칠하게 수염이 돋아 있었다. 세레나가 깨어난 것을 본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아, 신이시여…… 정말로 깨어났구려. 내, 내가 그대를 또다시 죽일 뻔했소.”
킬리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는 황태자라니, 제국인들이 보면 기절초풍할 광경이었지만 루카스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안경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전하, 가뜩이나 좁은 마차 안에서 그렇게 무릎까지 꿇으시면 동선에 방해가 됩니다.” “시끄럽다, 장사꾼 놈! 지금 내게는 세레나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킬리안이 세레나의 하얗게 질린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그의 손끝바람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세레나…… 내가 어리석었소. 과거, 그대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다 오해하고, 그대의 손가락에서 가차 없이 빼앗아 갔던 우리 가문의 약혼 반지…… ‘태양의 눈물’을 기억하오?”
‘기억하고말고. 네가 아주 매정하게 빼앗아가서 내 원작 사망 플래그에 쐐기를 박았던 그 보석이잖아.’
세레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서 세레나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손에 넣었던 황실의 신물. 하지만 킬리안은 그녀의 집착에 진저리를 치며 강제로 그 반지를 회수해 황실 비고 깊은 곳에 봉인해 버렸었다.
“그때는 그대가 탐욕에 눈이 멀어 그 보석을 원하는 줄 알았소.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소……! 그대는 가보의 가치를 탐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의 연결고리를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내가 그대의 유일한 안식처를 빼앗아 버린 것이었소.”
킬리안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치며 자책했다.
“내 어찌 그 깊은 뜻을 몰랐단 말인가! 그대가 이토록 몸이 망가지면서까지 내게 매를 맞으려 했던 것도, 결국 내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눈물겨운 자비였거늘……! 내 기필코 황실 비고의 봉인을 풀고 그 보석을 그대에게 되돌려주겠소. 그것이 내 평생의 사죄이자, 그대에게 바치는 속죄의 증표요!”
[황태자 킬리안의 죄책감이 성층권을 돌파하여 폭발합니다! 감정 부채 +200,000G!] [경고! 경고! 보유 자산이 임계치를 초과합니다! 페널티 강도가 2배로 증가할 예정입니다!]
‘이 미친놈아! 제발 그만해!’
세레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20만 골드가 추가로 입금되는 순간, 엘프의 환약 덕분에 간신히 진정되었던 마력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어붙은 얼굴로 K-직장인 특유의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혼을 완전히 가출시킨 채, 세상에서 가장 정중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벽을 치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 고귀하신 전하께서 이 비천한 악녀의 손을 잡고 계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 고결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세레나…… 왜 또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전하라니, 예전처럼 킬리안이라고 불러다오!” “어찌 일개 가문의 영애가 제국의 태양이신 전하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지난날의 철없던 과오는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진 먼지일 뿐입니다.”
세레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손을 쏙 빼냈다. 그리고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 보석…… ‘태양의 눈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장난감은 이미 지나간 꿈일 뿐이지요. 지금의 저에게는 그저 과분하고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제게 주신다 한들, 제 상처받은 과거가 되돌아오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저 같은 것 때문에 황실의 법도를 어기지 마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K-직장인 시절, 계약 연장을 구걸하는 진상 협력업체를 정중하게 거절할 때 쓰던 ‘소중한 제안 감사하나 내부 사정상 정중히 반려합니다’ 화법의 로판 버전이었다.
하지만 이 눈물겹도록 우아하고 슬픈 거절은, 킬리안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아…… 세레나. 나를 위해, 내 황태자로서의 입지를 위해 스스로 그 보물마저 거부하는구나! 내가 법을 어겨 곤란해질까 봐 스스로 상처받은 역할을 자처하다니……!’
킬리안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었다.
“아니오! 그대는 받아야 하오! 그대가 받지 않겠다면, 내가 강제로라도 그대의 손가락에 끼워 줄 것이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실 비고를 열겠소!”
[황태자 킬리안의 집착 및 후회도가 광폭화 상태에 진입합니다! 감정 부채 +100,000G!]
세레나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진짜 이 새끼를 어쩌면 좋지? 대화가 안 통하잖아!’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장부의 시스템 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공명 확인: 황태자가 지닌 ‘태양의 눈물’과의 공명 진동수가 98%에 도달했습니다.] [비자금 강제 정화 기능이 활성화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대상 보석이 반경 1미터 이내로 접근할 경우, 초과된 자산 400,000G가 즉시 무해한 ‘남부 에르제 개발 투자금’으로 자동 세탁됩니다.]
‘……어라?’
세레나의 경제적 뇌 회로가 무서운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황실의 가보이자 대륙 최고의 유산인 '태양의 눈물'. 저걸 그냥 거절하는 척하면서, 향후 대심문 재판 때 킬리안의 죄책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합법적인 ‘위자료’ 혹은 ‘지참금’ 명목으로 강탈해 오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내 몸을 갉아먹는 이 미친 감정 부채도 완벽히 세탁되고, 그 보석을 당근마켓…… 아니, 벨몬트 상단을 통해 암시장에 팔아넘기거나 남부 에르제 영지의 합법적인 탈세용 자금 세탁 증서로 바꿀 수 있다.
‘좋아, 계획은 섰다.’
세레나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머지않아 제게 닥칠 시련을 이겨낸 뒤, 그때도 전하의 마음이 변치 않으셨다면…… 그 사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세레나……! 고맙소, 기회를 주어서 정말 고맙소!”
킬리안은 세레나가 제안을 ‘유예’해 준 것만으로도 구원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루카스는 혀를 차며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전하, 감동적인 속죄 극장은 이쯤 하시고 슬슬 내리실 준비를 하시죠. 곧 제 사저에 도착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벨몬트 상단의 비밀 안전가옥에 오래 머무시는 건 사교계의 이목에 좋지 않으니까요.” “……내, 내 알아서 간다! 세레나, 조만간 다시 보러 오겠소. 몸을 부디 보살피고 있으시오.”
킬리안은 아쉬운 듯 세레나의 손을 한 번 더 꼭 쥔 뒤,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황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단둘만 남게 되자, 루카스가 피식 웃으며 세레나에게 서류 뭉치 하나를 건넸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영애. 황태자를 저렇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시다니. 과연 제 전속 CFO로 삼고 싶은 인재답군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귀찮았던 겁니다, 루카스 님. 그나저나 제가 부탁했던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세레나가 서류를 받아들며 묻자, 루카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에버하르트 가문의 동향 말입니까? 아주 가관이더군요. 영애가 아카데미 식당에서 쓰러진 이후, 의붓동생인 엘리제 영애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습니다. 영애를 확실하게 매장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더군요.” “엘리제가요?” “예. 저희 상단의 정보망에 걸려들었습니다. 엘리제 영애가 가문의 공금을 횡령하여 암시장의 악마 숭배 상인에게 접촉하더군요. 거기서 금기시된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를 거액에 구매했습니다.”
루카스가 내민 서류에는 구매 장부의 사본과 거래 일시, 그리고 독약의 성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세레나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내 홍차에 독을 타려던 배후가 역시 너였구나, 엘리제.’
1화에서부터 이어져 온 엘리제의 음모가 드디어 꼬리를 잡힌 순간이었다. 세레나는 머릿속으로 이 독약 정보를 어떻게 요리할지 빠르게 계산했다.
“이 고대 독약은 신체에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마력 반응을 강제로 폭주시켜 피해자를 ‘이단 계약자’로 오인받게 만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악질적인 물건이죠.” “재미있네요. 자신들의 범죄를 이단 심문으로 덮어씌우려 하다니.”
세레나가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루카스 님, 이 구매 증서와 거래 내역서의 원본을 잘 보관해 두세요. 조만간 열릴 대심문 재판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시지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남부 에르제 영지의 ‘마력 분출구 권리증’ 말이에요. 처분 곤란한 애물단지라고 하셨죠?” “아, 그 마수 지대의 쓸모없는 땅 말입니까? 예, 세금만 축내는 골칫덩이입니다만.” “그거, 조만간 제가 무상으로 양도받을 테니 준비해 두세요. 성녀의 이름으로 마물을 정화해 준다는 명분을 세워주면, 상단에서도 합법적으로 제게 넘겨주실 수 있겠죠?” “……예?”
루카스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력 분출구를 정화한다고요? 거긴 고위 마법사들도 혀를 내두르는 위험지대입니다.” “후후, 제게는 다 계획이 있답니다. 그 마력 에너지를 아주 유용하게 가공할 방법이 있거든요.”
세레나는 머릿속으로 남부 에르제 영지의 따뜻한 햇살 아래, 마력 에너지로 가동되는 초대형 마법 오븐을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력 분출구의 열기를 오븐 동력으로 쓰면 광열비가 제로잖아! 거기서 구워내는 크루아상은 그야말로 제국 최고의 명물이 되겠지.’
세레나가 행복한 은퇴 계획에 부풀어 오르던 바로 그 순간.
쿵-!
마차가 멈춰 선 루카스의 저택 정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묵직하고 차가운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무슨 일이지?”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세레나 역시 옷가지를 정돈하며 그 뒤를 따랐다.
저택의 넓은 대리석 로비. 그곳에는 정갈한 신관복 위에 강철 같은 기사 갑주를 덧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긴 채, 칼날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고 있는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 폰 아델하이트였다.
“……집행관 경? 무단침입치고는 기세가 아주 흉흉하군요.”
루카스가 가로막아 섰으나, 하인리히는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오직 세레나만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는 의심과, 분노와, 그리고 어딘가 뒤틀린 집착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세레나 에버하르트.”
하인리히가 성큼성큼 다가와 세레나의 눈앞에 멈춰 섰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붉은 왁스로 단단히 봉인된, 오직 교황청과 황실 법원만이 발행할 수 있는 최고 단계의 공문서였다.
“에버하르트 가문의 가주와 엘리제 에버하르트 영애가 황실 법원에 정식으로 기소장을 제출했다.”
하인리히가 고지서를 세레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피고인 세레나 에버하르트. 죄목은 금기된 흑마법의 사용 및 악마 계약 혐의. 대심문 재판의 날짜가 일주일 뒤로 확정되었다.”
하인리히의 차가운 저음이 로비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이것으로 그대의 위선도 끝이다, 영애. 이제 재판장에서 그대의 그 추악한 진실을 내 손으로 직접 벗겨내 주지.”
그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집착의 불꽃을 보며, 세레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이 미친 집행관 새끼가 기어이 대형 사고를 치는구나.’
하지만 세레나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제의 독약 구매 증서도 확보했고, 킬리안의 가보를 뜯어낼 명분도 생겼다.
판은 깔렸다. 이제 이 미친 재판장을 탈세와 은퇴 자금 확보의 무대로 만들어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