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세자 향(向)의 묵직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야장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빗방울이 가마의 뜨거운 열기에 닿아 치이익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붉은 횃불 불빛이 세자의 푸른 융복 위로 일렁였다. 야장소 바닥의 흙탕물 위로 세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네놈이 나흘 만에 철을 다스리겠다 호언장담한 그 노비 놈이냐?"

세자의 질문에 야장소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저, 전하! 어찌 이리 험한 곳에 예고도 없이 당도하셨나이까!"

뒤늦게 기별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군기시 판사(判事) 김자선이 도포 자락을 진흙탕에 적시며 엎어졌다. 그 뒤를 따르던 주부(主簿)와 서리들 역시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야장소 마당의 젖은 흙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세자의 전격적인 잠행은 군기시 관원들에게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았다.

"시끄럽다. 판사는 입을 다물라."

세자 향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김자선의 말을 잘랐다. 그의 시선은 오직 가마 앞에 서 있는 태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태오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모아 포권(抱拳)을 취했다. 조선의 법도에 따르면 노비가 왕세자를 대면했을 때 머리를 땅에 처박고 숨소리조차 죽여야 마땅했으나, 태오의 행동은 달랐다. 그것은 당대의 비천한 신분이 취할 몸짓이 아니었다. 쇠를 다루는 야장(冶匠)의 우두머리, 즉 기술의 정점에 선 장인으로서 군주를 맞이하는 묵직한 예법이었다.

"군기시 사노(私奴) 태오, 저하를 뵈옵니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밤공기를 가르는 철사처럼 차갑고 정교했다.

"방자하도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느냐!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세자를 호위하던 익위사(翊衛司) 사직이 칼자루를 쥐며 호통을 쳤다. 은빛 검날이 칼집에서 반쯤 흘러나와 횃불 빛을 반사했다.

"두어라."

세자 향이 손을 들어 익위사를 제지했다. 향의 눈에 기이한 호기심이 서렸다. 신분 질서가 하늘과 같은 조선에서, 일개 관청 노비가 자신을 마주하고도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내 듣기로, 군기시의 한 노비가 장담하기를, 사흘 밤낮이면 명나라의 정철(淨鐵)을 능가하는 신철을 뽑아내겠다 했다더군. 조정의 사대부들은 네놈이 요망한 사술로 조정을 기만한다며 당장 목을 베라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냐?"

세자의 시선이 태오의 발치에 놓인 검푸른 철판으로 향했다.

태오는 침묵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는 흙탕물 묻은 손으로 철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석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석두는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도, 태오의 눈빛에 담긴 무언의 압박에 밀려 도가니 집게로 붉게 달구어진 검 날 하나를 집어 올렸다.

그것은 태오가 간이 흙가마에서 뽑아낸 용융강을 석두의 망치질 몇 번으로 대강 두드려 날만 세운 무명의 검신(劍身)이었다.

"저하, 백 번의 말보다 일격의 증명이 확실할 줄 아옵니다."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오라. 기백이 가상하구나. 그렇다면 검증해 보아라."

세자가 손짓하자, 익위사 사직이 자신이 차고 있던 관용 환도(環刀)를 뽑아 들었다. 조정의 정예 갑사들이 사용하는, 이른바 수철로 단련된 명검이었다. 칼날에는 기름이 반질반질하게 흘렀고, 날카로운 기세가 번뜩였다.

"치거라."

세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익위사 사직이 기합 소리와 함께 관용 환도를 내리쳤다.

석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태오는 그 모습을 냉정하게 응시했다.

태오가 만든 무명의 검신과 익위사의 환도가 공중에서 격돌했다.

캉ㅡ!

야장소의 지붕을 뚫고 나갈 듯한 날카롭고 청명한 금속음이 한양의 밤하늘을 갈랐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과 함께 붉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순간, 익위사 사직의 손목이 크게 꺾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관용 환도의 절반이 허공을 돌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흙탕에 처박힌 검날은 정확히 두 토막이 나 있었다.

반면, 석두가 쥐고 있던 태오의 검신은 이 하나 빠지지 않은 채, 여전히 검푸른 광택을 발하며 곧게 뻗어 있었다.

"이, 이것이 어찌..."

사직이 부러진 칼자루를 쥐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 검을 바라보았다. 군기시의 최고 장인들이 수천 번을 두드려 만든 정예 환도가, 일개 노비가 흙가마에서 사흘 만에 구워낸 쇳덩이에 일격으로 박살 난 것이다.

세자 향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부러진 칼날의 단면을 보았다. 단면은 기포 하나 없이 빽빽하고 조밀했다. 조선의 전통적인 초강법(炒鋼法)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극도의 균일함이었다.

"정철(淨鐵)이 아니다... 이것은 대국의 그 어떤 철보다도 맑고 질기구나."

세자가 허리를 숙여 부러진 단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조선의 고유한 기술이 대국의 기술적 자부심을 단 한 번의 격돌로 꺾어버린 순간이었다.

"네놈이 어찌 이 공정을 알아내었느냐?"

세자가 고개를 들어 태오를 쏘아보았다.

태오는 뇌리 속에서 소환되었던 고로(Blast Furnace)와 도가니 제강법의 설계도를 떠올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대 조선의 낙후된 기술 수준에서 석회석을 활용한 탈황 공정과 회전식 흙가마의 온도 조절을 성공시키기 위해, 밤새 진흙을 이기고 말똥을 섞으며 거쳐 간 수십 번의 실패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사옵니다, 저하."

태오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조선의 야장들은 평생을 불순물이 가득한 똥철을 만지며 살았사옵니다. 불순물이 섞인 철은 아무리 두드려도 겉만 번지르르할 뿐, 정작 전장에서 적의 갑주를 뚫지 못하고 부러집니다. 소신은 단지 가마의 온도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석회와 조개껍데기를 넣어 철 속의 잡귀ㅡ황(硫黃)과 인(燐)을 밖으로 몰아냈을 뿐이옵니다."

"황과 인을 몰아냈다라..."

세자는 태오의 공학적인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성리학적 명분이나 음양오행의 조화 따위로 현혹하려 들지 않고,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명확히 짚어내는 태오의 어조에 깊은 인상을 받은 기색이었다.

"모두 물러가라."

세자가 갑자기 명령했다.

"저, 저하! 이자는 신분이 미천한 노비이옵니다. 어찌 단독으로..."

김자선이 급히 만류하려 했으나, 세자의 서슬 퍼런 눈빛에 눌려 말을 잇지 못했다. 익위사와 군기시 관원들이 마지못해 야장소 밖으로 물러났다. 차가운 빗소리가 가마의 열기와 함께 둘만의 공간을 채웠다.

세자 향은 태오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이었다.

"네 신분은 비천한 사노(私奴)다. 율법에 따르면, 노비가 사사로이 병기를 주조하는 것은 모반의 징후로 보아 처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너는 왜 이토록 목숨을 걸고 쇠를 키웠느냐? 신분 상승을 바란 것이냐,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이냐?"

질문은 날카로웠으나, 그 안에는 탐색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태오는 세자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답했다.

"저하, 소신이 바라는 것은 사소한 속량(贖良) 따위가 아니옵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무엇이더냐?"

"조선의 북방 철책을 이루는 철(鐵)을 바꾸고자 함이옵니다."

태오의 말에 세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북방의 철책이라?"

"지금 함경도와 평안도의 병사들이 쥐고 있는 병장기는 여진의 철기군이 지닌 연가마 쇠에 맥없이 부러지옵니다. 명나라는 조선이 강력한 화포와 철갑을 가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매년 정철의 수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사옵니다. 사대의 명분 아래, 조선의 목줄을 쇠로 쥐고 흔드는 것이옵니다."

태오의 어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공학적 효율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이 세자 향의 마음을 정확히 관통했다.

"조선이 스스로 고온의 가마를 세우고, 대륙보다 단단한 철을 자급할 수 있다면, 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북방의 야인들을 제압할 수 있사옵니다. 소신은 그저 조선이 대륙의 압제에서 벗어나, 그 어떠한 열강도 넘볼 수 없는 기술의 패권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이를 위해선 군기시의 구태의연한 제철법을 뿌리째 뽑아내야 하옵니다."

세자 향은 숨을 들이켰다. 일개 노비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정의 영의정이나 병조판서조차 명나라의 이목이 두려워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조선의 가장 아프고도 절실한 국방의 핵심이었다.

"네놈이 참으로 대담하구나."

세자가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에는 기쁨과 동조의 감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내 아바님(세종)을 도와 조선의 자주국방을 실현하고자 불철주야 고민해 왔으나, 조정의 상소문들은 온통 명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명분론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군기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내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자를 만날 줄은 몰랐구나."

세자는 태오가 만든 검신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 검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었느냐?"

"이름은 없사옵니다. 그저 조선이 가져야 할 당연한 철일 뿐이옵니다."

"무명(無名)이라... 참으로 군더더기 없는 이름이로다."

향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기술의 실효성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 환궁하는 대로 아바님께 조달하여 너의 면사(免死)와 군기시에서의 독자적인 가마 건립을 윤허받도록 하겠..."

세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투두둑!

야장소 바닥의 흙탕물이 거칠게 튀는 소리가 들렸다. 야장소 입구의 목조 울타리가 거칠게 부서지며, 횃불을 든 수십 명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가 아니었다. 검은 색 융복에 철릭을 입은 자들, 바로 사헌부와 의금부의 군사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내가 서 있었다. 김윤철의 심복이자 의금부 도사인 이종수였다.

"의금부에서 명을 받고 왔도다! 군기시의 물품을 도적질하고 사사로이 모반의 병기를 주조한 역도들을 체포하라!"

이종수의 호통에 야장소 밖에서 대기하던 익위사들이 칼을 뽑으며 가로막았다.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무기를 휘두르는 것이냐!"

익위사 사직의 외침에 이종수는 당황한 기색 없이 품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칙령장을 꺼내 보였다.

"사헌부와 의금부의 합동 장계에 따라, 주동자 노비 태오와 그 무리들을 현장에서 즉시 체포하라는 어명이시옵니다! 가마에 사용된 탄재(炭材)가 군기시의 정식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장물임이 확인되었사옵니다!"

태오는 이종수의 외침을 듣는 순간,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결국 움직였군, 김윤철.'

머릿속에서 일전에 야장소 구석에 비축해 두었던, 수입 불량 숯의 장부 내역이 스쳐 지나갔다. 김윤철 일파가 군기시에 고의로 흘린 불량 탄재의 존재를, 그들은 오히려 태오가 장물을 훔쳐 썼다는 누명으로 역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세자 향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감히 의금부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면사 조치를 약속한 장인을 체포하려 드는 상황.

"도사 이종수는 듣거라."

세자의 목소리가 야장소의 빗소리를 가르고 낮게 울려 퍼졌다.

이종수는 그제야 횃불 불빛 너머, 어둠 속에 서 있는 세자 향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쥔 체포령은 여전히 굳건했다. 김윤철이 파견한 군사들의 눈빛에는 태오를 반드시 죽여 기술을 인멸하겠다는 결연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조선의 법률과 정쟁의 소용돌이가, 뜨겁게 달아오른 흙가마 앞에서 거칠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