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연무장에 몰아치던 화약 냄새와 쇳가루 섞인 바람이 김윤철의 한마디에 일순간 굳어버렸다. 신식포의 포신에서 피어오르던 옅은 백연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조정 관원들의 침묵 속으로 흩어졌다. 방금 전까지 무신들이 터뜨렸던 함성은 간데없고, 오직 명나라라는 대국의 이름이 주는 무거운 압박감만이 연무장 바닥을 짓눌렀다.

김윤철은 세자 향이 서 있는 단상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사직을 걱정하는 충신의 낯빛이었으나, 반쯤 가려진 눈꺼풀 밑으로 흐르는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차갑고 끈질겼다.

"저하, 병장기의 예리함은 곧 외교의 칼날이옵니다. 대국의 사신단이 도성에 머물며 조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이 시점에, 이토록 가공할 무기가 사사로운 산야의 가마터에서 주조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면 저들은 이를 필시 참람한 군사적 도발로 여길 것이옵니다. 이는 사대의 예를 저버리는 행위이자, 조선을 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화근이 될 것이 자명하옵니다."

김윤철의 목소리가 연무장 구석구석을 파고들자, 백관들 사이에서 동요의 수군거림이 퍼졌다. 사대주의의 공포는 수십 년간 조선의 조정을 지배해 온 유령과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 신식포의 위력에 감탄하던 병조판서마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세자의 눈치를 살폈다.

태오는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의 뇌리 속에서 차가운 공학적 연산 장치가 가동되듯, 상황을 타개할 법리적 정보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뇌신경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지만, 태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인이 아뢰옵니다."

태오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김윤철이 고개를 돌려 태오를 경멸 어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노비 주제에 감히 어전에서 입을 여느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태오는 흔들리지 않고 세자 향을 똑바로 응시했다.

"김 대감께서는 대국의 이목을 우려하시나, 이는 오히려 국법의 엄정함과 사유의 원칙을 알지 못해 하시는 심려이옵니다."

"네 이놈! 감히 조정의 중신에게 무엄하게 무슨 망발을 지껄이느냐!"

김윤철의 수하인 사헌부 지평이 소리를 질렀으나, 세자 향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향의 눈빛에는 태오가 어떤 패를 꺼내 들지 지켜보겠다는 강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계속하라. 사노비 태오의 입에서 어떤 법리가 나올지 내 들어보겠다."

태오는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한 장의 서첩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군기시의 먼지 쌓인 서고와 형조의 율법 기록을 뒤져 찾아낸, 아직 완성되지 않은 법전의 초안이자 선례들이었다.

"조선은 예의 도리뿐 아니라, 국법의 자구(字句)로 다스려지는 나라옵니다. 태종 대부터 다듬어져 오고 있으며, 전하의 치세에 이르러 이조와 형조에서 논의 중인 수교(受敎) 및 경제육전 등록의 초안을 보옵소서. 거기에는 분명히 명시되어 있나이다."

태오가 서첩을 펼치며 낭독했다. 그의 어조는 율법을 다루는 형조 판서보다도 정밀하고 거침이 없었다.

"‘향화인(向化人) 및 사노비가 스스로의 자력으로 산야를 개간하거나, 흙을 이겨 성조(成造)한 사유 토지와 가옥, 그리고 대지(垈地)에 대해서는 그 소유권을 완전히 보장하며 관부에서 이를 사사로이 몰수할 수 없다.’"

연무장에 모인 백관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태오가 인용한 구절은 왕실과 조정이 개간을 장려하고 사노비들의 유망을 막기 위해 법전에 정식으로 삽입하려던 사유권 보장 선례였다.

"매봉골의 반사로 가마터는 관청의 예산이나 관군의 노동력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오직 소인의 개인적 재원과 노동력으로 성조한 사유 대지이옵니다. 국법에 따르자면, 이 가마터는 조정이 강제로 압수하거나 폐쇄할 수 없는 사유의 영역입니다. 만약 명나라의 사신이 이를 문제 삼는다면, 조선은 ‘국법에 따라 사노비의 사유 재산조차 침해하지 않는 정당한 법치국가’임을 당당히 천명하면 될 일이지, 어찌 사사로운 가마터를 내어주며 대국의 눈치를 보려 하십니까?"

김윤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오가 던진 칼날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다. 성리학자들이 가장 숭상하는 '법치와 명분'의 논리로 김윤철의 주장을 정면으로 되받아친 것이다.

"네 이놈! 감히 일개 노비가 사유 재산권을 운운하며 조정의 외교 대사를 그르치려 드느냐! 저 가마터에서 나오는 쇠는 군기시의 신식포를 만드는 철이다. 어찌 그것이 사사로운 물건이란 말이냐!"

김윤철이 윽박질렀지만,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기에 '합법적 거래'가 존재하는 것이옵니다. 가마터는 소인의 사유지이나, 거기서 생산되는 강철은 조정과의 정당한 계약을 통해 군기시에 납품되는 구조입니다. 기술의 소유권과 생산지의 사유권을 분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명률과 우리 경제육전이 가리키는 법의 정신이옵니다."

"이, 무엄한 놈이...!"

김윤철이 말을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그가 내세웠던 사대주의적 명분은 태오가 쳐놓은 정밀한 법리적 그물망에 걸려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때, 단상 위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세자 향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기막힌 설득력에 대한 경탄과 함께, 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군주로서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하하! 기가 막히는구나. 사노비의 입에서 조정의 법전 초안이 흘러나오고, 그것이 대국의 외교적 억지를 막아서는 방패가 되다니."

향이 천천히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그의 시선은 김윤철을 지나 태오에게 멈추었다.

"김 대감의 우려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 사신단의 눈에 이 가마터가 비인가 무기 제조 창고로 보인다면 곤란하겠지. 그렇다면 법리에 따라 이를 해결하면 될 일이다."

향이 손을 들어 좌중을 압도했다. 그의 목소리에 엄숙한 위엄이 실렸다.

"이에 명하노라! 매봉골의 가마터는 사노비 태오의 사유 재산권을 철저히 보장하되, 국방의 대업과 국가 기밀 유지를 위해 조정이 이를 특별 기밀 협약으로 묶는다. 가마터의 명칭을 **‘주선제강소(鑄鐵製鋼所)’**로 명명하고, 이를 조정이 공인하는 독립 기구로 승격한다!"

"저, 저하! 그것은 온당치 않사옵니다!"

김윤철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향은 그의 말을 칼로 자르듯 끊어냈다.

"무엇이 온당치 않다는 말인가? 주선제강소는 사영의 특례를 유지하되, 국가의 기밀을 다루는 공관의 지위를 동시에 부여받는다. 이로써 사헌부나 조정의 그 어떤 부서도 사사로이 이 가마터를 침탈하거나 압수할 수 없으며, 오직 세자궁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둔다. 또한, 주선제강소의 원활한 운영과 기술 개발을 위해 매년 삼천 관의 비밀 국비를 합법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삼천 관이라는 거대한 액수가 언급되자 연무장이 다시금 술렁였다. 이는 대규모 관청의 일 년 예산에 버금가는 금액이었다. 김윤철이 쳐놓은 덫을 역이용해, 태오는 가마터의 완벽한 사유권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국가의 막대한 비밀 자금까지 지원받는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태오는 세자 향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저하의 혜안에 대공(大功)이 깃들 것이옵니다."

이로써 조정의 그 어떤 권력자도 태오의 기술을 사사로이 탈취할 수 없게 되었다. 주선제강소는 완벽한 법적 방어막을 두른 채, 조선 최고의 기술 성소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행사가 끝난 뒤, 연무장 뒤편의 가마터 임시 막사 안에서 태오는 예영과 마주 앉았다. 예영은 탁자 위에 놓인 주판을 탁탁 두드리며 특유의 영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설 행수. 아니, 이제는 주선제강소의 설립자라 불러야 할까요?"

"비아냥거릴 시간은 없을 텐데요, 대방."

태오가 냉정하게 대꾸하며 찻잔을 들었다. 예영은 주판알을 튕기던 손을 멈추고 태오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아냥이 아니라 감탄입니다. 김윤철의 음모를 국법으로 들이받아 받아치다니요. 덕분에 제 상단도 아주 든든한 날개를 달았습니다. 이번 주선제강소 지정을 통해, 저희 송상 유통망이 제강소에 들어가는 석탄과 철광석, 그리고 석회석의 독점 공급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국비 삼천 관 중 상당수가 저희 상단을 거치게 되겠지요."

예영의 눈에 탐욕이 아닌, 거대한 사업을 굴리는 대방으로서의 자부심과 열정이 빛났다.

"물론, 국외 자본 유통도 제 상단이 책임지겠습니다. 명나라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들어오는 은자(銀子)를 이 제강소의 부자재 조달에 교묘히 녹여내겠습니다. 조정의 눈을 피해 가마를 키우려면 사영 상단의 돈세탁이 필수적일 테니까요."

"그것이 내가 대방을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입니다. 공학적 효율성은 공급망의 안정성에서 시작되니까요."

태오의 말에 예영이 피식 웃었다.

"공학적 효율성이라... 여전히 차가운 분이시군요. 하지만 그 차가움이 마음에 듭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받으시지요."

예영이 품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싼 문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태오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예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세자 저하께서 내리신 독점 명령서입니다. 주선제강소의 설립자인 귀하의 신분적 한계를 없애기 위해, 저하께서 직접 도승지를 거치지 않고 내지(內旨)로 귀하의 면천 속량 수속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은 조만간 천한 노비가 아니라, 조선의 어엿한 양인, 아니 그 이상의 신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태오는 비단 문서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신분 상승. 현대의 지식을 가진 그에게 노비라는 족쇄는 매번 법리적 방패를 짜내야 하는 번거로운 제약일 뿐이었다. 이제 그 제약마저 풀려가고 있었다. 대륙을 압도할 기술 패권국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주춧돌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듯했다.

그 순간, 막사 바깥이 급격하게 소란스러워졌다. 군기시 관원들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거친 말발굽 소리가 흙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

"비보요! 비보를 전하옵니다!"

막사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세자궁의 내관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태오와 예영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인가?"

태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명... 명나라 황제의 특사인 직강(直講) 한림원 태관 사신단이옵니다! 예고도 없이 불시 정남 행렬을 이끌고 도성 대로에 당도하였옵니다! 저들이 지금... 군기시와 매봉골의 가마터를 수색하겠다며 숭례문을 통과해 이쪽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예영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황제의 특사. 예고 없는 정남 행렬.

대국의 거대한 그림자가 마침내 선전포고도 없이 조선의 심장부를 향해 들이닥치고 있었다. 수백 번의试錯 끝에 이제 막 불을 지핀 주선제강소가, 거대한 폭풍우 앞에 노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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