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김윤철의 정예 자객들이 전령 검수를 뚫고 함경 국경 요새를 전격 관통하며 명나라와 여진 밀관과의 접경 지대로 날랜 도주를 감행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

두만강 줄기가 얼어붙어 서슬 퍼런 칼날처럼 빛나는 함경도 온성(穩城) 북방의 한 폐가. 지붕 위로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며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대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산장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촛불만이 이곳이 살아 있는 자들의 경계임을 알리고 있었다.

"물건은 확실하겠지?"

두꺼운 가죽 털옷을 입은 사내가 거친 요동 사투리가 섞인 명나라 말로 물었다. 그의 눈빛은 늑대처럼 번뜩였다. 명나라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소속의 밀관이자, 사신단의 수행 통역관과 선이 닿아 있는 첩자 주자청이었다.

조선 측의 밀관이자 김윤철의 가신인 한성부 이교 출신 노필이 가슴 품에서 겹겹이 보자기료 싸인 가죽 주머니를 꺼내 놓았다.

"우리 대감께서 직접 보증하시는 군기시의 극비 화포 주조법이오. 지난번 시연 때 만조백관의 눈을 멀게 했던 그 신식 대구경 화포의 설계 조판이지."

노필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국경 요새를 뚫고 오느라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손가락 끝은 동상으로 검붉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비단 보자기가 열리고, 닥종이에 치밀하게 그려진 공학적 수치와 투시도가 드러나자 두 사람의 호흡이 일시에 가빠졌다.

도면 위에는 砲身長 七尺 五寸(포신장 7척 5촌), 口徑 三寸(구경 3촌)이라는 정밀한 도량형과 함께, 포신 내부의 미세한 곡선과 약실의 두께가 주사(朱砂)로 붉게 기록되어 있었다. 설태오가 뇌신경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두통을 견디며 그려 낸, 외견상으로는 완벽무결한 조선의 최신식 야포 설계도였다.

그러나 주자청은 호락호락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놋쇠로 만든 이중 자를 꺼내 도면의 수치를 대조해 보더니, 길쭉한 눈매를 좁혔다.

"조선 조정이 그토록 아끼는 무기를 이토록 손쉽게 넘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이 종이쪼가리를 믿을 수 없다. 마침 요동에서 공수해 온 야금 장인들과 소형 가마로 급조한 시제품이 마당에 준비되어 있으니, 당장 방포(放砲)해 보아야겠군."

노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보시오! 이곳은 국경이오. 포성을 울렸다간 군관들이 들이닥칠..."

"닥쳐라. 의심스러운 물건을 요동으로 가져갔다가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사느니, 여기서 내 목숨을 거는 편이 낫다."

주자청의 손짓에 산장 뒷마당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가죽 천이 걷혔다. 그 아래에는 도면대로 급히 주조해 낸, 겉보기에 육중하고 단단한 철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동의 장인들이 사흘 동안 석탄 불순물도 제대로 거르지 못한 채 흙가마에서 뽑아낸 조잡한 선철(銑鐵)로 급조한 포였다.

그들이 화약을 약실에 밀어 넣고 포탄을 장전하는 바로 그 순간.

산장을 둘러싼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적막을 깨트린 것은 화살 깃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었다.

핏! 피빗!

산장 외곽을 지키던 명나라 밀사들의 목덜미에 깃털 화살이 깊숙이 박혔다.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사내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습격이다!"

산장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검은 가죽 갑옷을 입은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예영이 이끄는 상단 소속의 정예 사사로운 무관대와 세자 향의 밀명을 받은 함경도 수색대원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예영의 심복이자 백전노장인 호위무사 장현이 서 있었다.

"역적 노필과 명의 간작들을 생포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장현의 우렁찬 호령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히는 격렬한 금속음이 산장을 가득 채웠다. 명나라 밀관들과 김윤철의 사병들은 다급히 칼을 뽑아 들고 저항했으나, 좁은 가옥 안에서 펼쳐지는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불을 붙여라! 당장 포를 쏴라!"

주자청이 비명을 지르며 조선 수색대를 향해 소형 야포의 도화선에 횃불을 갖다 댔다. 치이익 하며 타들어 가는 도화선의 붉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기괴한 궤적을 그렸다.

장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신형 방패를 앞세우며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라!"

하지만 그들이 바닥으로 몸을 날리기도 전에, 기괴한 파열음이 산장 마당을 뒤흔들었다.

쾅! 쿠구구궁!

그것은 정상적인 방포의 굉음이 아니었다. 포구로 화염과 포탄이 뻗어 나가는 대신, 포신의 허리 부분이 기포가 가득 찬 빵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폭발했다. 사포(沙砲) 현상이었다.

"아아아악!"

포 바로 옆에 서 있던 명나라 포수들과 주자청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깨진 주철 파편들이 날카로운 면도날이 되어 그들의 가슴과 얼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사방으로 붉은 선혈이 튀었고, 화약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설태오가 설계한 이른바 '위조 도면'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태오는 도면의 약실 두께와 방사형 강선 구조를 미세하게 왜곡해 두었다. 고순도의 연철이나 강철이 아닌, 당대 명나라나 조선의 일반적인 석탄가마에서 나온 황(S)과 인(P)이 다량 함유된 저질 선철로 이 포를 주조할 경우, 열팽창 계수와 내부 응력을 견디지 못하고 포신 내부의 미세 균열(micro-crack)이 급격히 전파되도록 공학적으로 유도해 놓은 것이다.

공학적 계산은 단 일 푼의 오차도 없이 적들의 육신을 파괴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분명 도면대로..."

주자청은 한쪽 눈에 박힌 철포 파편을 움켜쥔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손에서 닥종이로 된 가짜 도면이 떨어져 붉은 피로 물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수색대원들이 혼비백산한 생존자들의 목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었다. 도망치려던 노필은 장현의 발길질에 치여 바닥을 굴렀다. 그의 품에서 튕겨 나간 몇 장의 가죽 전표와 서신들이 먼지 쌓인 바닥에 흩어졌다.

장현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서신들을 수거했다. 서신의 겉봉에는 붉은 밀랍으로 김윤철의 사가 기표인 '청송(靑松)'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확실한 물증이로군."

장현이 서신을 펼쳐 들자, 명나라 도지휘사사 측에 조선의 화포 제조 기술을 넘겨주는 대가로 함경도 동북면 일대의 밀수 통제권을 약속받은 구체적인 조항들이 드러났다. 11화에서 예영이 목숨을 걸고 추적해 오던 명나라 사신단 수행 통역관 연계 밀수 무역 일지의 마지막 단서가 이곳에서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노필, 네놈이 감히 나라의 기밀을 외적에게 팔아넘기고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였느냐."

장현의 서늘한 다그침에 노필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나는 그저 대감의 명을 따랐을 뿐이오! 살려주시오! 대감께서 시키신 일이란 말이오!"

"그 대감의 목숨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장현은 차갑게 읊조리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생존자들을 결박하고, 수거한 서신과 폭발한 포신 파편을 마차에 실어라. 한양으로 압송한다!"

같은 시각, 한양 도성의 군기시 야장소.

태오는 깊어 가는 밤의 냉기를 마주하며 흙가마의 온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여전히 도면을 인출할 때마다 찾아오는 신경 마비 증상으로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가마 속에서 이글거리는 숯불보다 더 붉게 빛나고 있었다.

석두가 땀을 닦으며 태오의 곁으로 다가왔다.

"태오야, 정말 괜찮겠냐? 김윤철 그 인간이 사헌부 놈들을 시켜서 우리 가마터를 아예 국유화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다닌다던데. 법전이고 뭐고 그놈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우린 끝장 아니여?"

태오는 가마의 바람구멍을 조절하며 냉소했다.

"석두 아저씨, 법이란 힘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규칙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설계한 덫이지요."

태오는 품 안에서 낡은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서가 아닌, 세종 즉위 초기에 관료들이 법전 정비를 위해 작성했던 경국대전의 초안 격 선례집이었다. 태오가 예영의 상단을 통해 입수한 이 서책의 특정 장에는 누렇게 바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보십시오. 여기 '향화인(向化人) 및 사노비 가문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개간하거나 사적으로 축조한 토지와 요업(窯業) 시설에 대해서는 국가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아니하고는 이를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석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노비한테도 그런 권리가 있단 말이냐?"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입니다.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백성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침탈하는 것은 왕도를 해치고 패도를 걷는 짓이라 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법전을 정비하실 때 이 구절을 넣으신 것은 왕권을 강화하고, 훈구 사대부들이 사적으로 백성의 토지를 찬탈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김윤철이 사헌부를 부추겨 내 가마터를 빼앗으려 한 순간, 그는 왕이 세운 법조문을 정면으로 부정한 역적이 되는 겁니다."

6화에서 태오가 비밀 가마 계약을 맺을 때 예영과 함께 사유 조항을 묶어두었던 장치가, 이제 김윤철의 숨통을 조일 완벽한 법적 무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나를 짓밟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가 딛고 선 땅 자체가 조선의 법이라는 거대한 늪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겁니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인과관계와 공학적 효율성으로 무장한 냉혹한 기술만능주의자의 선언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조정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종대왕이 감기로 인해 병석에 누워 있는 가운데, 세자 향이 대리청정을 수행하며 어전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백관들이 도열한 가운데, 훈구파의 거두 김윤철이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국경에서 자신의 자객들이 이미 명나라 밀관에게 완벽한 화포 도면을 넘겼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저하! 신 김윤철, 간절한 마음으로 상소하옵니다."

김윤철이 홀을 쥐고 허리를 굽혔으나, 목소리에는 세자를 압박하려는 오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군기시의 노비 태오가 사사로이 화포를 제작하여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자초하고 있사옵니다. 이는 사대의 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처사입니다. 또한, 그자가 도성 외곽에 불법으로 가마를 짓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으니, 당장 그 가마터를 사헌부의 이름으로 압수하고, 그 노비 놈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국문하셔야 하옵니다!"

좌우의 백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훈구파 대신들이 일제히 김윤철의 뒤를 부추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셔야 하옵니다!"

김윤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명나라가 설계도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조선의 화포 기술은 명나라의 손에 의해 통제될 것이고, 그 책임을 세자 향과 군기시 노비 태오에게 뒤집어씌워 세자의 대리청정 권한을 박탈하려는 속셈이었다.

세자 향은 옥좌에 앉아 김윤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김윤철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판부사 김윤철의 말이 참으로 엄중하도다."

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라의 기밀을 외적에게 누설하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려 마땅하지. 그런데 김 판부사, 그대의 가신인 노필이라는 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김윤철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노필이라 하심은... 제 가솔 중 하나이나, 며칠 전 가문의 시제(時祭)를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만..."

"고향이라?"

세자 향이 손짓을 하자, 사정전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온몸이 포박되고 얼굴이 피떡이 된 노필과 명나라 밀관 주자청이 의금부 군사들에게 끌려 들어와 바닥에 팽개쳐졌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깨진 포신 파편과 함께 김윤철의 사가 기표가 선명히 찍힌 서신 뭉치가 어전의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김윤철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것이 어찌 된..."

"김 판부사."

세자 향의 목소리가 사정전의 천장을 차갑게 울렸다.

"그대의 가신이 함경도 국경에서 명나라 간작에게 넘기려던 도면과, 그대의 가문 기표가 찍힌 밀수 전표가 여기 있소. 이에 대해 내게 설명해 보시겠소?"

김윤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파멸의 덫이 그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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