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방을 메운 검은 안개가 뱀처럼 기어와 소년의 발목을 옥죄었다.

종남학이 사두한 독령들이 내뿜는 검은 독무는 단순한 독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기를 갉아먹고 도심(道心)을 더럽히는 마도(魔道)의 비술이었다. 안개가 닿는 곳마다 풀과 나무가 검게 타들어 가며 초라한 비명을 질렀고, 청명진의 등 뒤로 소리도 없이 다가온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살기를 뿜어냈다.

"흡...!"

독무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청명진의 단전 한구석에 숨겨져 있던 사악한 기운, 즉 사패천이 일찍이 심어 두었던 검은 마교의 씨앗이 기이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전이 찢어질 듯한 극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가를 적셨고, 눈앞의 시야가 붉고 검은 혼돈으로 물들어 갔다. 정종의 자하진기가 마기를 밀어내려 요동쳤으나, 독령들의 기괴한 향로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독무는 그의 숨통을 완전히 틀어막을 기세였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청명진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번뜩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가차 없는 매질과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밤마다 몰래 상처를 치료할 약초를 달여 두던 만화객잔의 점소이, 백무린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무학의 근본은 외물이 아닌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도심에 있다. 마음이 굽이치면 검도 굽이치고,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어떤 사술도 너를 꺾지 못한다.'

머릿속을 울리는 그 건조하고도 묵직한 음성이 청명진의 흩어지려던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맸다. 소년은 차가운 바닥에 단단히 발을 디뎠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화산의 독종이 지닌 기개가 그의 척추를 타고 곧게 솟구쳤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청명진은 외물에 휘둘리던 감각을 단전 내부로 수렴했다.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한 정종 자하진기가 그의 혈도를 따라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웅-!

청명진의 전신에서 은은한 자색 광채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쇠락해 가던 화산파의 정수가 마침내 실체화된 자하의 방어 벽이었다. 자색의 장막이 소년의 몸을 감싸 안는 순간, 그를 옥죄던 검은 독무가 치직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무, 무엇이...!"

어둠 속에서 향로를 들고 서 있던 독령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정종 무학의 극의라 불리는 자하진기의 순수한 기운 앞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던 사도(邪道)의 비술조차 한낱 미천한 연기에 불과했다.

"화산의 검은 결코 사악함에 무릎 꿇지 않는다."

청명진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맑은 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손에 쥔 녹슬고 이가 빠진 철검이 공명하듯 웅웅 울어댔다.

그는 검을 비껴 쥐고 화산의 기초 검법인 분뢰수(奔雷手)의 초식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는 범속한 기초가 아니었다. 자하진기의 맹렬한 회전력이 더해진 분뢰수는 뇌전의 기세를 품은 자색의 폭풍으로 변모해 있었다.

콰아아앙-!

일 자로 뻗어 나간 검 기가 허공을 가르자, 사방을 뒤덮고 있던 검은 안개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강철 같은 기개로 밀어붙인 자색의 폭풍은 독령들이 들고 있던 기괴한 향로들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매망량의 하찮은 요술이 화산의 참된 정종 내공 앞에서 완벽하게 척결되는 순간이었다.

"크아악!"

"이, 이럴 수가...!"

독무가 걷히며 독령들이 사방으로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그들이 지닌 사악한 내력이 자하진기의 역풍을 맞아 단전이 뒤틀린 탓이었다.

저만치 뒤로 물러나 있던 종남학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자신의 모든 계책과 비열한 수가 단 한 자루의 녹슨 철검과 자색의 진기 앞에 무참히 부서져 나가는 목도였다.

청명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종남학을 내려다보았다. 검 끝에서 흘러내린 자하진기의 잔영이 대지 위에 자색 매화의 궤적을 그리며 흩어졌다.

***

같은 시각, 만화객잔의 뒤뜰.

앙상하게 말라 비틀어진 매화나무 아래, 백무린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마른 흙바닥을 적셨다.

"무린...! 정신 차려요! 제발...!"

설자화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녀의 고운 손은 이미 무린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매번 백무린의 한방약재를 구하기 위해 가산을 아끼지 않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영약으로도 그의 무너져 내리는 육신을 붙잡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라..."

백무린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나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가 청명진에게 기연을 설계하고 자하진기를 각성시키는 대가로 치러야 할 천도(天道)의 업보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였다. 타인의 운명을 비틀어 기연을 선사할 때마다 급격히 단축되는 수명은 둘째 치더라도, 과거 천하를 평정하며 쌓았던 피의 살업이 심마가 되어 그의 육신을 안쪽에서부터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특히나 방금 전, 청명진이 위기에 처했을 때 느꼈던 극도의 심려와 분노는 그의 '감정의 금기'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타인에게 깊은 정서적 일렁임을 느끼는 순간 발동하는 오감마비의 형벌이 다시금 그의 육신을 잠식해 들어왔다.

콰아아-!

귓가에서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이명이 일더니, 갑자기 오른쪽 귀의 모든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오른쪽 고막이 일시적으로 완벽히 상실되는 감정의 백래시였다. 한쪽 세상이 완벽한 침묵 속으로 침잠하자, 무린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아..."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각의 상실에 이어, 눈앞의 시야마저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흑백으로 변해 버린 시야 속에서 오직 청명진이 있는 방향만이 붉고푸른 빛으로 기괴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제자와의 인과적 교감이 깊어질 때마다 발생하는 가벼운 시각 왜곡의 중간 발현이었다. 이 저주받은 오감의 마비는 그가 제자를 향해 마음을 열 때마다 치러야 하는 핏빛 대가였다.

설자화는 무린의 오른쪽 귀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무린의 겉옷 위로 툭툭 떨어졌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왜 그 아이를 위해 당신의 남은 생을 전부 불태우려 하냔 말이오! 과거의 업보는 이미 충분히 치렀지 않소!"

무린은 들리지 않는 오른쪽 귀 대신, 겨우 살아남은 왼쪽 귀로 그녀의 애달픈 음성을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입가를 닦아내며, 짐짓 차갑고 무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 남은 오감마저 완전히 마비되어 제자의 마지막 길을 지켜볼 수조차 없게 되리라.

"내 업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린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 아이는 내가 지어야 할 마지막 매화꽃이다. 화산이 다시 피어나지 못한다면, 내가 강호에 남긴 피의 흔적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 저주로 남을 터.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은 거두어라."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설자화는 그의 모진 독설 이면에 숨겨진 처절한 숭고함을 알기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품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거친 가죽으로 감싸인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을... 보시오."

자화의 목소리가 급격히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수집해 온 정보망을 통해, 목숨을 걸고 가로챈 밀서였다.

무린은 흐릿하고 왜곡된 시야를 억지로 모아 자화가 건넨 밀서를 바라보았다. 밀서의 겉면에는 음산하고 붉은 마기가 서려 있었고, 그것은 필시 마교의 고위 인물이 작성한 것임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종남파의 가주가... 마교의 장로 사패천과 손을 잡았소."

설자화의 말에 무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이번 보름날 열릴 화산파의 검협대회를 노리고 있소. 종남파가 화산을 하급 문파로 흡수하는 그 순간, 사패천이 직접 움직여 화산의 대영맥 아래 봉인된 지맥을 완전히 파괴하고 오염시키려 하오. 화산의 영기를 영구히 말살하여, 정종무학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겠다는 뜻이오."

밀서를 움켜쥔 무린의 손가락끝이 파르르 떨렸다. 보름날의 검협대회. 그것은 청명진이 화산의 영맥 수호자로서 우뚝 서야 할 운명의 날이자, 종남파와 마교가 쳐놓은 거대한 덫의 종착지였다.

설자화가 밀서의 마지막 장을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검붉은 피로 쓰인 글귀 위에, 마교 장로 사패천의 독특한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인장을 바라보는 순간, 무린의 단전이 얼어붙는 듯한 기괴한 한기가 엄습했다.

밀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보름날, 화산의 지맥이 꺾이는 날에... 내 직접 그 아이의 단전에 심어둔 검은 마태를 깨워, 화산의 천재라 불리는 청명진의 혈맥을 나의 손으로 회수할 것이다.]

핏빛 인장 위로 서린 사패천의 서늘한 살기가 무린의 왜곡된 시야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린의 손가락이 밀서를 쥔 채 부르르 떨렸다. 종이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 것은, 그의 한쪽 귀가 완전히 침묵에 잠긴 탓이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진기가 가슴을 짓눌렀다. 제자의 목숨을 정조준한 마교의 마수에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극통이 일었다.

감정이 요동치자마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관통하는 살업의 저주가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다시 한번 기이하게 뒤틀렸다. 흑백의 세상 속에서, 오직 청명진이 있는 화산의 정수리 방향으로 검붉은 실타래가 어지럽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인과율의 끈이자, 제자의 몸속에 심겨진 마교의 씨앗, 마태(魔胎)가 보내는 불길한 고동이었다.

"윽...!"

무린의 이마에서 핏줄이 터져 나가듯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려 턱 끝을 적셨다. 제자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는 겁경무량의 인과법율이 가동된 탓이었다. 청명진의 단전 속 마태가 요동치는 순간, 그 고통의 절반이 인과의 실을 타고 무린의 육신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어 단전을 도려내는 듯했다.

"무린! 손을 떼요! 더는 진기를 움직이면 안 되오!"

설자화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무린의 피부를 느끼며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나 무린은 그녀의 손을 완강하게 뿌리쳤다. 그의 한쪽 눈은 이미 완전한 어둠에 잠겨 가고 있었으나, 남은 한쪽 눈은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종남의 얄팍한 술수 뒤에... 사패천의 검은 그림자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구나."

그의 목소리는 한 자락 바람에도 바스러질 듯 건조했다. 무린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객잔 뒤뜰의 매화나무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발자국마다 검붉은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나무는 처참했다. 잎사귀 하나 남지 않은 앙상한 가지는 마치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해골의 손가락 같았다. 무린이 그 고목에 손을 얹자, 그의 생명력과 연동된 나무의 등걸에서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연을 베풀고 천벌을 대신 받은 대가가 고스란히 고목의 몸통으로 새겨지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밤하늘에 기이한 먹구름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쿠르릉-!

대지를 뒤흔드는 뇌성이 낮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천기를 누설하고 인과를 뒤흔든 자를 심판하기 위해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번뜩이는 천벌(뇌겁)의 전조였다. 무린의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던 살업의 심마가 하늘의 분노와 공명하여 그의 전신 혈도를 압박해 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무린은 멀어지는 한쪽 귀를 애써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보름날의 검협대회까지는 불과 사흘. 사패천이 화산의 영맥을 깨부수고 청명진의 숨통을 끊으려 하는 그날이 바로 무린 자신의 생이 다하는 날이 될 터였다.

자화가 밀서를 품에 넣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 내 지부의 무사들을 총동원하겠소. 종남파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차단할 테니, 당신은 제발..."

"부질없는 짓이다."

무린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사패천은 인간의 절망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네 무사들이 갈 곳은 사지가 될 뿐이다. 그놈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린은 화산의 정수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시야 끝에서, 화산의 영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무린의 안광이 거칠게 가라앉았다.

그의 왜곡된 시각 너머로, 화산파의 본당이 위치한 산봉우리 위로 기이한 빛깔의 기둥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청명진이 각성했던 순수한 자색의 자하진기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자색의 광채 한가운데, 썩은 물처럼 탁하고 어두운 흑적색의 마기가 뱀처럼 뼛속까지 파고들며 자하의 빛을 무참히 오염시키고 있었다.

마태의 폭주였다. 사패천의 밀서에 적힌 주술적 공명이 벌써부터 제자의 단전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진...! 네놈이 어찌하여...!"

무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속 혈도가 일시에 뒤틀리며 한 움큼의 피가 다시 마당을 적셨다. 제자의 위기는 곧 그의 심마를 극대화했고, 전신의 진기가 폭주하려 요동쳤다.

그때, 만화객잔의 굳게 닫힌 목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누군가 마당으로 굴러 들어왔다.

"커흑...!"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화산파의 도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흙바닥을 기며 무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청명진의 사형이자 화산의 대제자인 청운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깊은 자창이 나 있었고, 상처에서는 검은 독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 대협...!"

청운이 피를 토하며 무린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그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사제... 명진 사제가...! 본산에서 갑자기...!"

청운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무린은 무너져 내리는 육신을 억지로 지탱하며 청운을 내려다보았다. 한쪽 귀는 들리지 않고, 한쪽 눈은 어둠에 잠긴 채, 그는 청운의 입술 모양과 남은 시야 하나로 그의 절박한 외침을 읽어내렸다.

"명진 사제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검을 뽑아 들고... 장문인과 사형제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눈이... 눈이 검게 변해 버렸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객잔 마당으로, 또다시 마른하늘에 날카로운 벼락이 내리꽂혔다. 청명진의 폭주와 마태의 각성. 보름날의 파멸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화산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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