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타십시오! 에버하르트 가문에서 영애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엘리제가 움직였어요!”
마차 창문 너머로 상체를 절반이나 쑥 내민 루카스 벨몬트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었다. 언제나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기고 다니던 금발 머리가 이마 위로 헝클어져 내린 꼴이, 그가 얼마나 정신없이 마차를 몰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레나는 골목길 모퉁이에 아직 멀뚱히 서 있을 이단 집행관 하인리히의 기척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이쪽의 소란까지는 아직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금 전 하인리히를 상대로 영혼의 똥꼬쇼를 펼치며 퇴근길을 사수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벨몬트 상단의 젊은 행주가 마차를 들이받을 기세로 돌진해 오다니. 이놈의 아카데미는 주말 야근이 끝도 없이 밀려드는 블랙기업이 틀림없었다.
“에버하르트 가문에서 저를요? 거참, 주말 교대 근무조차 배려하지 않는 무자비한 긴급 호출이군요.”
세레나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날렵하게 몸을 던졌다.
덜컹!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마차가 거칠게 출발했다. 마차 내부의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이 깊숙이 파묻히자, 루카스가 다급하게 문을 걸어 잠그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황태자 전하의 감시망이 아카데미 외곽까지 뻗어 있습니다. 그 눈을 피해 영애를 외곽 안전지대로 빼돌리려면 제 비밀 상단 루트를 이용해야 합니다. 자, 이걸 보십시오.”
루카스가 품 안에서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장부를 꺼내 들었다. 벨몬트 상단의 극비 가입 명부이자, 황실조차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의 거래 장부였다.
“제국 전역의 비밀 안전 가옥과 위장 신분 목록입니다. 이 명부에 영애의 이름을 올리고, 벨몬트의 전속 고문 자격으로 신분을 세탁해 드리겠습니다. 황태자라 할지라도 상단의 정식 임원을 명분 없이 체포할 수는 없으니까요.”
루카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세레나가 가문의 음모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단두대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이성적인 뇌 회로를 일시 정지시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세레나의 머릿속은 지극히 차갑고 맑았다. 그녀는 슬며시 손가락을 뻗어 루카스가 내민 가죽 장부의 모서리를 톡톡 두드렸다.
“루카스 님. 제안은 매우 흥미롭고 감사합나다만, 비즈니스 세계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지요. 벨몬트의 전속 고문직이라니, 제게 청구될 ‘수수료’와 배당금 분배율은 어떻게 책정되어 있습니까?”
“……예?”
루카스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갑자기 수수료와 배당 비율을 따지는 영애라니. 그의 상인 인생 삼십 년 동안 이런 종류의 인간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세레나는 K-직장인 특유의 영혼 없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신뢰감을 주는 비즈니스용 미소를 마스크처럼 장착했다.
“에버하르트 가문과의 법적 분쟁 및 이단 심문 대처에 벨몬트 상단의 명의를 대여하는 비용, 그리고 제가 제공할 미래의 투자 포트폴리오 자문료. 이 모든 것을 합산한 손익계산서가 선행되어야 계약이 성립됩니다. 사적인 감정이나 동정표는 배제하고, 철저히 수수료 기반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그녀는 품 안에서 깃펜과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고 막힘없는 솜씨로 계약 조항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감정적으로 얽혔다간 장부의 호감도 부채가 폭발해서 내 뚝배기가 깨진다. 철저한 자본주의적 갑을 관계로 선을 그어야 해.’
세레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 계약서 제3조 2항을 보시죠. ‘을’인 벨몬트 상단은 ‘갑’인 세레나 에버하르트의 자산 방어를 위해 물리적, 법적 실드를 상시 무상 제공하되, 이에 따른 지분 요구권은 원천 차단한다. 또한, 향후 남부 상권 진출 시 발생하는 순이익의 80%는 신규 특허권자인 저에게 귀속됩니다. 동의하십니까?”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레나는 루카스가 불공정 계약이라며 화를 내거나, 혹은 자신을 영악한 속물이라 경멸하며 계약을 철회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렇게 정이 떨어져야 장부상의 부채가 탕감될 테니까.
그러나 루카스의 반응은 세레나의 예상 경로를 완전히 이탈해 버렸다.
툭.
루카스의 손가락바닥에서 장부가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깊은 슬픔과 충격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
루카스는 세레나의 꼿꼿한 자세와,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계약서의 글씨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토록 처절한 방어벽이 또 있을까. 가문에서는 의붓동생에게 음해당해 목숨을 위협받고, 믿었던 황태자에게는 외면당했다. 그 모진 풍파 속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오직 ‘돈’과 ‘계약’이라는 차가운 쇳덩이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믿었다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아예 감정이 들어설 자리를 지우고 자본주의라는 단단한 껍질 속으로 기어 들어간 가련한 영애.
루카스의 심장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려왔다. 그녀가 지어 보이는 저 완벽하고 이지적인 미소가, 실은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영혼의 가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레나 영애…….”
루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에게 세상은 오직 거래와 계약으로만 이루어진 차가운 곳이었군요.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이곳에서…… 고작 이런 종이 쪼가리만이 당신을 지켜줄 유일한 방패였다니.”
“예? 아니, 방패라기보다는 그냥 지분 세탁용 서류…….”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어.”
루카스가 세레나의 손을 덮어 잡았다. 그의 손 끝바닥이 따뜻하게 젖어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8대 2? 아니, 9대 1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계약서의 모든 조항에 벨몬트 상단의 인장을 찍겠습니다. 제 자금, 정보망, 심지어 제 목숨줄까지 전부 영애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그러니 제발…… 저에게만큼은 그렇게 슬픈 미소로 선을 긋지 말아 주십시오.”
[딕-!] [알림: 공략 대상 ‘루카스 벨몬트’가 극도의 죄책감과 연민, 보호욕을 동반한 ‘신뢰 비즈니스 부채’를 각성했습니다.] [루카스 벨몬트의 감정 부채액: 150,000,000 골드 돌파!] [보유 자산이 한계치를 초과하여 실시간으로 누적됩니다. 주의: 누적 자산 과다로 인한 ‘운명 보정 페널티(급성 오한 및 발열)’ 유예 기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왜 혼자 감동을 쳐먹고 난리야?!’
세레나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시스템 경고음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산이 쌓이는 건 좋은데, 부채액이 1억 5천만 골드를 넘어가 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내일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고열로 뇌가 통구이가 될 판이었다.
“루카스 님, 진정하세요. 저는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아주 지극히 자발적이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중인데요? 제 눈에 서린 이 욕망의 안광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세레나가 눈을 부릅뜨며 황금빛을 갈구하는 탐욕의 눈빛을 연기해 보였다. 그러나 루카스의 눈에는 그것마저 ‘자신의 비참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강한 척하는 성녀의 눈물겨운 광대극’으로 필터링되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웃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의 그 깊은 상처, 제가 반드시 벨몬트의 모든 재력을 동원해서라도 치유해 드리겠습니다.”
루카스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세레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 오해의 늪은 밑바닥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삽질을 해도 결국 ‘세레나는 가련하고 고결한 피해자’라는 결론으로 수렴하는 이 세계관의 보정력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아, 좋습니다. 계약서는 이대로 집행하는 것으로 하죠. 도장 찍으세요.”
세레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수첩을 내밀었다. 루카스는 마치 성스러운 성물에 손을 대듯 경건한 태도로 상단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을 꺼내 계약서 위에 꾹 눌렀다.
쾅!
선명하게 찍힌 황금빛 인장을 보며 세레나는 겨우 위안을 얻었다. 어쨌든 제국 최고의 상단이 그녀의 완벽한 뒷배가 되었고, 은퇴 자금의 세탁 경로 역시 아주 단단하게 구축되었으니까.
그때, 루카스가 계약 수첩을 덮으며 생각났다는 듯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계약 합의의 덤으로 영애께 처리 곤란한 애물단지 하나를 넘겨드리고자 합니다. 남부 에르제 지대에 저희 상단이 소유한 영지가 하나 있습니다만…….”
“에르제 영지요?”
세레나의 귀가 쫑긋 섰다. 그녀가 점찍어둔 남부 최고의 휴양 예정지였다.
“예. 영지 자체는 사시사철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인데, 그 구석에 아주 골치 아픈 구역이 하나 섞여 있습니다. 고립된 마물 지대의 마력 분출구 분지인데, 주기적으로 불꽃과 열기가 제멋대로 뿜어져 나와서 개발이 전혀 불가능한 땅이죠. 마법사들을 고용해 정화하려 해도 비용만 깨져서, 세금만 갉아먹는 유령 영토로 방치 중이었습니다.”
루카스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영애께서 남부 상권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 하니, 그 쓸모없는 땅의 소유권도 함께 넘겨드리겠습니다. 세금 부담은 저희 상단이 대리 납부하는 조건으로요. 그저 쓰레기 매립지로 쓰시든, 방치하시든 편한 대로 하십시오.”
세레나는 겉으로는 “어머, 그런 골칫덩이를 주시다니요”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꽹과리를 치며 풍악을 울리고 있었다.
‘고립된 마물 지대의 마력 분출구라고?!’
그것은 쓸모없는 땅이 아니었다. 현대의 지열 발전기이자, 무한 동력 가스레인지나 다름없는 초고효율 에너지원이었다.
그 마력 분출구의 열기를 마법 가공식 배관으로 끌어오기만 하면, 24시간 내내 연료비 한 푼 들지 않는 초대형 프리미엄 데크 오븐을 가동할 수 있다. 남부 휴양지에서 구워낼 바삭한 K-크루아상과 따끈한 소금빵의 무한 동력 오븐이 공짜로 생기는 셈이었다.
“루카스 님. 상단의 세금 절감을 위해서라면, 제가 기꺼이 그 불모지를 떠안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파트너십이란 서로의 쓰레기통을 자처하는 법이니까요.”
세레나가 영혼 가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영애…… 진정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이십니다.”
루카스는 세레나의 그 자비로운(?) 제안에 다시 한번 감격의 도가니탕에 빠져들었다.
[딕-!] [알림: 루카스 벨몬트의 감정 부채액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누적 자산: 180,000,000 골드!]
‘아, 제발 그만 올려…… 나 열병 나서 죽는다고!’
세레나는 급격히 올라가는 장부 수치를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벨몬트 상단과의 동업 계약과 남부 에르제 영지의 핵심 권리증 확보라는 대업을 달성했으니, 이 정도 페널티 리스크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차는 어느덧 아카데미 기숙사 후문 근처의 외진 숲길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기숙사 결계 구역이니 걸어가셔야 안전합니다. 가문의 움직임은 제가 상단 정보망을 통해 철저히 감시하고 차단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이 통신석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건넨 마력 통신석을 받아 쥔 세레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밤의 긴급 업무 지원,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럼 귀가 길 평안하시길.”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신속하게 아카데미 교정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지만, 남부 에르제 영지에 차릴 디저트 카페의 청사진을 그리다 보니 가슴속은 이미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기숙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자신의 방 앞 복도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둠이 내린 복도 한구석에서,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세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버하르트 가문에서 세레나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둔 전속 시녀, 마사였다.
마사는 세레나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차가운 은쟁반을 받쳐 든 채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은쟁반 위에는 붉은 실로 봉인된 고급스러운 초대장 한 장과, 은은하게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오는 작은 도자기 찻단이 올려져 있었다.
“세레나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마사의 목소리에는 온기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은쟁반을 세레나의 코앞까지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일 오후, 엘리제 아가씨께서 기숙사 전용 야외 정원에서 아가씨와의 화해를 위한 ‘특별 다과 티타임’을 제안하셨습니다. 이 찻단은 엘리제 아가씨께서 직접 엄선하신 남부 특산 찻잎입니다. 내일 다과회에서 함께 나누고 싶다 하십니다.”
정갈하게 닫힌 찻단 뚜껑 틈새로, 아주 미세하지만 불길하고 기묘한 마력의 잔향이 세레나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것은 단순한 찻잎의 향이 아니었다. 원작 소설에서 엘리제가 세레나를 완벽한 폐인으로 만들기 위해 악마 숭배 상인에게 가문 공금을 횡령해 구했다는 금기의 독약, ‘흑마법 고대 독약 가루’의 냄새였다.
세레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드디어 왔다. 1화에서 장부에 예고되었던 그 치명적인 사망 플래그이자, 동시에 호감도 과부하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자신의 ‘감정 부채’를 일시 불로 탕감해 줄 절호의 찬스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것이다.
“엘리제가 저와의 화해를 청하다니, 참으로 자매간의 우애가 깊어지는 따뜻한 제안이군요.”
세레나는 찻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영혼 없는 눈동자로 마사를 응시했다.
“마사. 엘리제에게 전하세요. 내일 오후 티타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기쁘게 음미하겠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