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도성의 밤공기를 가른 것은 거친 말발굽 소리였다. 사대문이 굳게 닫힌 야삼경(夜三更), 숭례문의 빗장을 풀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기마 한 필이 있었다. 안장 옆 가죽 주머니에는 김윤철이 서명한 밀서와 함께, 태오가 피땀으로 설계한 대구경 장탄 야포의 화강(火鋼) 주조 도면 사본이 들어 있었다. 요동도사(遼東都司)를 향해 북상하는 그 발걸음은 조선의 군사적 정수를 대국의 손에 넘겨 조정의 정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려는 훈구파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같은 시간, 도성 남쪽 한강 변에 위치한 예영의 사가 밀실.
탁자 위에는 촛불 서너 자루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방 안의 음랭한 공기를 밝히고 있었다. 태오는 미동도 없이 앉아 예영이 펼쳐 놓은 한 장의 문서를 응시했다. 그것은 십이포(十二鋪)의 유통망을 쥔 대방 예영이 함경도 동북면의 밀무역 상단으로부터 입수한 극비 무역 일지였다.
"심양 방면의 군관들이 움직였네."
예영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일지의 한 구석을 짚었다. 서늘한 목소리에는 평소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김윤철의 가문에서 보낸 사령이 낮 동안 가마터 주변을 서성인 것뿐만이 아니야. 그들은 도성 내의 사헌부 관군들에게 뇌물을 뿌려 한밤중에 서소문과 숭례문의 통행을 묵인하도록 손을 써 두었더군. 그리고 방금 전, 가죽 주머니를 품은 기마 무장 하나가 북쪽을 향해 길을 잡았네. 목적지는 명나라 요동도사의 주둔지인 심양위(瀋陽衛)야."
태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공학적 데이터와 함께 조선 지도가 정밀하게 겹쳐졌다. 뇌신경 한구석이 찌릿하며 가벼운 두통이 스쳤다. '역사적 설계도 침탈'의 흔적이었으나, 태오는 가볍게 관자놀이를 누르며 통증을 이겨냈다.
"유출된 도면은?"
"비축해 둔 화강(火鋼)의 탄소 비율과 대구경 포신의 야금 조서 전체일세. 군기시 내부의 간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상세한 수치들이지. 자네가 석두 영감과 함께 수백 번 도가니를 깨뜨리며 얻어낸 그 비법이 고스란히 적혀 있단 말일세."
예영의 목소리에 짙은 초조함이 묻어났다. 사대부의 음모는 언제나 신속하고 잔인했다. 그들에게 국경의 안위나 조선의 자주는 눈앞의 권력을 지키는 것보다 가벼운 가치였다.
"명나라의 대장장공들이 이 도면을 손에 넣는 순간, 조선의 화포 우위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네. 대국의 압도적인 재력과 장인 수만 명이 동원된다면, 우리가 몇 년 걸려 만들 무기를 그들은 단 몇 달 만에 수천 문씩 찍어낼 걸세. 태오, 이건 자네의 목숨줄이 끊어지는 것과 같아."
태오는 대답 대신 촛불을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는 기계처럼 냉정하고 무미건조한 안광만이 빛날 뿐이었다.
"기술의 가치는 가죽 종이 위에 그려진 선과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대방."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 * *
다음 날 새벽, 한양 외곽의 비밀 가마터.
자욱한 매연과 열기 속에서 석두를 비롯한 야장소의 장인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새벽바람이 불어와 화덕의 열기를 식혔지만, 장인들의 가슴속에 들어찬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군기시의 극비 야금 조서가 유출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이 지옥 같은 가마터에도 가차 없이 전해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소리요, 태오 도련님!"
석두가 달궈진 부손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그의 거친 손은 불순물을 걸러내느라 온통 검은 그을음과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우리가 이 흙가마에서 말똥을 섞어가며, 석회석을 부수어 가며 쇳물을 끓인 게 도대체 몇 날 며칠인데! 똥철을 강철로 만들려고 가마 안에서 살다시피 한 우리 장인들의 피땀을, 저 높은 곳에 계신 양반 놈들이 통째로 대국놈들에게 바쳤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도면이 넘어가면 우리는 이제 끝장입니다! 역모죄로 몰려 목이 달아나거나, 대국 사신들이 들이닥쳐 우리를 압송해 갈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어린 장인 하나가 울먹이며 주저앉았다. 가마터의 대기는 순식간에 절망과 분열의 슬픔으로 뒤덮였다. 이들은 천역(賤役)의 사슬에서 벗어나 제 손으로 천하를 가르는 신철을 만든다는 긍지 하나로 버텨온 자들이었다. 법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비와 천민들에게 기밀 유출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태오는 슬픔에 찬 장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감상에 젖어 통곡하는 것은 공학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인 행위였다.
"석두 영감."
태오의 목소리가 장인들의 통곡을 뚫고 엄하게 울렸다.
"영감이 지난 석 달 동안 가마에서 흘린 땀이 겨우 한 장의 종이 쪼가리에 담길 만큼 얄팍한 것이었습니까?"
석두가 붉어진 눈으로 태오를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도가니 철법의 핵심은 배합 비율이 아닙니다. 이 땅의 석탄이 가진 유황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흙가마의 높이를 세 자 두 치로 조절하고, 점토와 모래를 이겨 가마 벽의 두께를 한 자 다섯 치로 유지했던 그 '온도 조절법'입니다. 철광석의 질에 따라 석회석을 세 근 넣을지 네 근 넣을지는 오직 이 가마의 불꽃 빛깔을 보고 결정하는 영감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명나라의 야장들이 그 도면을 보고 용광로를 세운들, 조선의 흙과 석탄의 성질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얻을 것은 오직 메마르고 바스러지는 똥철뿐입니다."
태오는 천천히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쇠망치를 주워 올렸다.
"도면은 미끼일 뿐입니다. 놈들이 조선의 기술을 훔쳤다고 자만하는 바로 그 순간이, 그들의 목줄을 죄어버릴 가장 완벽한 기회입니다."
태오의 어조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강철 같은 태오의 태도에, 동요하던 장인들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석두는 가만히 자신의 투박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백 번의 실패 속에서 불꽃의 온도를 온몸으로 기억해 낸 것은 그 도면을 훔친 자들이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자신들이었다.
"도련님 말이 맞소."
석두가 침을 크게 뱉으며 다시 망치를 쥐었다.
"우리가 만든 가마요. 저들이 종이 쪼가리를 수천 장 복사해 간들, 이 가마에서 나오는 쇳물은 흉내 내지 못해. 우리는 우리 일을 한다. 가마의 불을 더 올려라!"
"가마를 사수하겠습니다!"
장인들의 우렁찬 외침이 야장소를 가득 채웠다. 분열의 위기는 태오의 냉철한 이성 아래 오히려 기술에 대한 맹세로 승화되었다.
* * *
경복궁 동궁전.
세자 향은 태오가 올린 함경도 동북면의 밀무역 일지와 사헌부의 통행 기록을 검토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색은 밤샘 서연으로 인해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김윤철이 결국 선을 넘었구나. 대국의 힘을 빌려 조정의 권세를 독점하고자 나라의 기틀이 되는 화포 기술을 통째로 넘기다니. 이는 명백한 사대망국(事大亡國)의 역모다."
"저하, 격노를 거두시고 신의 계책을 들으소서."
태오가 세자의 앞에 단정히 엎드렸다. 그의 눈빛은 도둑을 맞은 자의 초조함이 아니라, 덫을 놓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김윤철이 훔쳐 간 도면은 진본 사본이 맞사오나, 거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숨겨져 있나이다."
세자 향이 눈을 크게 떴다.
"결함이라니? 군기시의 극비 도면이 아니더냐?"
"그 도면은 신이 일부러 군기시 서고의 가장 하단에 보관해 둔 '폐기 예정 설계도'였사옵니다. 고장력 화강을 얻기 위해서는 탄소 함량을 0.8%에서 1.2% 사이로 유지하고, 인(P)과 황(S)의 함량을 극도로 낮추어야 하옵니다. 하나 놈들이 훔쳐 간 도면에는 황의 조절 수치가 세 배 이상 높게 책정되어 있으며, 포신의 약실 두께 역시 화약의 폭발 압력을 견디지 못하도록 미세하게 얇게 설계되어 있나이다."
태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굄을 세자는 똑똑히 보았다.
"대국의 장인들이 이 설계도대로 대구경 야포를 주조한다면, 포신을 완성하는 것까지는 성공할 것이옵니다. 하나, 첫 번째 화약을 장전하고 사격하는 순간—"
"포신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하겠구나."
세자 향이 무릎을 탁 쳤다.
"파열할 뿐만 아니라, 포신 뒤편의 약실이 비산하여 포를 조작하던 명나라의 군관과 포수들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할 것이옵니다. 대국은 자신들의 기술 부족을 탓하기 전에, 조선이 고의로 결함이 있는 도면을 흘려 대국의 황군을 살상하려 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유출 사태를 철저히 역공의 빌미로 삼아야 하옵니다."
태오는 품 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세자 향의 앞에 바쳤다. 그것은 일찍이 태오가 김윤철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분석해 두었던 조선의 법전 초안이었다.
"이것은 세종대왕께서 친히 다듬으시고 조정의 대제학들이 초안을 작성 중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사유권 조항이옵니다. 특히 '향화인(向化人) 및 사노비 가문의 토지 대지 사유권 보장 선례'를 보소서."
세자 향이 책장을 넘기자, 태오가 가리킨 자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국에 귀화한 향화인이나 사가의 노비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일군 가마와 대지, 그리고 사적인 기술의 산물은 관방의 허가 없이 사헌부나 사간원이 함부로 압수하거나 몰수할 수 없다. 이는 국조의 인덕을 널리 펴고 백성의 생업을 장려하기 위함이라...]
"이 조항을 이용하겠다는 말이냐?"
"예, 저하. 김윤철은 신의 비밀 가마터를 '사적인 역모의 근거지'로 몰아 압수하려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법전에 명시된 바, 신이 이 가마터를 건립할 때 예영 대방의 상단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토지를 매입했으며, 향화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사유 재산으로 등록해 두었나이다. 헌법의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이 선례를 들어 사헌부의 무단 압수수색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역으로 김윤철이 사유 재산을 침해하고 국경 너머로 기밀을 유출한 죄를 명백히 물을 수 있사옵니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성리학적 예법이나 사대주의의 명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조선의 법률적 자구와 공학적 인과관계만을 도구로 삼아 적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더불어, 함경도 동북면의 밀무역 루트를 이용해 이 도면을 운반하는 기마 무장을 지금 당장 잡아서는 안 되옵니다. 그를 살려 보내야 하옵니다."
세자 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살려 보낸다니? 기밀이 대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관하겠다는 말이냐?"
"완벽한 덫을 치기 위함이옵니다. 국경 별감에게 명하시어, 그 무장을 감시하되 국경 요새를 통과할 때 의도적으로 검문을 늦추게 하소서. 그가 명나라 요동도사의 밀관과 접촉하는 바로 그 순간, 현장에서 두 나라의 간작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옵니다. 그리하면 명나라 사신단 역시 조선의 기술을 강탈하려 했다는 외교적 약점을 잡히게 되며, 김윤철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역죄인으로 처단될 것이옵니다."
갑작스러운 고급 도면 도난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태오는 오히려 이를 판을 뒤흔들 완벽한 기회로 바꾸고 있었다. 그의 담대한 지략과 차가운 미소는 세자 향마저 전율케 만들었다.
"네놈은 참으로 무서운 자로구나."
세자 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과인이 주상전하께 윤허를 받아 국경의 정예 별감들을 움직이겠다. 요동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덫을 놓을 것이니, 너는 도성 안에서 김윤철의 목을 칠 올가미를 단단히 조여라."
"신, 저하의 명을 받들어 조선의 기술 패권을 온전히 보존하겠나이다."
태오는 고개를 숙였으나, 머릿속에서는 이미 요동으로 향하는 국경 지도의 붉은 선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 * *
이틀 뒤, 함경도 온성(穩城) 인근의 험준한 산악 지대.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국경 요새의 외곽 숲길을, 먼지를 일으키며 세 필의 기마가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김윤철이 보낸 정예 자객이자 전령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추위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앞에 초소가 보인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소리쳤다. 그들의 품에는 조선의 안위를 뒤흔들 화강 주조 도면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국경 요새의 목책 너머로 조선 수군과 이교(吏校)들의 삼엄한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라면 통과하기 불가능한 철저한 검수망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김윤철이 손을 써 둔 통행증과, 세자 향의 밀명을 받은 별감들의 의도적인 '방조'가 어둠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춰라! 통행증을 제시하라!"
초소의 군관이 가로막았으나, 전령이 내민 붉은 낙인의 서찰을 확인하자마자 군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군관은 슬그머니 목책을 들어 올렸다.
"통과하라."
"가자!"
말발굽 소리가 다시금 국경의 대지를 세차게 두드렸다. 검수망을 뚫고 지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언덕 위 소나무 숲속에서 지켜보던 검은 옷의 사내들이 있었다. 세자 향이 파견한 국경 별감들이었다.
"걸려들었군."
별감의 수장이 품 안에서 화전(火箭)을 꺼내 들었다.
"사냥감이 덫으로 들어간다. 추격을 개시하라. 단, 놈들이 압록강 너머 명나라 밀관의 손을 잡는 그 순간까지 결코 꼬리를 밟혀서는 안 된다."
김윤철의 정예 자객들이 전령 검수를 뚫고 함경 국경 요새를 전격 관통하며 명나라와 여진 밀관과의 접경 지대로 날랜 도주를 감행하는 바로 그 시각, 조선의 운명을 건 거대한 사냥이 국경선 위에서 소리 없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