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정전의 넓은 바닥 위로 흩어진 종이들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김윤철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가문의 기표, 그리고 붉은 인장에 닿았다. 사가의 비밀 창고에서만 사용되던 독점 무역의 낙인이었다.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보다 더 차가운 한기가 그의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척추를 관통했다. 불과 몇 호흡 전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자를 압박하던 사대부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이것은 모함이옵니다! 저들이 사사로이 가문의 인장을 위조하여 소臣을 음해하려는 간계가 분명하옵니다!"

김윤철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관모가 비뚤어지며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눈을 찔렀으나, 닦아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등 뒤에 늘어선 훈구파 대신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조정을 가득 채우던 웅성거림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침묵은 단두대의 칼날보다 무겁게 사정전을 짓눌렀다.

세자 향은 옥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손가락으로 용상의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탁. 탁. 탁.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그 소리가 김윤철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렸다.

"모함이라."

향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명나라 밀관 주자청에게 닿았다. 주자청은 이미 의금부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은 듯, 피가 굳어 눌어붙은 옷자락을 부르르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 옆에 엎드린 김윤철의 가신 노필은 턱뼈가 부러져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침과 피를 흘렸다.

"김 판부사. 그대는 평소 성리학의 대의를 논하며, 사대의 예가 나라의 근간이라 입이 마르도록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대의 가신이 품고 있던 이 밀수 전표에는 어찌하여 군기시의 화약 배합법과 주선제강소의 도면이 명나라 조정의 중간 관리도 아닌, 요동의 밀무역상에게 넘어가려 한 정황이 적혀 있는 것인가."

"세자 저하! 그것은 소신이 관여한 바가 아니옵니다! 가신 노필이 사사로운 탐욕에 눈이 멀어 가문의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옵니다! 저놈을 당장 처형하시어 소신의 결백을 증명해 주시옵소서!"

김윤철은 엎드린 채 노필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 꼬리를 자르고 살아남겠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그때, 조정의 동편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사내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군기시의 푸른 노비 복색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설태오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사대부들의 조정 안에서도 기가 죽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눈앞의 모든 인간관계를 수치와 공식으로 환산하듯, 냉철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김윤철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판부사 대감의 기억력이 참으로 아쉽구려."

태오의 목소리가 사정전에 청아하게 울렸다.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오에게 쏠렸다. 감히 천한 노비가 어전회의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정2품 판수사에게 말을 건네는 불경에 몇몇 대간들이 입을 열려 했으나, 세자 향의 살기 어린 눈빛이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설태오. 대감의 기억을 돕기 위해 준비한 것을 바쳐라."

"예, 저하."

태오는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싼 두꺼운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김윤철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수축했다.

"그것은...!"

"명나라 사신단의 수행 통역관과 연계된 함경도 동북면 기밀 밀수 루트의 무역 일지이옵니다."

태오가 서책을 펼치며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기에, 오히려 그 내용의 참혹함이 더욱 차갑게 다가왔다.

"세종 29년 정묘년 오월 사일. 황해도 평산 광산에서 채굴된 고순도 황 삼백 근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 병부 시랑의 사가로 인도됨. 대가로 백은 오백 냥이 김윤철 판부사의 사가로 유입. 같은 해 구월 십일, 군기시 야장소에서 폐기 처리된 것으로 보고된 불량 조총 열두 자루가 함경도 경원 행영을 거쳐 여진족 올량합 부대에 양도됨. 거래 책임자, 김윤철의 가신 노필."

"네 이놈! 천한 노비 놈이 감히 조정의 중신을 음해하려 가짜 장부를 꾸며냈구나! 저자의 목을 당장 베어야 하옵니다!"

김윤철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좌우를 시위하던 의금부 군사들이 그의 어깨를 억센 손길로 눌러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가 대리석에 부딪혀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가짜라..."

태오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장부는 소인이 홀로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도성 내에서 명나라 상인들과의 거래를 담당하는 경강상단과 예영 행수가 목숨을 걸고 확보한 물류 대조 수첩이옵니다. 장부에 적힌 은자의 이동 경로는 승정원일기의 가문 재산 기록 및 호조의 세무 대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합니다. 대감, 공학적인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유입된 재화의 양과 유출된 군수 물자의 질량이 이토록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데, 이를 어찌 위조라 하겠습니까?"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단순히 화포 기술을 유출하려다 들통난 수준이 아니었다. 지난 수년간 조선의 국경을 위협하던 여진족에게 무기를 팔아넘기고, 국가의 검은 화약 재료인 황을 명나라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쳐온 국가 전복급의 대역죄였다.

훈구파의 영수로서 조정을 호령하던 김윤철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유교적 예법과 사대의 명분을 끄집어냈다.

"저하! 비록 소신의 가솔들이 미숙하여 실수가 있었다 하나, 이는 모두 명나라와의 원만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사옵니다! 저 주선제강소의 불법 가마터 역시 조선의 법도를 어기고 사사로이 화포를 제작하여 명나라를 자극하려 하기에, 소신이 국익을 위해 회수하려 한 것뿐이옵니다! 천한 노비 놈이 사사로이 땅을 차지하고 가마를 짓는 것 자체가 경국대전을 위배하는 대역이옵니다!"

김윤철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노비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으며, 관청의 허가 없이 가마를 짓는 것은 반역의 징후라는 논리였다. 그는 이 법리적 명분만큼은 태오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태오는 이미 김윤철의 이 완고한 명분론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미래의 설계도를 소환할 때마다 겪는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찌릿하게 자극했으나, 태오는 이를 악물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김 판부사 대감. 대감께선 조선의 법전을 참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시는구려."

태오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경국대전 초안, 호전(戶典) 전제(田制) 조항을 기억하십니까?"

김윤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기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향화인(歸化人) 및 국가의 특수한 조업을 수행하는 사노비 가문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국방의 이익에 부합하는 제조 시설을 건립할 경우, 그 토지와 시설의 사유권을 보장하며 성안의 관청은 이를 함부로 압수할 수 없다.' 이는 개국 초, 북방의 안정과 기술 장려를 위해 태조 대왕께서 직접 수립하신 선례이옵니다. 세자 저하의 윤허를 받아 군기시의 명을 수행하는 주선제강소는 이 법령에 따라 완벽하게 합법적인 사유지이며, 국가가 보호해야 할 자산입니다. 대감께서 사헌부 군사를 이끌고 이를 압류하려 한 행위야말로, 국조의 법전을 무시하고 왕권을 찬탈하려 한 초법적 폭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이 무슨 궤변을...!"

"궤변이 아닙니다. 성리학의 대의를 숭상하신다는 분이, 정작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전의 자구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태오의 냉혹한 다그침에 김윤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주장하던 '유교적 법도'와 '법전의 선례'에 의해 스스로가 부정당하는 것이었다. 태오는 현대인의 오만한 훈계가 아닌, 조선의 율법이라는 그들만의 무기로 김윤철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세자 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자비가 남아있지 않았다.

"의금부 도사는 들라."

쾅!

사정전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철갑을 두른 금부도사들과 군사 수십 명이 번뜩이는 창검을 앞세우고 진입했다.

"판부사 김윤철은 사적인 탐욕을 위해 국가의 군기(軍器)를 외적과 결탁하여 유출하였고, 사신단의 통역관과 내통하여 국경의 안보를 무너뜨렸으며, 국조의 법전을 모독하여 왕실의 권위를 흔들었다. 이는 대역무도한 죄인바, 당장 그 관직을 박탈하고 삼족을 멸하며, 가산은 모두 몰수하여 군기시의 군비로 귀속시키라!"

"저하! 저하! 억울하옵니다! 이 나라를 지키려 한 소신의 충정을 알아주셔야 하옵니다! 저 노비 놈의 간계에 놀아나시는 것이옵니다!"

김윤철이 처절하게 울부짖었으나, 금부도사들은 가차 없이 그의 관대를 찢어발기고 상투를 휘어잡았다. 그의 몸에서 화려한 비단 관복이 벗겨져 나가고, 초라한 속곳 차림만 남게 되었다. 평생을 권력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사대부의 영수가, 단 한순간에 사지가 포박된 대역죄인의 신세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끌고 가라."

향의 냉정한 명령과 함께 김윤철과 그의 파당들이 줄줄이 사정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피와 땀 자국만이 지저분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훈구파의 거두가 이토록 처참하고 완벽하게 파멸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명의 노비가 제시한 법리적 증거와 철저한 물증에 의해서 말이다.

세자 향이 태오를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설태오. 그대의 공이 참으로 크도다. 이로써 주선제강소와 군기시의 화포 제작을 가로막던 가장 큰 걸림돌이 치워졌구나."

"모두 저하의 명철하심 덕분이옵니다."

태오는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학자로서의 직관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김윤철이라는 국내의 정적을 제거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거대한 폭풍은 이제 막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직관은 틀리지 않았다.

조정이 채 정돈되기도 전에, 사정전 문밖에서 다급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정원의 주서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하! 저하! 급보이옵니다!"

그가 들고 있는 장계의 끝에는 붉은색의 급령(急令)을 뜻하는 깃털이 세 개나 꽂혀 있었다. 함경도 국경과 서해 안 무역로를 총괄하는 수군절도사로부터 날아온 긴급 파발이었다.

"무슨 일이냐? 그리 호들갑을 떨지 말고 고하라."

향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주서는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장계를 읽어 내려갔다.

"명나라 본국 황제께서... 조선의 사신단 접견을 전면 거부하시고, 양국 간의 모든 육로 및 수로 무역 전선을 폐쇄하라 명하셨다 하옵니다! 또한..."

주서가 침을 삼키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또한 무엇이냐! 어서 말하라!"

"조선이 황국의 간작을 무단으로 억류하고 기밀을 훔쳤다는 빌미를 들어, 명나라 북양 함대의 시위포함 수십 척이 서해 만을 장악하고... 강화도 앞바다를 향해 무력시위를 개시했다 하옵니다! 당장 주선제강소를 폐쇄하고 관련자들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압송하지 않으면, 대군을 몰아 도성을 피바다로 만들겠다는 황제의 칙서가 당도하였사옵니다!"

순간, 사정전 안의 온도가 급격히 빙점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무역 봉쇄와 함대 시위. 명나라라는 거대한 제국이 마침내 발톱을 드러낸 것이었다. 대신들이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고, 세자 향의 눈빛에도 처음으로 깊은 당혹감과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그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설태오만은 가만히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뇌리 속에서, 한 번도 구현되지 못했던 미래의 대구경 장포(長砲) 설계도가 푸른빛을 발하며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렸지만,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기괴할 정도로 냉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