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야장소의 깨진 기와 틈새로 떨어져 붉게 달아오른 흙가마의 외벽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비명과 함께 기화했다.
의금부 도사 이종수의 손에 들린 붉은 직인의 칙령장이 빗물에 젖어 눅눅하게 울었다. 그의 주변을 에워싼 서른여 명의 군사들이 쥔 환도의 날붙이가 횃불 빛을 받아 시퍼렇게 번뜩였다.
"도사 이종수는 듣거라."
세자 향의 묵직한 음성이 야장소의 흙바닥을 낮게 긁었다. 비록 한밤중의 잠행을 위해 수수한 철릭을 입었으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과 좌중을 압도하는 기상은 감출 수 없었다.
이종수의 무릎이 진흙 바닥으로 툭 꺾였다. 투구 위로 흘러내린 빗물이 그의 눈꺼풀을 적셨지만, 그는 눈을 쓸어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저, 저하... 어찌 이리 비천한 군기시의 가마터에 계시옵니까. 소신, 미처 저하의 안위를 살피지 못하고 무례를 범하였으니 죽여주시옵소서."
"죽여달라 칭하는 자가 병장기를 치켜들고 내 앞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소신들은 오직 사헌부와 의금부의 합동 장계에 따라, 군기시의 화약용 탄재를 훔쳐 사사로이 병기를 제조한 역도들을 체포하라는 법 집행을 수행 중이었을 뿐이옵니다!"
이종수는 꿇어앉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눈길이 세자의 뒤편, 차갑게 식어가는 쇠똥과 석회석 더미 사이에 서 있는 태오에게 닿았다. 그 눈빛에는 훈구파의 거두인 김윤철의 밀명을 완수하겠다는 집념이 서려 있었다.
세자 향은 태오가 벼려낸 신철(神鐵)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칼날에 새겨진 정교한 물결무늬가 횃불 아래서 살아 숨 쉬는 듯 꿈틀거렸다. 향이 입을 열려던 찰나, 태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의금부 도사께 여쭙겠습니다."
태오의 목소리는 파도 하나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세자의 면전에서 노비가 사사로이 입을 여는 것은 엄연한 예법 위반이었으나, 그의 태도에는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기하학적인 냉정함이 있었다.
"어디서 일천한 노비 놈이 감히 조정의 관원에게 주둥이를 놀리느냐!"
이종수의 부관이 목청을 높이며 환도를 반쯤 뽑아 들었다. 그러나 세자 향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들의 폭언을 제지했다. 향의 시선은 태오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이 기괴할 정도로 영민한 노비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지켜보겠다는 묵묵한 무언의 허락이었다.
태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이종수를 응시했다.
"도사께서는 제가 군기시의 물품을 도적질하고 사사로이 병기를 주조하여 대역을 도모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묻건대, 도대체 어떤 법률과 선례를 근거로 저를 기소하시는 것입니까?"
"네 이놈! 군기시의 공용 탄재를 무단으로 유출하여 가마에 처넣은 것이 첫째요, 조정의 허가 없이 사사로이 무기를 주조하여 군기시의 제조 기밀을 독점하려 한 것이 둘째다! 대명률(大明律) 형률 적도조(賊盜條)에 의거하여, 관물을 훔친 자는 장(杖) 일백에 유(流) 삼천리에 처하며, 군기(軍器)를 사사로이 만든 자는 참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이종수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쟁쟁하게 울렸다. 흠잡을 데 없는 국법의 적용이었다. 조선의 모든 기술과 무기 제조권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고, 노비가 사사로이 쇠를 다루어 검을 만드는 것은 역모의 예비 단계로 해석되기 충분했다.
그러나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뇌리 속에서 현대의 정밀한 법리적 인과관계와 조선의 성문법 초안들이 기계 부품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얄팍한 율법 해석이십니다."
태오의 입가에 엷은 조소가 걸렸다.
"조선 건국 이래, 조준 대감과 정도전 선생께서 기틀을 잡으신 경제육전(經濟六典)과 현재 조정에서 논의 중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공장(工匠) 조항을 단 한 번이라도 정독해 보셨습니까? 사노비와 공노비를 막론하고, 장인이 사적인 시간인 '납번(納番) 외의 사번(私番)' 때에 스스로의 기예로 벼려낸 기물은 온전히 그 장인의 사유 재산으로 인정받으며, 이를 처분하는 것 또한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를 '사작기예(私作技藝)의 권리'라 칭합니다."
"무슨 해괴한 소리냐! 노비의 몸뚱이와 그 머릿속의 기술까지 모두 상전과 국가의 것거늘!"
"대명률 형률 제이백이십조를 보십시오."
태오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이종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정밀한 논리가 실려 있었다.
"‘공장(工匠)이 관가에 바치는 공물 외에, 사사로이 제조한 기물은 관에서 함부로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만든 이 신철 검은 군기시의 정식 조업 시간 외인 야삼경, 즉 저의 개인적인 사번 시간에 제 개인의 기예로 만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이 기술을 독점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저하께 이 기술을 바쳐 조선의 국방을 강건히 하고자 하였으니, 이를 어찌 사사로이 기밀을 독점한 역모라 하겠습니까?"
"궤변이다! 그렇다면 가마를 채운 저 탄재는 무엇이란 말이냐! 저것은 군기시 창고에서 유출된 국유 탄재가 분명하거늘!"
이종수가 핏대를 세우며 손가락으로 가마 옆에 쌓인 검은 숯더미를 가리켰다.
김윤철 일파가 태오를 옭아매기 위해 파놓은 가장 치명적인 덫이었다. 군기시 내부의 간작들을 포섭해 고의로 장부에서 누락시킨 수입 불량 숯을 야장소 구석에 방치했고, 태오가 가마의 화력을 올리기 위해 그 탄재를 사용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태오의 시선이 그 숯더미로 향했다. 석탄과 목탄이 뒤섞인,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탄재였다. 그러나 태오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종수가 들이민 덫의 파훼법이 설계도처럼 완성되어 있었다.
"저 탄재가 군기시의 국유 물품이라 하셨습니까?"
태오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군기시 장고(掌庫)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탄재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도적질의 명백한 증거다!"
"그렇다면, 저 탄재가 군기시가 아닌 사가(私家)의 정당한 사유 재산이며, 제가 그것을 정식으로 위탁받아 사용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장소 입구의 빗줄기를 뚫고, 차갑고도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차의 바퀴가 진흙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비단 도포를 걸치고 대나무 우산을 쓴 여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경강상인과 대중국 무역망을 쥐고 흔드는 여걸, 예영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건장한 상단 호위무사 서너 명이 궤짝 하나를 들고 따르고 있었다.
이종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는... 송도 상방의 행수인 예영이 아니냐? 이 신성한 군기시 야장소에 상인이 어찌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냐!"
예영은 세자 향을 발견하고는 품위 있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녀의 눈꼬리가 태오를 향해 살짝 휘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계략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다.
"동궁 저하를 뵈옵니다. 천한 장사치가 저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일어나라. 네가 어찌 이 야삼경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냐?"
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예영은 소매 안에서 두꺼운 한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붉은 관인과 상단의 낙인이 선명하게 찍힌 전표였다.
"소녀, 군기시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광산의 철광석과 탄재를 납품하는 상방의 책임자이옵니다. 여기 도사께서 장물이라 주장하시는 저 탄재는, 실상 저희 상단이 명나라에서 수입하여 군기시에 납품하려 하였으나 불순물이 기준치를 초과하여 '불합격 수입 불량 탄재'로 판명 난 물건이옵니다."
예영이 전표를 이종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군기시 조례에 따라 불합격 판정을 받은 물품은 납품업자가 회수하여 폐기 처분해야 합니다. 여기 한성부와 군기시 주부의 낙인이 찍힌 '불량 탄재 반출 및 폐기 공증 전표'가 바로 그 증거이옵니다. 저희 상단은 이 불량 탄재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군기시 노비 태오가 새로운 제철법을 연구하기 위해 실험용 자재가 필요하다 하기에, 정식으로 '위탁 연구 및 가공 계약'을 맺고 양도한 것입니다. 즉, 저 탄재는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저희 상단의 사유 재산이며,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합법적인 거래이옵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군기시 내부 장부에는 저 탄재가..."
이종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김윤철 일파가 흘려보낸 불량 숯의 존재를 태오가 모를 리 없었다. 태오는 이미 이틀 전, 예영을 통해 한성부와 군기시 내부의 행정 맹점을 공략했다. 불량으로 폐기 처분되어야 할 숯들이 장부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것을 포착하고, 예영의 자금력을 동원해 그 폐기 권한을 통째로 사들여 전표를 사후 발행해 둔 것이었다.
"도사 이종수."
태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종수의 고막을 때렸다.
"당신들이 들이민 체포령은 국법을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군기시 내부의 행정 착오를 빌미로 사사로이 무고한 장인을 해치려 한 '무고(誣告)'에 불과합니다. 대명률 형률 무고조에 따르면, 남을 역모로 무고한 자는 그 무고한 죄로 도리어 처벌받는 반좌(反坐)의 법이 적용됨을 알고 계시겠지요?"
"이... 이 건방진 노비 놈이 감히!"
이종수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쥐고 태오를 향해 도약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게 누구냐! 의금부의 군사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리라!"
야장소 외곽의 목조 울타리가 대대적으로 개방되며, 횃불의 물결이 야장소를 가득 메웠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사헌부의 상징인 해태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헌부 대사헌의 직인을 띤 감찰 어사단이 관원들을 대동하고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청년 감찰이 마패와 사헌부의 감찰령을 높이 치켜들었다.
"세자 저하의 밀지를 받고 출동한 사헌부 감찰단이다! 의금부 도사 이종수는 들으라! 너희는 사헌부의 정식 합의와 형조의 윤허 없이, 오직 일방적인 장계와 위조된 칙령장만으로 왕실의 배후가 계신 군기시 야장소를 무단 침범하였다!"
감찰의 서슬 퍼런 외침에 의금부 군사들의 환도가 힘없이 진흙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사법권의 남용이며, 왕실의 권위에 도전한 직권 남용 죄에 해당한다! 또한, 피고인 태오가 제시한 사작기예의 권리와 예영 행수의 정식 공증 전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체포를 강행하려 하였으니, 이는 명백한 사리사욕에 의한 무고이다! 당장 이종수와 그 무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포박하라!"
"저, 저하! 억울하옵니다! 소신은 오직 국법을..."
이종수가 비명을 지르며 세자 향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사헌부 군사들의 거친 손길에 의해 진흙 바닥에 처박혔다.
세자 향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종수의 몰락을 내려다보았다. 향은 품 속에서 태오가 만든 신철 검을 천천히 거두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라 하였느냐."
"예, 저하."
태오가 담담히 읍했다.
"너는 쇠를 다루는 기예뿐만 아니라, 나라의 법률을 다루는 솜씨 또한 내 조정의 어떤 대관들보다도 치밀하구나. 내 오늘 밤, 네가 보여준 신철의 위력과 법리적 혜안을 잊지 않을 것이다. 약조한 대로 너의 면사와 군기시에서의 독자 가마 건립을 즉시 시행토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저하."
세자 향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사헌부 감찰단의 호위를 받으며 야장소를 빠져나갔다. 이종수와 의금부의 패잔병들은 사슬에 묶인 채 빗속으로 끌려갔다.
야장소에는 이제 태오와 예영, 그리고 가마솥 뒤편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석두만이 남았다.
예영이 대나무 우산을 접으며 태오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입가에 매혹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과연 대단하시옵니다, 태오 도련님. 김윤철이 파놓은 숯 구덩이를 역으로 이용해 그들의 목줄을 죄어버릴 줄이야. 덕분에 제 상단도 군기시의 불량 탄재 처리권을 독점하게 되었으니, 이번 거래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상단의 이익만을 생각했다면 이 밤중에 군기시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요."
태오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머, 제 파트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신이 살아야 내가 더 큰 부를 쥐지 않겠어요?"
예영은 소매를 펄럭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야장소를 나섰다.
석두가 그제야 가마 뒤에서 기어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 태오 너 이 자식... 진짜 미친놈이구나. 세자 저하 앞에서 법을 논하며 의금부 도사를 저리 만들어버리다니... 난 평생 쇠만 만지며 살았지만, 오늘처럼 오줌을 지릴 뻔한 적은 처음이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석두 형님."
태오는 가마의 열기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김윤철은 이번 일로 큰 타격을 입었겠지만,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법으로 우리를 묶지 못했다면, 다음 수단은 뻔합니다."
그날 밤, 야삼경이 지나고 사경(오전 1시~3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빗줄기는 완전히 가라앉아 사방이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군기시 야장소의 모든 불이 꺼지고, 태오와 석두가 피로에 지쳐 가마터 옆 가설 가옥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스스슥.
빗물에 젖은 풀잎이 쓸리는 미세한 소리가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야장소 외곽의 어둠 속에서, 검푸른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솟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차가운 쇠사슬과 기름병이 들려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직 하나, 태오가 피땀 흘려 세운 흙가마를 흔적도 없이 불태우고 그의 목숨을 거두겠다는 살의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괴한들의 선두가 손짓을 하자, 수십 개의 기름병이 흙가마 외벽을 향해 소리 없이 던져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