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쿨럭, 컥……!”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점점이 흩뿌려지는 선혈은 지독하리만치 붉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끊임없이 뜨거운 액체가 울컥거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사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는 이 비극적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계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대고 있었다.

[위험! 위험! 위험!] [경고: 보유 중인 감정 자산이 허용 한계치를 초과하여 ‘운명 보정력’이 작동합니다!] [대가 청구: 과도한 자산 독점에 따른 페널티로 ‘뇌를 태우는 급성 열병 및 각혈(심각)’ 상태 이상이 즉시 소환됩니다!] [생존을 위해 즉시 타인에게 매를 맞거나, 뺨을 맞거나, 욕을 먹어 호감도 자산을 강제로 탕감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24시간 이내에 사망합니다!]

눈앞에서 빨간색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자산이 너무 많아서 세금 폭탄을 맞고 파산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몸소 겪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담보로 한 강제 징수라니.

“영애! 세레나 영애!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하인리히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은백색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에는 세레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절망과 죄책감이 일렁였다.

그 절망이 깊어질수록, 세레나의 머릿속 장부는 무자비하게 숫자를 갱신했다.

정정하겠다. 저건 집행관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자 악성 채무자다.

[하인리히의 죄책감 추가 상승! +20,000G!] [페널티 강도가 더욱 무거워집니다! 체온이 0.5도 추가 상승합니다!]

‘이 미친 집행관 놈아! 제발 그만해! 날 걱정하지 말라고! 차라리 내 뺨을 갈기란 말이야……!’

세레나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며 하인리히의 가슴을 필사적으로 밀쳐 냈다. 하지만 열병으로 힘이 빠진 손길은 그저 애처롭게 매달리는 몸짓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인리히 님…… 제발, 제 곁에서…… 물러나 주십시오. 당신의 고결한 손이…… 저 같은 악녀 때문에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기어이 K-직장인 시절 다져진 영혼 없는 가식적 극존칭이 튀어나왔다. 위기 순간마다 튀어나오는 이 망할 고압 희극형 소통 장애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하인리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세레나의 핏기 없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악녀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단 심문관들의 칼날 앞에서도 타인을 먼저 걱정하는 당신이 어찌 악녀란 말입니까!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당신의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의심만 거듭하다니……!”

[하인리히의 참회와 경외감 폭증! +30,000G!] [경고! 체온이 40도에 육박합니다! 장기 손상 주의!]

‘아니라고! 제발 내 말 좀 들어먹어라, 이 눈먼 집행관 새끼야!’

세레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있다간 하인리히의 눈물겨운 참회 쇼에 깔려 질식사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 자신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때려 줄 ‘진짜 악당’을 찾아야 했다.

세레나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하인리히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대리석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하인리히가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일 분 일 초가 아쉬웠.

‘뺨을 맞아야 한다. 아주 세게, 고막이 징징 울릴 정도로!’

세레나는 머릿속으로 [호감도 회계 장부]의 상세 설명서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자산 탕감 요율표] - 타인에게 욕설 및 모욕 듣기: -10,000G (1회당) - 물리적 타격(뺨 맞기 등) 당하기: -50,000G (1회당) - 가문에서의 공식 폐출 및 파문: -150,000G

“뺨 한 대에 오만 골드라니, 이보다 더 남는 장사가 어디 있어!”

세레나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아카데미 귀빈 접견실 방향으로 향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지만 생존을 위한 본능이 그녀의 다리를 움직였다.

마침 오늘, 에버하르트 가문에서 아주 훌륭한 ‘뺨 때리기 후보’가 아카데미를 방문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의붓동생 엘리제를 끔찍이 아끼고, 세레나를 사사건건 쓰레기 취급하던 독사 같은 숙부, 버나드 에버하르트였다.

***

쾅!

세레나가 귀빈실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섰다.

화려한 소파에 앉아 홍차를 홀짝이던 버나드 에버하르트가 깜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곁에는 엘리제가 보낸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세레나? 네가 왜 여기에…… 아니, 그 몰골은 또 뭐냐!”

버나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입술과 초췌한 안색, 그리고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세레나의 모습을 보며 그는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세레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썩어 문드러진 표정! 완벽하다. 저 자야말로 자신에게 무자비한 손찌검을 날려 줄 구원자였다.

세레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버나드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가 그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숙부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 당장 손 치우지 못해!”

버나드가 혐오스럽다는 듯 세레나의 손을 걷어찼다. 세레나는 바닥에 가볍게 쓰러졌지만,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다시 일어났다.

자, 이제 빌드업을 시작할 차례였다. 확실하게 매를 벌기 위해, 1화부터 묵혀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숙부님, 정말 큰일이 났습니다. 엘리제가…… 엘리제가 가문의 공금을 무단으로 횡령하여, 교황청에서 금기시하는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를 악마 숭배 상인에게 구매했습니다.”

“……뭐, 뭐라고?!”

버나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엘리제의 배후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도맡아 하던 자였기에, 그것이 가문에 어떤 파멸을 가져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흑마법 연루는 단순한 가문 폐출이 아니라, 제국 사법부와 교황청에 의해 삼족이 멸하는 대역죄였다.

“제게 그 상세한 거래 장부와 증거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황실이나 이단 집행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에버하르트 가문은 오늘부로 제국 지도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세레나는 품속에서 급히 위조한(하지만 장부 시스템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고증된) 거래 내역서를 꺼내 흔들었다.

버나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손끝이 분노와 공포로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네년이…… 네년이 감히 가문을 협박하는 거냐?! 감히 엘리제를 모함해?!”

“예, 맞습니다! 제가 다 알아버렸습니다!”

세레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분노해라! 그리고 내 뺨을 갈겨라!’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세상에서 가장 가식적이고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혼이 완전히 가출한, 전형적인 K-직장인의 ‘고객님 맞춤형’ 미소였다.

“그러니 숙부님. 가문의 안위를 위해, 이 사실을 아는 저를 당장 가문에서 폐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입을 막기 위해, 부디 제 뺨을 사정없이 때려 주십시오! 이 불효막심하고 영악한 년의 뺨을 갈기시고, 가문의 호적에서 파내어 당장 쫓아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세레나는 진심을 다해 애원했다. 제발 때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그러나.

버나드의 눈에 비친 세레나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왜곡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조카는 40도에 육박하는 고열로 온몸을 떨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런 최악의 몸 상태에서도, 가문이 대역죄로 멸문지화를 당할까 봐 그 무서운 비밀을 황실이 아닌 ‘가문의 어른’인 자신에게 가장 먼저 가져왔다.

게다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누명을 쓰고 폐출되어 주겠다며, 자신을 때려 쫓아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아이는…… 세레나는…….’

버나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동안 자신과 엘리제가 이 가여운 아이를 얼마나 모질게 구박했던가. 사지로 몰아넣고 악녀라 부르며 멸시했다. 그런데도 세레나는 가문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며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있었다.

“세레나…… 너, 설마…….”

버나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로 가득했던 그의 눈빛에 난생처음으로 깊은 회한과 기괴한 죄책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가문이 파멸할까 봐…… 엘리제의 죄를 덮고 너 혼자 모든 오명을 뒤집어쓴 채 쫓겨나겠다는 말이냐? 이 늙은 숙부에게 매를 맞으면서까지……?”

“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때려달라고요! 세게! 왼뺨 오른뺨 번갈아서 템포 빠르게!”

세레나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버나드의 귀에는 그 절규가 ‘어서 자신을 희생시켜 가문을 구하라’는 성녀의 비장한 촉구로 들릴 뿐이었다.

[버나드 에버하르트의 극심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발생! +40,000G!] [경고! 보유 자산이 추가로 폭증합니다! 페널티 강도가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아아악! 아니야! 아니라고! 왜 더 올라가는데! 때려! 때리란 말이야, 이 늙은 대머리 독사 새끼야!”

세레나가 결국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버나드는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세레나의 뺨을 향해 다가갔다. 비록 죄책감에 젖은 손길이었지만, 어쨌든 물리적 타격만 가해진다면 50,000G는 탕감받을 수 있었다.

세레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온다! 구원의 손찌검이 온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귀빈실의 두꺼운 대리석 벽면이 통째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자욱한 먼지와 잔해 사이로, 번쩍이는 금빛 마력이 어둠을 가르고 뿜어져 나왔다. 눈부신 후광을 등지고 나타난 것은, 황실 기사단과 마법 장교들을 거느린 황태자 킬리안 드 루미나스였다.

“어디서 감히 그 더러운 손을 놀리느냐!!!”

킬리안의 포효가 방 안을 뒤흔들었다. 그의 벽안이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버나드가 미처 손을 거두기도 전에, 킬리안이 공간을 접어 다가오듯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콰득-!

“아아아악!”

날카로운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버나드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킬리안이 버나드의 손목을 꺾어 그대로 바닥에 메쳐 버린 것이었다.

버나드는 부러진 팔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세레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방금 부러진 저 팔은…… 자신에게 50,000G짜리 뺨따귀를 선사해 줄 유일한 희망의 오른팔이었다.

“안 돼…… 내 오만 골드…… 내 뺨따귀…….”

세레나의 입에서 영혼이 가출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킬리안은 지체 없이 세레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값비싼 비단 망토를 벗어 세레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조금만 힘을 주면 깨져 버릴 유리 정원 속 백합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세레나! 늦어서 미안하오. 이 벌레만도 못한 자가 그대의 고결한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내 당장 이 자의 가문 전체를 반역죄로 다스려 멸하겠소!”

킬리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세레나가 피를 토한 흔적을 보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요! 전하! 왜 부러뜨렸어요! 왜!”

세레나가 킬리안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절규했다.

“그냥 한 대만 맞으면 됐는데! 왜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려서 남의 사업 계획을 다 망쳐 놓는 건데요! 차라리 전하가 때려요! 제발 날 한 대만 쳐요! 욕이라도 해 달란 말이야!”

그녀의 눈물겨운 절규는, 킬리안의 눈에는 ‘자신이 처한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무너져 내리는 성녀의 초인적인 아집’으로 완전히 오역되었다.

“아아, 세레나…….”

킬리안이 그녀를 품에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요동쳤다.

“그대는 어찌 이리도 바보 같단 말이오. 자신을 해치려던 가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매를 맞으려 하다니……! 그대의 그 깊은 자비심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구려. 내 평생을 바쳐 그대에게 속죄하겠소!”

[황태자 킬리안의 구원 집착 및 죄책감 한계 돌파! +150,000G!] [경고! 경고! 경고!] [보유 자산이 한계를 초과하여 우주를 뚫고 상승합니다!] [운명 보정력의 2차 페널티가 즉시 소환됩니다! 체온이 41도에 도달하며, 급성 마력 폭주로 인한 실신 상태 이상이 추가됩니다!]

“커헉……!”

세레나는 입으로 한 움큼의 피를 더 쏟아냈다.

이 미친 황태자 새끼가 기어이 제 무덤을 파는구나. 도와주러 온 구원자가 아니라,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머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 속에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킬리안의 품 안으로 툭 꺾이며 쓰러지려던 바로 그 순간.

귀빈실의 부서진 입구 너머로, 차가운 저음의 목소리가 찌르듯 파고들었다.

“황태자 전하. 제 귀중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그렇게 함부로 안고 계시면 곤란합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흑발에 날카로운 안경을 쓴 사내. 벨몬트 상단의 젊은 행주, 루카스 벨몬트가 고위 용병단을 이끌고 기사단의 앞을 가로막으며 걸어 들어왔다.

루카스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황실 인장이 찍힌 서류 한 장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에버하르트의 영애도, 전하의 사유물도 아닙니다. 여기, 제국 법원과 황실 사법부가 공동 승인한 ‘세레나 영애의 신변 보호 및 남부 에르제 영지 개발 독점권에 대한 임시 처분 영장’입니다. 세레나 영애의 신변은 이제 벨몬트 상단이 공식적으로 위탁 관리합니다. 손을 떼시지요, 전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쓰러져 가던 세레나의 흐릿한 동공이 ‘남부 에르제 영지 독점권’이라는 단어에 미세하게 회복세를 보이며 경련했다.

하지만 몸을 지배한 지독한 고열과 폭증한 자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세레나는 결국 검은 심연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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