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가 저와의 화해를 청하다니, 참으로 자매간의 우애가 깊어지는 따뜻한 제안이군요.”
세레나는 찻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영혼 없는 눈동자로 마사를 응시했다.
“마사. 엘리제에게 전하세요. 내일 오후 티타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기쁘게 음미하겠다고 말입니다.”
세레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영혼이 완전히 출가해 버린 듯한 그 우아하고도 섬뜩한 미소에, 가문의 전속 시녀 마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차갑게 벼려진 은쟁반을 든 마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의 세레나였다면 당장 찻잔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엘리제의 가식에 분노를 터뜨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세레나는 마치 내일 점심 메뉴로 무엇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는 직장인처럼 지극히 담담하고, 심지어는 기묘한 기대감마저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의 뜻대로 전하겠습니다.”
마사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한 채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복도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레나는 마사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앞에 서서 영혼 없는 비즈니스용 미소를 유지했다. 문이 닫히고 온전한 혼자만의 공간이 되자마자, 그녀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안면 근육을 툭 풀었다. K-직장인 시절 영업 부서에서 다져진 미소 근육이 뻐근하게 아우성을 쳤다.
“와, 진짜 대박이네. 가문 공금을 털어서 독약을 사?”
세레나는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파르스름한 반투명 빛무리와 함께, 오직 세레나의 눈에만 보이는 [호감도 회계 장부]의 시스템 창이 눈앞에 스르륵 떠올랐다.
================================== [보유 감정 자산 (부채 총액)] - 황태자 킬리안: 850,000 골드 (집착 및 죄책감) - 상인 루카스: 420,000 골드 (독점욕 및 신뢰) -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 300,000 골드 (의심 및 경외)
※ 경고: 현재 감정 부채액이 위험 수치에 도달해 가고 있습니다. '운명 보정력' 작동까지 앞으로 130,000 골드 남음. 과부하 시 즉시 '급성 열병 및 불운' 페널티가 청구됩니다. 주기적인 부채 탕감(뺨 맞기, 욕먹기 등)을 권장합니다. ==================================
“장부야, 일 잘하네. 아주 실시간으로 경고 때려주는 것 봐.”
세레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남주들이 아주 자기들 멋대로 불쌍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바람에 장부의 자산은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화의 기적을 일으키기도 전에 고열로 뇌가 먼저 구워질 판이었다.
게다가 원작에서 독살의 매개체로 쓰였던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
1화에서 엘리제가 악마 숭배 상인에게 거액의 가문 공금을 횡령해 은밀히 구매했다는 그 금기의 독약이 드디어 내일 배달된다는 뜻이었다. 원작의 세레나는 저 독을 마시고 마력이 뒤틀려 폐인이 된 뒤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내 은퇴 자금 마련을 위해, 그리고 이 빌어먹을 감정 부채를 합법적으로 탕감하기 위해 아주 귀하게 써주마.”
세레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마력 통신석을 톡톡 두드렸다. 루카스가 주고 간 통신석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했다. 세레나는 마치 내일 오전의 중요 바이어 미팅을 준비하는 팀장처럼, 아주 차분하고 일관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 오후, 아주 볼만하겠어.”
* * *
다음 날 오후, 아카데미 기숙사 뒤편에 자리한 야외 정원.
이곳은 귀족 영애들의 사교장으로 쓰이는 장소답게 화려한 장미 덩굴과 백대리석으로 조각된 분수대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이 무색하게도, 정원 중앙의 하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자매 사이에는 팽팽한 냉기만이 맴돌았다.
“언니, 와주셔서 정말 기뻐요. 전 언니가 제 제안을 거절하실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요.”
엘리제 에버하르트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가련하게 웃었다. 하얀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고 순진한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레나의 눈에는 엘리제의 가식 너머로 붉게 일렁이는 시스템의 경고창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시스템 알림: 대상 '엘리제 에버하르트'의 살의 수치 98%] [위험! 인근 찻잔에서 '고대 흑마법 독약 성분' 감지. 섭취 시 마력 영구 붕괴 및 신체 마비 유발.]
‘와, 진짜로 탔네. 냄새 한 번 지독하다.’
세레나는 눈앞의 홍차 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찻잔 가장자리에 아주 미세한 보라색 마력의 잔향이 일렁이고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최고급 홍차의 붉은 수색으로 보이겠지만, 이미 장부 시스템을 통해 정보를 확인한 세레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엘리제는 가문의 공금을 빼돌려 산 그 값비싼 흑마법 독약을 아주 아낌없이 털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제가 어찌 동생의 그 고결하고 따뜻한 초대를 거절하겠습니까.”
세레나는 K-직장인 특유의 영혼이 완전히 출가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 톤은 비즈니스 미팅에서 VIP 고객을 응대할 때처럼 한없이 상냥하고 나긋나긋했지만, 눈동자만큼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의 그 눈물겨운 정성에 보답하고자, 저 또한 한 걸음에 달려왔사옵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세레나의 지나치게 정중하고 뼈가 있는 극존칭에 엘리제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더러운 년, 네가 감히 나한테 이런 수작을 부려?"라며 찻잔을 엎었을 언니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자신을 한참 아래의 부하 직원 대하듯 여유롭게 대하고 있었다. 엘리제는 이를 악물며 다시금 가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니의 그 따뜻한 말씀에 가슴이 벅차올라요. 자, 어서 차가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특별히 언니의 건강과 앞날을 축복하며 제가 직접 우려낸 남부의 명차랍니다.”
엘리제는 어서 마시라는 듯 찻잔을 세레나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기대감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독약이 든 홍차를 단 한 모금이라도 마시는 순간, 세레나의 마력은 폭주할 것이고,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이단 집행관들이 즉각 들이닥쳐 이단 마력 소지죄로 세레나의 목을 벨 터였다.
그 완벽한 파멸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엘리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세레나는 호락호락한 원작의 악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코끝에 대고 향을 음미하는 척하더니, 아주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엘리제의 눈이 흥분으로 번쩍였다. 마셔라, 어서 마셔버려!
그 순간, 세레나는 찻잔을 입가에서 멈추고는 엘리제를 똑바로 응시했다. 영혼 없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엘리제. 참으로 눈물겨운 자매애로군요. 귀하신 동생의 이 핏빛 배려와 정성을, 감히 제 비천한 목구멍으로 넘기는 호사를 누려도 될지 송구할 뿐입니다.”
“네……? 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엘리제가 당황해 묻는 찰나였다.
세레나는 주저 없이 자신의 손목을 꺾었다.
촤아아아악!
“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정원에 울려 퍼졌다.
세레나가 찻잔에 가득 담겨 있던 뜨거운 홍차를 자신의 가슴팍과 드레스 자락, 그리고 양손에 사정없이 끼얹어 버린 것이었다. 붉은 찻물이 순식간에 세레나의 하얀 드레스를 피처럼 물들였다. 그리고 독약 성분이 피부에 닿자마자, 고대 흑마법 특유의 보라색 불꽃과 함께 치지직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언, 언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리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계획에는 세레나가 차를 마시고 조용히 독 마비 증세로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대낮에, 그것도 스스로 차를 몸에 뿌려 독극물 반응을 시각적으로 완전히 노출시키는 광기 어린 짓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아, 뜨거워라……! 동생이 준 소중한 선물이 제 몸을 타오르게 만드는군요!”
세레나는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는 비장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지극히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좋아, 타이밍 죽이게 맞아떨어졌어. 연기력 100점 만점에 120점이다, 세레나.’
피부에 닿은 독약 때문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이 정도는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야근을 견디던 K-직장인의 인내심에 비하면 껌값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이 자해 소동은 확실한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완벽한 미끼였다.
콰아아앙!
기다렸다는 듯이 정원의 철제 울타리와 대리석 아치가 폭음과 함께 박살이 나며 흩어졌다.
“세레나!”
귀를 찢는 듯한 고함과 함께, 흑청색 마력을 두른 황태자 킬리안이 검을 뽑아 든 채 정원 안으로 난입했다. 그의 뒤에는 은빛 갑주를 입고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는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가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세레나가 비명을 지르기 전부터 루카스가 심어둔 정보원들과 세레나의 사전 연락을 통해 정원 인근에서 대기 중이었다. 세레나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들은 이성을 잃고 결계를 박살 내며 들어온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엘리제는 사색이 되어 입을 벌렸다. 황태자와 이단 집행관이 왜 이 타이밍에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세레나! 정신 차려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킬리안이 허겁지겁 세레나의 곁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레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하얀 드레스는 피처럼 붉은 홍차로 젖어 들었고, 그녀의 고운 피부 위에는 보라색 마력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점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세레나는 덜덜 떠는 연기를 하며, 붉게 물든 손으로 킬리안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영혼을 가출시킨 처연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동생 엘리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언니인 저와 화해를 하고 싶어 차를 건넸을 뿐입니다. 제 비천한 몸뚱이가 감히 동생의 고결한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모양이 되었으니…… 제 불찰입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네 몸에서 피어오르는 이 불길한 마력은 대체 뭐란 말이냐!”
킬리안의 눈이 분노와 절망으로 붉게 뒤집혔다.
그 순간,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주시하던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가 세레나의 옷자락에 묻은 보라색 그을음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에 닿은 마력이 차갑게 반응하며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하인리히의 눈동자가 잔혹하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제국에서 엄격히 금지된 고대 흑마법의 고독(蠱毒) 성분입니다. 섭취하거나 피부에 닿는 즉시 마력 회로를 오염시켜 폐인으로 만드는 금기의 마약이지요.”
하인리히의 선언에 정원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흑마법…… 독약이라고?”
킬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분노가 극에 달해 오히려 차갑게 식어버린 폭풍 전야의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엘리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엘리제 에버하르트. 네가 지금 내 눈앞에서 제국의 영애이자 네 친언니를 흑마법 독약으로 살해하려 획책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전하! 오해이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홍차를 다려왔을 뿐이에요! 저 사악한 위선자가 스스로 독을 뿌려 저를 모함하려는 것입니다!”
엘리제는 억울함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진짜 억울했다. 자신이 독을 타긴 했지만, 세레나가 저렇게 스스로 몸에 드립다 부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엘리제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닥쳐라!”
킬리안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엄청난 마력의 파동이 정원을 휩쓸며 엘리제를 짓눌렀다.
“자신의 몸을 저토록 상해가면서까지 너를 감싸려 하는 세레나를 두고, 감히 모함이라는 추악한 단어를 입에 담느냐! 네 불경함과 악독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킬리안의 눈에는 세레나의 가식적인 극존칭과 자해 행위가 오직 ‘동생의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고 물러나려는 눈물겨운 희생’으로 완벽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세레나를 오해하고 외면했던 기억들이 겹쳐지며, 그의 가슴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전하…… 제발 동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에버하르트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일은 조용히 묻어두는 것이…….”
세레나는 킬리안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그래, 더 화내라. 더 미안해하고, 더 집착해라! 내 장부의 자산아, 쑥쑥 늘어나라!’
그녀의 속삭임은 킬리안의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니다, 세레나. 이번만큼은 내 너를 향한 추악한 음모를 묵과하지 않겠다. 평생 너를 외면했던 나를 벌하고, 네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킬리안은 세레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다.
“에버하르트 가문의 엘리제를 즉각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라! 황실 직속 재판이 열릴 때까지 그 어떤 접견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저년이 반항한다면 사지를 꺾어서라도 끌고 가라!”
“전하! 전하! 살려주십시오! 언니가 저를 함정에 빠뜨린 것입니다! 아아악!”
엘리제는 황실 기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비참하게 끌려갔다. 화려했던 드레스는 흙먼지로 더러워졌고,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가문의 후계자 자리와 사교계의 명예는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띵동!]
그 순간, 세레나의 머릿속에 쾌활한 시스템 효과음이 울려 퍼졌다.
================================== [감정 부채 대폭발 알림] - 대상 '킬리안 드 루미나스'의 집착 및 속죄 부채가 극대화되었습니다! - 획득 자산: +1,500,000 골드 - 현재 보유 총자산: 3,070,000 골드
※ 경고: 감정 부채액이 임계치를 심각하게 초과하였습니다! '운명 보정력'이 작동합니다. 페널티로 '급성 마력 열병'이 즉시 청구됩니다. 30초 후 의식을 상실합니다. ==================================
‘야, 잠깐만. 150만 골드? 대박이긴 한데…… 페널티가 지금 온다고?!’
세레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열기와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세레나? 세레나! 정신 차려라! 의원을 불러라! 당장 아카데미의 모든 치유사들을 집합시켜라!”
킬리안이 오열하며 세레나를 품에 안고 소리쳤다. 그의 눈물방울이 세레나의 뺨 위로 툭툭 떨어졌다. 세레나는 몰려오는 열병 속에서도 킬리안의 그 처절한 후회 어린 얼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이걸로 엘리제는 완벽하게 매장했고, 내 은퇴 자금은 300만 골드를 돌파했다. 이제 남부에서 빙수 기계랑 프리미엄 오븐을 최고급으로 들여놓을 수 있겠어…….’
세레나는 밀려오는 어둠 속으로 기분 좋게 침잠해 들어갔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레나가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을 때, 코끝을 찌르는 것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차가운 알현실의 대리석 향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화려한 기숙사 방이 아닌, 이단 심문관들의 직속 심문실 벽면이었다.
“……음.”
세레나가 나직하게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누군가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눌러 제지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직 마력 폭주로 인한 열병이 완전히 내리지 않았습니다.”
나직하고 차가운, 그러나 묘한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
고개를 돌린 세레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의 수려한 얼굴이었다. 그는 평소의 얼음장 같은 표정과는 달리, 제법 초조한 기색으로 세레나의 침상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고급 실크 손수건을 꺼내어, 세레나의 젖은 앞치마와 드레스 자락에 묻은 붉은 찻자국을 극도로 조심스러운 손길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하인리히 경…….”
세레나는 힘겹게 숨을 내쉬며, K-직장인 특유의 가식적이고 우아한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였다.
“이런 비천한 악녀의 몸에 집행관님의 그 고결한 손길이 닿다니,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죗값은 제가 치를 터이니, 부디 경의 그 깨끗한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세레나는 그저 이 귀찮은 집행관을 빨리 떼어내고 쉬고 싶은 마음에 평소처럼 벽을 치는 대사를 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하인리히의 손길이 딱 멈추었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스스로 독약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동생의 죄를 덮으려 하고, 이 상황에서도 타인의 명예를 먼저 걱정하며 자신을 ‘악녀’라 자칭하는 이 여인. 대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이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깎아내린단 말인가.
하인리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가슴속에서 세레나를 향한 묘한 소유욕과, 그녀의 위선 뒤에 숨겨진 그 눈물겨운 진실을 끝내 파헤쳐 구원해내겠다는 왜곡된 사명감이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품속에서 이단 신문관 전용 수첩을 꺼내 들었다. 사각거리는 깃펜의 끝이 세레나의 얼굴 위로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세레나 영애. 당신의 그 깊은 상처와 진실을…… 제가 전부 기록해 드리겠습니다.”
하인리히의 집착 어린 눈빛이 세레나의 영혼 없는 보랏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